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요새 (1)
“이 요새는 대체…… 뭐냔 말이다!”
별것 아닌 질문일 뿐이었는데.
그 질문을 들은 여왕의 태도가, 뭔가 이상했다.
그 태도를 보니.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림자의 장막]
[신선도 - 최상]
[밤의 귀족들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개인공간입니다.]
[현실과는 괴리된, 심상 속에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뚜렷한 실체가 없는 공간으로써, 구성원들의 심상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곳은 [그림자의 장막]
밤의 귀족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나.
‘그 자체는. 구성원들의 심상 세계를 구현한 곳이라고 했던가.’
딱히 뱀파이어만의 심상이라는 얘기는 없었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 요새는.’
그녀조차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즉.
‘여왕의 영지가 아니란 거다!’
반쯤 살아남기를 포기하고 있었던 나였으나.
그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머리가 팽팽하게 돌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내가 살아남을 방법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뛰어난 요리사라고 한들.
대인전에서는 우리 부대의 전사들보다도 못한 수준.
그런 내가 보스몬스터와의 1:1 대결.
심지어 적에게 더 익숙한 환경에서의 1:1 대결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기껏해야 최대한 시간을 끈 뒤.
다른 병사들이 어떻게든 구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정도가 유일한 방법.
이마저도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변수!’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요새는, 그녀에게도 미지의 공간이라는 것.
‘잘만 이용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머리 속으로는 최대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할지 궁리하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여기로 날 초청한건 그쪽 아닌가? 뭐가 문제란건지.”
“하, 모르는 척 할 셈이냐!?”
요새의 풍경을 보고 얼마나 분노한 것일까.
그녀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림자의 장막은 나의 심상 세계…… 본래라면 이 곳은 아름다운 핏빛의 파도가 치는 바다였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자마자 본 것은 저 요새였다.
내가 본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이야기하는 그녀.
“그 한 가운데에 나의 개인 침대가 세워져 있는 것 정도가, 내가 아는 풍경이었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보였고!”
“그런데?”
“네 놈이 요새라는 얘기를 꺼내자마자! 그 풍경이 변화했다!”
과연.
내가 그녀에게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을 얘기하자.
그제서야, 나와 그녀가 보는 광경이 동일해졌다는 뜻이다.
“네 놈이 한 짓이라는게 뻔하거늘. 모른척이라니.”
저벅.
분노한 그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다.
“기껏 함께 할 권리를 주려고 했거늘. 감히, 나의 세계를 더럽히다니!”
아까까지 나보고 대공이네 재상이네 설득하려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
자신의 세계에 불순물을 들여놓았다는 게 그렇게나 불쾌한 것일까.
진심으로 분노한 듯한 모습이었다.
‘협상은 글렀구만.’
저 태도를 보아하니.
날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아예 없어 보인다.
“너, 여왕이라고 했나?”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굳이 점잖게 대화를 나눠 줄 필요는 없겠지.
“내가 네게 굴복하기만 한다면. 날 대공 같은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이제 와서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늦었다. 내 세계를 더럽힌 네 놈에게 넘겨줄 자리 따위는 없으니.”
“딱히 그런 자리가 탐나서 그런건 아니고.”
어차피 험한 말 오갈 사이라면.
아까부터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지라.
“내가 그 쪽의 계급 체계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말이야.”
그 부분이나 짚고 넘어갈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게.
[식재료 감별(강화)]
“여왕이라니. 대공의 자리를 주겠다니. 푸흡.”
여왕은 무슨.
이 녀석.
“준남작 따위가, 나를 대공 자리에 앉혀 줄 수도 있고. 그런 건가?”
“뭐, 뭐라……!”
[뱀파이어 준 남작]
[아리엘라 폰 카르슈타인]
‘준남작이다.’
내가 아는 한.
귀족 체계에서도 저 아래에 쳐박혀 있는 계급.
아니 이게.
하극상도 정도가 있는 법이잖아.
‘남작도 아니고. 준남작이 여왕?’
거리가 너무 먼 거 아니냐.
몇 계급을 뛰어넘은 거야, 대체?
“갓 이병이 장성급 자리를 약속해 주겠다. 뭐 그런 거로 들려서.”
“……감히!”
의자에 앉아 있던 여왕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든다.
그래.
내가 의도한 대로.
‘흥분한 상태로 달려 드는 적이라면. 한 방은 먹일 수 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요새.
거기에 내 도발까지.
지금의 그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은 물론.
내 도발로 인해 흥분한 상태.
즉.
냉정한 판단력을 잃어 버린 상태다.
‘판단력을 상실한 적이라면.’
아무리 나보다 강력한 괴물이라고 한들.
빈틈을 찾을 수 있을 터!
박씨 할아버지가 만든 두 자루 식칼을 꺼내 든 뒤.
속으로 중얼거렸다.
‘특성 강화권 사용.’
얼마 전.
던전 공략에 성공하면서 획득한 특성 강화권.
이런 데서 쓰기 아깝긴 하지만.
일단 살고 볼 일 아니겠냐.
[중급 단도 숙련(강화)]
서걱-
“……네놈!”
여왕의 오른 팔이.
허공을 날았다.
* * *
[중급 단도 숙련(강화)]
특성강화의 효과는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식재료 감별과 달리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지만.
더 빠르고.
더 예리해졌다.
서걱-
나를 향해 휘둘러진 여왕의 오른팔.
그 오른팔이, 허공에 피를 흩뿌리며 날아간다.
“……네 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접도록 하거라.”
분명한 유효타.
하지만.
그 유효타가, 내 입장에선 전혀 기쁘지 않았다.
‘……심장을 노렸는데.’
이걸 피하다니.
여왕은 이 요새로 인해 분노한 상태.
거기에, 상대를 흥분시키기 위한 도발 역시 통했다.
뱀파이어들의 약점인 심장.
그곳을 향한 칼날의 궤도 역시 완벽했다.
하지만 칼날이 심장을 꿰뚫기 직전.
가슴 부위가 핏빛 안개로 변하더니.
내 칼날은 허공을 지나쳤다.
‘안개화.’
뱀파이어들은 동 레벨의 평범한 각성자들보다도 강했다.
그 이유는, 뱀파이어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들.
그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웠던 녀석이 바로, 안개화였다.
‘사실상 두 번째 목숨이나 다름 없는 개사기 능력.’
나 역시, 심장이 안개로 변하자마자 급하게 칼의 경로를 수정했으나.
결국 오른팔을 베어내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최고의 공격 기회를 날렸다.’
여기서 죽였어야 했다.
이만한 찬스를 또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결코, 편하게 죽지 못하게 해 주마.”
오른팔을 베어내기는 했지만.
숨통을 끊지 못한 이상.
상대의 분노를 더 크게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네 혈관을 도는 피를 모두 빨아들이고. 빈 공간을 내 피로 채울 것이다.”
“허어.”
“너는 의식을 잃은 채 나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나의 왕국을 만들기 위한 전쟁의 선봉에 서게 되겠지. 평생을 노예처럼 말이야.”
꼭두각시라.
다 좋은데.
“……선봉은 좀 그런데. 요리사는 후방 서포터 직업이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좋다. 어디 한번 놀아 보자꾸나!”
날카로운 손톱을 세운 채.
본격적으로 나를 향해 덤벼드는 그녀.
‘크읏!’
나는 그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뒤.
‘일단…… 챙긴다!’
방금 내가 베어 버린 물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뱀파이어 여왕의 오른팔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튄다!’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네 놈!? 어딜가느냐!”
“너 같으면 너 같은 놈이랑 싸워 주겠냐!?”
다행히.
요리로 인한 버프는 유지되고 있었다.
[항마의 빛]
마에 속하는 존재를 상대로 더욱 더 강한 힘을 주는 버프.
덕분에, 추격해오는 여왕을 피해 최대한 도망칠 수 있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10초는 버텼을까.’
하지만 지금은 버프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
거기에.
“큿, 여긴 또 어디란 말이냐!”
저 쪽의 홈그라운드라고 생각했던 처음과는 달리.
이 세계…….
아니.
‘적어도 이 요새는. 저 녀석에게도 미지의 공간이다.’
덕분에.
생각보다도 긴 시간을 그녀를 피해 도주할 수 있었다.
“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길지는 않았다.
“큭!”
기어코 나를 쫓아 와, 내 어깨를 붙잡는 여왕.
그녀는 그대로 팔을 잡아당기며 내 품에 안기는가 싶더니.
내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박아 넣었다.
“크윽!”
파악!
가까스로 쳐 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자.
끈적.
“…….”
끈적한 피가 묻어 나왔다.
“역겨운 성기사들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피의 맛은 최상이로구나.”
그런 말을 지껄이며, 입맛을 다시는 여왕.
그녀의 입가에는, 얼마 전까지 내 몸을 흐르던 피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나야 스탯만은 높은 편이니, 흡혈귀들 입장에서는 질 좋은 음식으로 보이겠지.’
아니.
맛뿐만이 아니라 건강에도 좋았던 건지.
내가 베어내, 지금도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그녀의 오른팔.
주르륵…….
그 팔이 곧바로 재생되는 모습.
‘무슨 에일리언도 아니고.’
어떻게든 싸워서 대미지를 입힌다고 해도.
한 번 피를 빨리는 순간 전부 회복한다.
그냥 싸움에서도 내가 밀릴 게 뻔한데.
이래서야.
공방이 성립 될 리가 없다.
“자, 이만 포기하려무나.”
정말로 승패가 가려졌다고 생각한 것인지.
조금 전까지의 분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녀.
‘기껏 생긴 변수였는데…… 이렇게 끝인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얌전히 고개를 숙인.
바로 그 순간.
[비상! 비상! 비상!]
“……어!?”
“네, 네놈,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요새 전체에.
정체불명의 기계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성주의 생명력 저하를 감지.]
[제1급 위기상황으로 판별.]
‘성주, 뭐라고?’
[요새의 자율적 상황 판단에 돌입합니다.]
뭐라 뭐라 떠들어 대는 기계음.
그 말의 뜻을 헤아릴 만한 시간은 없었다.
[자율적 판단 결과]
[요새 내부에 침입한 적으로 인한, 성주의 위기상황으로 결론.]
[자율방어시스템을 기동합니다.]
그와 동시에.
요새 안 쪽에 세워져 있던, 잿빛의 건물들.
그 건물들의 형태가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쿠우우우웅!!!
“크윽!!!”
그대로.
뱀파이어 여왕의 몸을 강타했다.
‘뭐야 저건!?’
건물이 혼자서 움직이는 모습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이였는데.
냅다 적을 공격해 버린다고?
[식재료 감별(강화)]
[자율방어시스템]
[Lv. Max]
여왕조차 정체를 모르는 요새.
허공에 울려 퍼지는 기계음.
스스로 움직여, 여왕을 공격하는 건물들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아니.
‘이해하려 해선 안된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굳이 이해하려 하다니.
터무니없는 시간 낭비, 심력 낭비다.
지금의 내게는 그럴 만한 여유따위 없다.
잘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
‘이 요새가. 나를 지키려고 하고 있다는 것.’
[주의!]
[점검 결과, 온전한 소환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관련 인원들은 시급히 올바른 소환을 시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자율방어시스템의 위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자율방어시스템의 지속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요새의 전력 발휘가 힘든 상황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관련 인원들은 시급히 수비 인원들을 파견.]
[성주의 보호에 가담할 것을 강력히 권고드립니다.]
“쿠, 쿨럭. 네 놈. 어딜가느……”
콰앙!
“꺄악!”
여왕이 내게 다가오려할때마다.
주변의 건물들이 그 몸을 강타한다.
‘시간은 번 셈인가.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기엔 조금 이르다.
[자율방어시스템의 위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자율방어시스템의 지속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저 건물들.
[자율방어시스템]은, 어째서인지 상당히 약화된 상태라는 것 같다.
“이, 이런 힘을 가진 요새라니. 커헉!”
콰아앙!
“위대하신 시조의 성채도 이 정도는 아니였…… 꺄앗!”
쿠웅!
지금은 여왕을 신나게 후드려 패고 있다만.
어디까지나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을 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 건물들이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내 직업은 요리사.
내가 찾을 만한 답은.
뭐.
뻔한 거 아니겠냐.
“왜 날 도와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도와주는 거. 하나만 더 부탁하자.”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라면.
이 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기대감에, 입을 열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명령을 접수하였습니다.]
[네비게이터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그러자.
머리 속에.
내가 가야할 길이 떠올랐다.
그 길을 따라 전력을 다해 내달리자.
눈 앞에 보이는 하나의 거대한 건물.
[식당]
[Lv.Max]
콰앙!
나는 문을 박차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 손에는.
[뱀파이어 준남작의 앞다리살]
도무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재료가 하나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