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취사병-25화 (25/227)

25화 하산 (1)

우리가 산맥의 지배권을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산맥 전역에서 군림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의 부대에서 방어전을 펼쳐 경쟁자를 제거했을 뿐.

“최근에 부대원들을 시켜서 조사해 본 결과다.”

민재 형이 군사 지도를 꺼내 들며 말했다.

우리 부대 근처의 지리가 적힌 군사 지도.

거기엔 정체 모를 X자 체크가 수북하게 되어 있었다.

“이민재 병장님? 이 표시들은 뭡니까?”

그 부분이 궁금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광일이가 물었다.

“최근에 괴물들이 목격된 장소다. 이걸 통해 대략적으로 근처의 몬스터 숫자도 가늠할 수 있겠더군.”

“어, 체크가 되게 많은 것 같습니다만.”

“잘 봤다. 실제로도 그럴 거다.”

“아.”

치프틴을 격퇴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부대에는 하루에 몇 마리씩의 리자드들이 쳐들어온다.

큰 무리가 아닌지라 격퇴에 문제는 없었고, 오히려 부대원들의 레벨 업에 도움이 되는 편이었지만.

“산맥에 퍼져 있는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다는 건가.”

“그래.”

민재 형은 지도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에 괴물들을 뱉어 내는 구멍이라도 뚫려 있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만…… 병사들이 관측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괴물은 줄어들긴커녕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거다.”

“우리 부대에 흘러 들어오는 녀석들은 꾸준히 사냥하고 있지만, 오히려 총 숫자는 늘고 있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게다가 최근엔 리자드 외에도 기괴한 형체의 괴물을 봤다는 얘기도 있어. 그나마 리자드들은 정보라도 있지, 다른 괴물들이 더 곤란할지도 모른다.”

리자드만 해도 약점을 알고 있으니 그나마 상대할 만한 거지.

약점의 위치를 모른다면 사수들 정도의 화력이 아니면 도저히 상대하기 어려운 괴물이다.

반대로 말하면 약점이라도 알고 있는 리자드가 그나마 나을 수도 있다는 것.

적의 전력은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울지도.

이쯤 되니.

오히려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었다.

“상아 조장.”

“네?”

“어떻게 이 부대까지 온 거야?”

이상아와 그녀의 그룹에 속해 있던 20명가량의 생존자들.

그들은 어떻게 저 산맥을 뚫고 올라온 거지?

“글쎄요……? 몬스터는 당연히 있었지만, 지금 말한 것처럼 많지는 않았어요. 저희는 숫자가 적은 편이다 보니,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올라왔죠. 가끔 조우하는 몬스터도 한두 마리 정도라, 어떻게든 처치할 수는 있었고. 그 리자드라는 몬스터는 아니었지만요.”

기척을 숨긴다니.

그런다고 몬스터들의 습격을 피할 수가 있나 싶다만.

“생각해 봐.”

그 의문은, 민재 형이 풀어 줬다.

“산맥을 오르는 이들을 발견한 건 우리가 치프틴을 쓰러트린 다다음 날이었어.”

“아.”

과연.

리자드 치프틴은 우리를 사냥하기 위해 산맥의 리자드를 규합하고, 습격해 왔다.

우리는 그걸 격퇴했고.

덕분에 산맥을 돌아다니는 리자드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던 시점에, 그녀의 그룹이 산맥에 발을 들인 셈.

반대로 생각하면.

“만약 저희가 며칠 빨리 산맥을 오르려 했다면……. 으으. 소름 돋네요.”

아쉽게도 지금의 우리는 그때와 같은 우연을 기대하기 어렵다.

부대원들은 숫자도 많고, 옮길 물자도 적지 않으니 몰래 이동하기도 어렵고.

교전은 불가피하겠지.

“하. 부대에서 방어전이라면 그래도 자신이 있는 편인데 말이지.”

“부대를 떠나 산맥을 내려가는 일은, 각오가 필요할 거다.”

어쩔 수 없다.

부대를 떠나 이동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상황.

가능한 한 철저하게 준비하는 수밖에.

“차량 정비는 다 끝냈습니다.”

나는 나대로 식당에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자니.

차량 정비병 출신의 병사가 보고를 해 왔다.

그를 따라 이동하자, 멀리서 여러 대의 차량이 보이기 시작했다.

군용 레토나에, 두돈반이라고 불리는 대형 트럭.

민간에서 쓰이는 승합 차량부터 의무용 환자 운송 차량까지.

“동원할 수 있는 차량들은 다 꺼내 왔습니다.”

“기름은 문제없나?”

“혹시나 해서 차량에 들어있던 기름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산에서 내려가서 약간 이동하는 정도라면 대체로 문제없을 겁니다.”

부대의 발전기가 소모하는 기름양이 워낙 많아 걱정했으나, 다른 병사들도 언젠가 차량을 이용해야 할 것임을 짐작했던 모양.

“일단 실을 수 있는 건 다 실었습니다만. 괴물과의 교전에서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불안하긴 하지만, 믿어 볼 수밖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차량을 동원한 이유.

전투에 사용하기 위함이다.

‘산 아래는 우리에게 불리한 영역이니까.’

그렇다면 어거지로도 유리하게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적어도 지금까지 나타난 몬스터들은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었으니.

거대한 차량들로 장벽을 세워, 일종의 바리케이드로 삼을 생각이다.

“다른 생존자분들의 보호는 맡기겠습니다.”

“네, 여러분도 힘내세요.”

아쉬운 점은 최근에 합류한 생존자들이 아직 각성하지 못했다는 점.

그래도 더 이상 산맥에 머무르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직 각성하지 못한 생존자들은, 상아에게 맡겨 가장 안전한 위치의 차량에 태운 뒤.

“개문하겠습니다.”

“가자.”

끼이이익…….

안개 낀 산맥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군부대.

그 부대의 정문이, 드디어 열렸다.

* * *

“전사들은 이쪽으로!”

“생존자 태운 차량 먼저 안쪽으로 보내!”

좁은 정문이 열리고, 부대 밖으로 나선 순간.

우리는, 작전대로 진형을 구축했다.

애초에 우리는 각성자가 포함된 전투에 익숙하지 않다.

당연히 복잡한 진형을 구사하는 건 어려운지라, 구축한 진형은 간단했다.

‘탱, 딜, 힐. RPG 게임에서는 정석인 진형이지.’

가장 외부에 장벽이 되어 줄 차량.

그리고 그 주변에 전사조들.

그 안쪽에, 원거리, 후방 지원 계열의 각성자들.

그리고 생존자들을 태운 차량이 위치한다.

단순하지만, 단순한 만큼 효과도 직관적이다.

전사와 차량들이 적을 막아 줄 동안, 뒤에서 마법사들이 공격하면 되는 것.

“문제는 적습이 사방 어느 곳에서 올지 모른다는 점이다만.”

“그 부분은 차량 근처에 자리 잡은 전사들이 유동적으로 막아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진형을 구축하는 병사들을 보며, 광일이가 중얼거렸다.

“차량에 탑승한 채로 빠르게 내려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습니다만.”

산맥을 내려가는 길은 차를 타고도 몇 시간이 걸리는 긴 길.

걸어서 내려가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이다.

속도로 따지면, 당연히 차를 타는 게 더 빠르겠지만.

“말했잖아? 너무 위험하다고.”

“크흠. 투정 한번 해 본 겁니다.”

우리 부대가 위치한 산맥의 도로는, 전체 중 절반 이상이 거친 비포장도로로 되어 있다.

심지어 길도 비좁은 편이라.

중간중간에는 차 두 대가 나란히 이동할 수 없는 구간도 많다.

험한 길인 것은 물론, 가드레일 따위도 없는 구간이 대부분.

사고라도 나면 즉시 산 아래로 낙하하게 되겠지.

애초에 이 도로를 쓰는 게 우리 부대뿐이었다 보니, 관리를 한다 해도 잡초나 돌을 제거하는 게 한계일 뿐, 도로 자체의 질이 높지는 못한 것이다.

‘운전병들도 산을 오르내릴 때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운전한다고 했지.’

신병에게는 산을 오가는 운전은 시키지도 않았다던가.

어느 정도 운전 실력을 본 뒤.

안 될 것 같다 싶으면 애초에 정비병 쪽으로 돌렸다고 할 정도로 험한 길인 것이다.

이런 길에서 차에 탑승한 채로 빠르게 이동하다가 괴물에게 습격이라도 당하는 순간.

산 아래의 절벽으로 즉시 낙하하고 말겠지.

차라리 습격받을지도 모르는 위치에 차량들을 배치.

장벽으로 삼으며 천천히 이동하는 게 더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진형 구축, 완료했습니다.”

“출발한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전원이 각성자가 된 덕에, 빠른 구보 정도로는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요리사인 나야 쉽게 지치지 않는 수준이지만.

전사들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도 제칠 정도로 빠르게 달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부대 근처는 좀 잠잠하군요.”

이동하는 차량에 맞춰 사주 경계를 하면서 이동하고 있자니.

병사 중 한 명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부대 근처는 우리의 영역이나 다름없던 곳.

지금까지는 잠잠하다만.

“이게 유지될 순 없겠지.”

과연, 내 예상대로.

부스럭…….

부대를 떠나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한 지 몇 분 되지 않았을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반쯤 야생에 가까운 산맥.

차라리 짐승의 발소리였으면 좋았겠건만.

“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 저 멀리서.

검은 형체가 빠르게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다.

“다들 무기 들어!”

“침착하게 가자.”

“부대에서 싸울 때랑 다를 것도 없어!”

선임병들이 병사들을 독려하고, 병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곧, 나무로 가려진 숲.

그 안쪽의 그림자 속에서.

“카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리자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뒤로도 몇 마리인가의 리자드가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전대로, 차량을 방벽으로 이용한다.”

전사조 병사들은 무기를 들고 차량의 뒤에 섰다.

방벽으로 삼은 차량들이 일차적으로 방어를 해 줄 터.

방벽을 돌아오는 적들만 상대하려 하는 작전이었으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차량은 방벽의 역할을 해 주지 못했다.

콰직.

“크륵……!”

리자드들은 날카로운 발톱을 부대의 운송용 트럭에 박는가 싶더니.

차량에 박힌 발톱을 지렛대 삼아 몸을 날리는 괴물.

녀석의 몸이 차량을 뛰어넘어 버렸다.

‘미친.’

차량이 방벽이 될 것이라 생각한 건 우리의 착각에 불과했다.

평범한 민간용 차량 따위.

저 녀석들에게는 쉽게 넘어 버릴 수 있는 종잇장 수준의 벽이나 다름없었다.

“제기랄, 이럴 거 같더라니.”

“장벽은 못 믿는다! 전사들 위치 바꿔!”

그 모습을 본 전사들이 급하게 위치를 바꿨다.

장벽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안 이상, 전사들이 커버해야 할 영역이 넓어진다.

“크륵!”

곧, 가장 먼저 차량을 뛰어넘은 괴물이 진형의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아군 사수 중 한 명이 괴물을 향해 발포하려는 듯 총을 들었으나.

탁.

나는 급하게 손을 뻗어 녀석의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작전대로 간다. 총은 쏘면 안 돼.”

“하, 하지만.”

우리가 원래 있던 부대는 아군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

사수들의 압도적인 화력을 이용한 방어전은 나쁠 게 전혀 없었다.

‘여기는 달라.’

나무들로 인해 시야가 차단된 산맥은, 아군의 원거리 화력을 크게 제한했다.

그것만이라면 그나마 괜찮지만.

문제는, 총이라는 화기 자체가 예로부터 가지고 있는 페널티.

“총성이 울리면, 괴물들이 몰려올 거다.”

커다란 발포음, 그 자체였다.

적은 숫자의 괴물들이라면 불리한 환경에서라도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총소리를 듣고 괴물들이 몰려오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로 답이 없어지니까.”

“하지만, 진형이…….”

“차량이 도움이 안 될 경우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야. 전사와 마법사들을 믿어라.”

실제로, 진형 너머로 몸을 날린 리자드를 상대하기 위해 전사들이 몸을 날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이 있었다.

거기에 마법사들은 사수와 달리 화력을 조절함으로써 큰 소음을 줄이고 싸울 수 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다.”

습격해 온 괴물들은 열댓 마리 이상.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투가 일어난 이상 소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산 전체에 울려 퍼지는 총성에 비하면 작다고는 하나 적어도 주변의 괴물들을 끌어들이기에는 충분한 소음이.

전투로 인한 소음과 괴물의 괴성을 듣고 다른 괴물들이 몰려왔다.

처음 우리를 습격한 숫자보다도 많아진 괴물들.

우리가 원래 있던 부대에서라면 큰 위협은 되지 않았을 숫자다.

우리 부대가 방어를 해낼 수 있었던 핵심은, 원거리 화력 투사.

탁 트인 시야와 여러 방어 시설들 덕에 가능했던 부분.

반면 저 녀석들은 온전한 상태로 진형 안에 들어와 버렸다.

충분히 위협적이긴 하다만.

‘우리도 나름 각오를 하고 왔단 말이지.’

준비한 게 없지는 않다.

나는 부대원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전투식량 취식!”

다급한 전투가 이뤄지고 있는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다소 뜬금없는 명령.

“예!”

“전투식량 꺼내랍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적과의 거리를 살짝 벌리며 행동에 들어갔다.

건빵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 드는 병사들.

그것은.

‘육포’.

작은 종이에 싸여 있는 검붉은 육포.

병사들은 급박한 와중에도 종이를 뜯고 육포를 입 안에 욱여넣었다.

물론 평범한 육포는 아니고.

[하급 요리사의 용기가 담긴 리자드 고기 육포]

[마력이 담긴 재료로 만든 요리입니다. 요리의 효과가 상승합니다.]

[보존식으로 제작된 요리입니다. 시간 경과에 따른 능력치 저하가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섭취 시,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섭취 시, 요리에 담긴 ‘강철 리자드’의 마력이 몸 안에 스며듭니다. 물리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크큭! 오랜만에 재밌는 싸움이 되겠구나!”

“오늘 저녁은 지옥에서 먹는다!”

“끼에에에엑!!!”

내가 직접 만든 요리.

전투식량의, 첫 실전 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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