16화 준비
게임에 존재하는 능력치 상승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고정 수치 증가와 퍼센트 증가.
‘증표로는 고정 수치가 증가했었어.’
고정 수치 증가는 버프 대상의 기본 능력치가 낮을수록 높은 효과를 보인다.
반대로, 퍼센트 증가는 버프 대상의 기본 능력치가 높을수록 큰 효과를 보이고.
그리고, 방금 각성한 김 중위의 능력은 바로.
‘퍼센트 증가!’
증표가 아직 약한 부대원들의 능력치를 단숨에 쓸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려 준다면.
김 중위의 ‘최하급 지휘’는, 부대원들의 자체 능력치가 높아질수록 높은 효율을 보일 것이다.
거기에…….
‘두 버프는 보통, 시너지를 보이지.’
퍼센트 증가식의 버프는 고정 수치 증가의 버프까지 포함해서 계산한다.
이미 증표를 통해 고정 수치 증가 버프를 확보한 우리 부대에는, 김 중위의 능력이 날개를 달아 준 셈이나 다름없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업적 : 헤어날 수 없는 맛.]
[요리를 통해 한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요리사로서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업적 중 하나입니다.]
[업적 보상으로 [최상급 식재료 : 아룡의 심장]이 지급됩니다.]
[경험치를 대량으로 획득합니다.]
[견습 요리사 lv. 10에 도달하셨습니다.]
[승급이 이루어집니다.]
[견습 요리사 lv. 10 → 하급 요리사 lv. 1]
업적 달성.
그리고 견습 요리사 lv. 10.
“9에서 죽어라고 안 늘더라니.”
한동안 오르지 않던 레벨에 의아해하던 차였다.
하지만 10을 찍자마자 승급한 직업을 보니, 이해가 간다.
‘원래 승급전은 빡센 법이니까.’
레벨 업도 했겠다, 하급 요리사로 바뀐 능력치에 무언가 변화가 있나 확인해 봤다.
우선 기본적인 능력치 상승.
이건 레벨 업이 이뤄질 때마다 있었지만, 약간 바뀌었다.
‘레벨 업마다 1씩 오르던 스탯이 2가 올랐어.’
승급이 이뤄졌기 때문일까.
레벨 상승에 따른 스탯 상승치도 올라가는 듯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최하급 요리 숙련 → 하급 요리 숙련]
[최하급 화염 저항 → 하급 화염 저항]
.
.
.
‘최하급 특성들이 전부 하급 특성으로 바뀌었어.’
내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특성들.
최하급 단도 숙련, 최하급 요리 숙련 등.
모든 특성이,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바뀌었다.
최하급만 해도 그 분야의 달인 수준의 능력을 보여 주던 특성들.
그 특성들이 거기서 한 단계 더 성장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킬 - 전투식량 (new)]
[살다 보면,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전투에 참가하는 병사들이 대표적인 예!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야전에서 섭취 가능한 전투식량의 맛을 끌어 올리는 연구는 모든 군사 세력 지도자들의 주요 과제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당신을 발견한다면, 어떻게든 채용하고 싶어 안달이 날 겁니다!]
[전투용 보존 식량의 제조가 가능해집니다.]
[전투식량은 일반 식사에 비하면 능력치가 다소 떨어지나, 유통기한이 길고, 작은 크기의 음식으로도 높은 열량의 섭취가 가능해 휴대에 용이합니다. 보장된 맛은 물론이구요!]
전투식량.
김 중위가 먹고는 맛없다며 괴로워했던 물건과 같은 이름.
“하긴, 전투가 격화되면 모든 병사에게 매끼를 챙겨 주긴 힘들 테지.”
이 스킬로 만들어지는 전투식량은, 일반 군부대의 전투식량과는 격이 다르다.
일반식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고 하나, 능력치의 상승효과는 물론.
요리사의 실력에 따라 맛 또한 보장된다.
“나쁘지 않아.”
이 스킬은,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나름대로 유의미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
그리고, 김 중위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
그렇다면 다음은.
“신영준 병장님. 슬슬…….”
“그래. 이쪽도 마침 준비가 끝난 참이다.”
부대를 찾아온 생존자들.
그들과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
* * *
“김 중위님. 말씀드린 거, 이해하셨겠죠?”
“모든 대화는 병사들에게 맡기고, 나는 뒤에서 고개만 끄덕이는 역할…… 알겠습, 아니. 알겠다.”
내 요리를 먹고 완전히 굴복한 김 중위는, 이제는 내 명령에 완벽히 복종하는 상태가 되었다.
부대원들이 급격하게 순해진 김 중위를 보고 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놀랐을 정도.
“존댓말, 주의하세요.”
“으음, 아, 알았다…….”
부대원들에게서 리더로 인정받은 것은 나지만.
일단 우리 부대의 최고 지휘관은 김 중위.
그렇기에, 대외적인 활동에는 김 중위가 우리 부대의 대표로서 나서 주는 걸로 결정했다.
취사병 병장인 나보다는, 중위라는 제법 그럴싸한 직위를 가진 김 중위가 나서 주는 것이 외부인들이 보기에 그럴싸해 보일 테니까.
실제로 업무능력 같은 게 부족하고 불성실해서 그렇지.
김 중위는 생긴 것만 보면 그럴싸한 참군인에 말도 잘하고, 일은 못 하면서 정치질은 잘하는 편이다.
어차피 김 중위는 내 요리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으니, 멋대로 이상한 짓을 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일개 병사한테 자꾸 존대를 하려고 하는 저 버릇. 저것만 어떻게 된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강제적인 개과천선을 마친 김 중위의 첫 번째 대외 업무가 바로.
생존자들과의 대화의 장.
‘대화의 장이라고 하면 훈훈해 보이지만.’
나와 병사들은, 이 대화를 말로 이루어지는 전투라고 여기기로 했다.
‘저들 중에 우리에게 위해를 끼칠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괴물에게서 도망쳐 온 생존자들.
분명 피해자이고, 약자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선하다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은 되지 않는다.
‘발톱을 숨겨야 한다.’
태준이가 남긴 메시지에 의하면, 어째서인지 우리는 저들에게 우리의 능력을 감춰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대화에서 취해야 할 전략은 단순하다.
‘아군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적게, 저들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많이.’
그런 생각으로 나름 비장한 각오를 하고, 준비된 방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회의를 담당하게 된 이민재 병장입니다.”
“김 중위님이 아니라요?”
“중위님도 회의에는 참여하실 겁니다. 다만, 생존자분들과의 협의는 지휘를 담당하시는 중위님보다는 현장 일을 담당하는 저희가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셔서요.”
“아, 네.”
일단 우리 중 대표로 나서기로 한 것은 민재 형.
우리 부대에서 가장 고학력자로, 머리도 좋고 말도 잘한다.
민재 형은 리더인 나를 내세우려고 했지만, 내가 리더 권한으로 명령하니 결국은 수긍하며 대표로 나서게 된 것.
‘리더 자리는 수긍했지만, 그렇다고 온갖 귀찮은 일까지 다 맡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저들에게는 이번 대화에 참여할 만한 대표들을 정해 와 달라고 했다.
스무 명이 넘는 생존자들 전원과 대화하다 보면 입이 늘어난 만큼 괜히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 쪽에는 김 중위와 민재 형을 포함한 부서별 최고참 병사들이 한 명씩.
그리고 저쪽에는 다섯 명의 남녀가 참여했다.
‘생활관별로 한 명씩 나온 건가?’
우리 생활관의 3층을 통째로 내어 주며 한 방에 5명씩 배정됐으니까.
그 와중에 나름대로 친한 이들끼리 같은 방을 쓸 수 있도록 했으니, 방당 한 명씩의 대표를 정해서 보낸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그중에 내게 우리 부대가 ‘몇 대대’인지를 물어봤던 사내가 있지 않나 둘러봤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흥, 일반 병사들하고 말이 통할지나 모르겠는데.”
“여기 모인 병사들은 부대의 실무를 담당하는 부서별 최고참 병사들이니, 궁금하신 점이나 원하는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셔도 될 겁니다.”
“쯧, 궁금한 점이라……. 그럼 하나만 묻지.”
과연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김 중위가 대표로 나오지 않은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덩치가 꽤 큰, 험악한 인상의 중년 사내.
얼굴은 그렇다 쳐도 자리에 앉아 있는 자세부터가 묘하게 껄렁거리는 것이, 그다지 질이 좋아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 회의를 여는 데 3일이나 걸린 이유는 뭐요?”
“……여러분들이 긴 도피로 인해 지쳐 있는 만큼 휴식 시간과 회의에서 나눌 이야기나 대표를 정할 시간을 드리고자 했고, 또 저희도 부대의 업무 때문에 바빠서…….”
“그러니까, 다른 업무들 때문에 우리는 뒷전이셨다?”
남자의 태도는,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만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지.’
자기 세금이 군인의 월급을 내는 데 쓰인다는 이유로, 자신을 군인들의 상전쯤으로 생각하는 경우.
눈앞의 남자 또한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무슨!”
“박권창 씨!”
박권창이라 불린 사내는 트집 잡을 거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따지려 들었으나.
또 다른 생존자의 목소리가 그런 그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우리에게 처음으로 대화를 요청했던, 젊은 여자였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주신 분들이에요. 불만은 알겠지만, 지금은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흥, 알겠소.”
박권창이라는 사내는, 좋게 말하면 드센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랄 맞은 성격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남이 자신의 말을 중간에 끊었음에도, 약간의 불만은 보일지언정 수긍하는 모습.
그 모습을 통해, 생존자들의 진짜 대표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생긴 것만 봤을 땐, 솔직히 상상도 못 했는데.’
기껏해야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저 여자가.
생존자 그룹의 리더다.
“죄송해요. 권창 씨는 성격이 좀 불같은 분이라.”
“아닙니다. 저희 측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인걸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나쁜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니고…….”
“이해했어요. 이런 상황인걸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저는 이상아라고 해요.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작은 양복점에서 일했죠.”
다행히 박권창과는 달리, 대표로 보이는 이상아 씨는 어느 정도 부드러운 태도였다.
“그러면, 저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그전에, 저희 부대에 도착하게 된 경위를 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경위요?”
“예.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저희 부대는 상당히 외진 곳에 있으니까요. 이런 곳까지 도망쳐 오시게 된 경위를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아, 네.”
저건 딱히 거짓말이 아니다.
우리 부대는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다.
산을 내려가 도시로 가는 데에도 차를 타고 1시간은 걸리는, 제1급 격오지 부대.
사회와 지나치게 격리된 탓에 병사들에게 위로차 추가적인 휴가가 지급될 정도로 외진 곳에 있고, 접근성도 떨어진다.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는 알아 둘 필요가 있겠지.
“일단……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지금부터 약 2주 전. 갑자기 괴물들이 나타났어요. 동시에 인터넷이나 TV, 전화 같은 연락 수단들이 모두 단절됐고요.”
“그렇죠.”
괴물이 출현했을 당시의 상황은 우리하고 비슷했던 모양이다.
“다양한 괴물들한테 습격당하고, 심지어 괴물에게 습격당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 좀비가 되어 일어나다 보니…… 엄청난 혼란이 일었죠.”
음, 우리도 참 혼란이 컸었지.
.
.
.
어?
‘분명 비슷한데, 뭔가 다른 단어가 들려왔는데?’
좀비.
좀비라고 하지 않았나?
“좀비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선임병이 무심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야 인마!’
당황스러운 건 알지만.
그렇게 놀라는 티를 내면 안 되지……!
“네. 좀비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민재 형이 급하게나마 둘러대며 수습하려고 나섰다.
“아, 아닙니다. 저희 부대에서는 좀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거든요.”
“으음……. 그래도, 어떻게 봐도 좀비처럼 생겼는데……. 그러면 여기선 어떻게 부르죠?”
“……워커라고 부릅니다.”
그야, 좀비를 그렇게 부르는 드라마 같은 게 있기는 했지.
“아하. 드라마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은가 봐요. 저도 그 드라마 재밌게 봤어요. 그럼 저희도 워커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아뇨. 생각해 보니, 좀비라는 단어가 더 정확한 것 같네요. 저희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네, 어쨌든, 그렇게 돼서-”
다소 어색한 변명이긴 했지만, 다행히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놀라서 입을 열었던 선임병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우리 부대와 사정이 비슷한 것 같았지만. 조금, 아니 많이 달라.’
이상아 씨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 내용은 요약하자면, 괴물들과 좀비들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다 만난 다른 생존자들과 합류하며 지금 정도의 규모가 되었고.
안전한 장소를 찾아 헤매던 도중, 생존자 중 한 명이 ‘그러고 보니 여기서 가까운 산에 군부대가 있다.’고 알려 줬다고.
“그게 나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구면이었다.
분명 다른 사람이 부르길.
‘박씨 할아버지?’
생존자들을 생활관으로 안내했을 때.
젊은 병사들이 저층을 쓰고 생존자들은 3층으로 몰아넣냐고 불만을 말했던, 깐깐해 보이던 할아버지.
“건설 일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말이지. 자기가 군부대에 일을 하러 갔는데, 그 부대가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곳이었다는 얘기를 하더군. 내가 들은 건 이 산의 깊숙한 곳에 군부대가 있다는 수준이었지만 말이야.”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박씨 할아버지가 말한 그 부대를 찾아가 보자는 얘기가 나왔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크게 이상한 것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 부대원들의 입장에서는,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내용이 있었다.
‘일단은 좀비.’
우리 부대의 본래 정원은 약 300인.
그중 간부, 휴가 나간 병사들을 제외하면 부대에 상주하는 병사가 200명 정도 된다.
괴물들이 습격해 온 날 그 절반이 괴물들에 의해 사망했지만.
그중에, 좀비가 된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부대원들이 이 사태를 아포칼립스라고 칭한 적은 있어도, 좀비 아포칼립스라고 칭한 적은 없었어.’
부대에서는 좀비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당연하다.
지상에선 사람들이 죽으면 좀비가 되어 일어났다고 하는데, 우리 부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
의아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몬스터.’
우리 부대를 습격한 것은 리자드들의 무리뿐.
하지만 이상아 씨의 설명에 의하면, 산 아래의 도시에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나타나 날뛰었다고 했다.
그나마 좀비들은 숫자가 문제지, 건장한 남성이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어지간한 괴물들은 총이라도 없으면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고.
이 부분은 그래도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했다.
‘우리가 영역을 차지하기 전까지, 이 산맥은 리자드들의 영역이었으니까.’
리자드들 역시, 총이 없으면 인간 따위는 가볍게 찢어발기는 괴물들.
리자드들의 무리가 산맥을 점거하면서 다른 괴물들을 쫓아낸 게 아닐까 싶다.
약점을 모르는 상태라면, 그 단단한 비늘을 뚫을 방법이 없는 강력한 몬스터인 셈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례지만, 지난번에 보니 무장이라고는 총이나, 하다못해 칼 같은 무기도 보이지 않고 기껏해야 쇠 파이프 정도였던 것 같은데.”
“네.”
“그 괴물과 좀비들 사이는 어떻게 뚫은 겁니까?”
“그 질문을 하실 것 같았어요.”
이상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잠깐 숨을 크게 들이쉰 후,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초능력을 각성했답니다.”
나름 각오를 하고 입을 연 것 같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예상하고 있던 말이다.
역시, 각성자가 없을 수 없지.
“저희 25명 중에 각성자는 저밖에 없지만요.”
“네?”
각성자를 숨기려는 우리가 나쁜 놈인가, 싶을 정도로.
시원하게 자신들의 전력을 유포하는 여인.
“그 초능력 덕분에, 좀비들을 뚫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죠.”
“…….”
“역시, 쉽게 믿을 수는 없겠죠.”
너무도 쉽게 자신들의 전력을 알려 주는 모습에 우리가 약간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우리가 초능력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그녀가 양손에 꺼내든 물건은, 가위였다.
한 손으로 들 만한 사이즈긴 하지만, 평범한 가위에 비하면 꽤 큰 가위 두 개.
길이가 40센티는 되지 않을까?
“재단용 가위예요. 커튼 같은 걸 수선할 때 쓰는 거라, 일반적인 가위보다는 꽤 크죠.”
“아, 그렇군요.”
“그리고, 흠. 실례 좀 할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우리가 앉아 있던 나무 책상에 가위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싹둑.
가볍게 원목 책상을 잘라 버리는 가위.
상당히 초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
‘……상황이 뭔가 익숙한데.’
내가 식칼로 나무 책상을 썰어 버리며, 각성의 존재를 입증했을 때.
그때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언제나처럼 양복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암만 봐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인간들이 가게를 습격했어요……. 이 가위로 좀비의 머리를 찔렀는데, 재봉사로 각성했다는 문구가 뜨면서 여러 능력을 얻었어요. 덕분에 가위질 한 번으로 좀비의 목을 잘라 버릴 수 있게 됐죠.”
“대단하군요……. 그런 능력을 가진 건 상아 씨뿐인 겁니까?”
생존자들이 각성자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긴 했지만.
민재 형은 일단 우리 측의 각성에 대해선 숨기는 태도를 유지하려는 듯했다.
“네. 저는 좀비를 죽이자마자 각성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더라구요. 다른 생존자 그룹과 마주쳤을 때 만난 각성자도 좀비를 죽이고 각성했다곤 했는데, 정확한 조건이 뭔지는 모르겠어요.”
‘좀비는 리자드와 다른 건가?’
리자드는, 가까이에서 죽인다는 조건만 충족하면 100%의 확률로 각성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좀비는 죽여도 각성에 성공하는 경우가 있고, 못 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
그 탓에 25명이나 되는 생존자 그룹에서 각성자는 이상아 씨뿐이고, 나머지는 이상아 씨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했다고 한다.
그녀가 생존자 그룹의 리더가 된 이유다.
‘하지만…….’
자신이 그룹의 유일한 각성자라는 것을 거리낌 없이 밝힌 이상아.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뻗은 그녀.
딱히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태준이 녀석이 남긴 말은, 이 안에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각성자가 아닌 이들이 큰 위해를 끼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무엇보다 나에게 직업을 물었던 남자.
그 후에도 몇몇 병사들에게 비슷하게 직업에 대해 물었다고 했으니, 확신할 수 있다.
그 질문은 각성 여부를 다분히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인가?
‘숨기고 있다.’
이 안에.
정체를 숨긴 각성자들이, 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