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권속 (2)
상념.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했었지.
“지난번에는 제대로 못 들었다만. 설명해 봐라. 그 상념이란 건 대체 뭐지?”
“본녀도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존댓말.”
“……저도 그 정체는 잘 모르겠더군요. 이 세상에 내려온 뒤로 저를 계속해서 속박해 오던 의지…… 라고 할까요.”
속박이라니.
이만한 괴물을 속박하는 의지가 있었다고?
“정확히는 한 가지 명령이었죠.”
“명령이라니.”
“[인간종의 무력 시설을 침공하고. 점거하라.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안 된다.]”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건…….”
인간종의 무력 시설.
즉.
“군부대?”
군부대에는 어째서인지 평범한 놈들보다도 강력한 괴물들이 나타났다.
강력한 괴물들이 죄다 전투광도 아니고.
우연히 군부대에만 나타날 리는 없으니.
어떤 존재의 개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류를 적대하고자 하는…… 뚜렷한 악의.’
지금까지는 추측에 불과했던 상상.
“상념이 말하는 무력 시설이란. 그 동굴의 벙커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 벙커.
정부의 벙커로써, 분명 군부대와 관련된 시설이었다던가.
“그걸 무시하면 어떻게 되지?”
“무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그곳을 떠나려고 하는 순간. 머릿속에 저 명령이 파도처럼 몰려들거든요.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금 벙커를 지키고 있는 처지였죠.”
그 상상이 옳았다는 것을.
그녀가 확인해 주었다.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도, 계속해서 우리 부대를 공격하던 강철 리자드들.
큰 부상을 입고도 우리의 공격에 도망치지 않았던 아라크론의 거미 여왕.
남을 조종하는 강력한 이능을 가지고도 전차대대에만 머무르고 있던 눈알 괴물.
거기에.
눈앞의 이 뱀파이어 여왕까지.
이 녀석들이 멍청해서 군부대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어떤 의지가 개입한 거다.
“힘을 기르고자 한 이유 중에는 그 상념도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계속해서 힘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상념도 밀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죠.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상쾌함마저 어려 있었다.
“상관없어졌다는 건. 나에게 종속된 순간 그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건가?”
“네. 그 상념 덕에 편한 날이 없었는데.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머리가 깨끗한 기분은.”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바친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오히려 기분 좋다는 듯 싱긋 웃는 그녀.
“남의 권속이 된다는 것도, 사실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후후…….”
내 권속이 된 것은 무척이나 꺼리던 그녀였음에도.
머릿속을 지배하던 상념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 권속이 된 것을 기뻐할 정도라니.
“못생긴 괴물이었으면 모르겠지만. 주인님 정도면 그럭저럭 제 취향인 얼굴이기도 하니.”
“…….”
……뭐.
자기가 좋다면 그걸로 된 거지.
“저는 이제 당신의 권속입니다.”
그녀가 다시금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치욕에 몸을 떨던 이전과 달리, 상쾌하기까지 한 몸짓이었다.
“음.”
“뭐든지 명령해 주시길. 나의 주인이시여.”
뭐가 어찌 됐든.
이걸로 내 목적은 달성한 거나 다름없다.
“그럼 바로. 첫 번째 명령을 내리도록 하지.”
나는 품 안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이 근처의 지형을 적은 지도다. 그곳에 표시된 곳으로 이동하면 어떤 인간들이 자리 잡고 있을 거다. 각성자들의 비율도 꽤 높을 거야.”
“……인간들이라. 이걸 저에게 건네셨다는 의미는,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지?”
“그들을 네 권속으로 만들어라.”
내 명령을 들은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인간을 혈족으로 만드는 행위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싫어하는 거 맞아.”
“그렇지만 방금 내린 명령은.”
“정확히 말하면, ‘죄 없는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걸 싫어하지.”
정령안을 통해 지상의 정보에 해박했던 정수아.
그녀는 이 일대에서 위협이 될 만한 이들의 존재를 미리 파악해 두었다.
이건 그중 하나.
“그 위치에 있는 녀석들은 약탈자들이다.”
“약탈자라.”
“그중에서도. 특히나 죄질이 나쁜 녀석들이야.”
다른 인간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것은 물론.
남들을 노예로 삼기도 하고.
문명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표출할 수 없었던 욕망의 대상으로 삼기까지 하는 녀석들.
즉.
“너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쓰레기들이지.”
“……저는 이제 주인님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만. 그렇군요. 저와 비슷한 쓰레기들. 이해했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이 일대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가급적 빠르게 정리해야 하는 놈들이다.
녀석들을 토벌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하루가 늦어질수록.
다른 평범한 생존자들이 피해를 입을 테니까.
“그렇다고 죽이는 건 또 아깝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력이 소중한 시대니까.”
지금까지는 내 요리를 통해 일일이 굴복시켰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효율도 떨어진다.
능력이 뛰어난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널려 있는 약탈자 놈들에게 일일이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오래 걸리는 방법.
그렇게 시간을 끌리는 사이, 다른 평범한 생존자들이 입을 피해는 늘어만 가겠지.
그러니.
솔직히,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지만.
“저라면. 그 쓰레기들을 손쉽게 재활용할 수 있겠군요.”
“그런 거다.”
동맹을 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권속을 불릴 수 있는 아리엘라를 굴복시킨 이상.
쓰레기 같은 약탈자들을 재활용.
어지간한 길드 수준의 세력을 휘하에 둘 수 있게 되겠지.
‘문제가 있다면. 내 기분뿐.’
괴물에게 인간을 사냥하라고 하는 일이다.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면 죽였지.
괴물이 인간을 죽이는 꼴 만큼은, 보고 싶지 않던 나지만.
‘언제까지고 하고 싶은 대로만 살 수는 없다는 거지.’
이 녀석의 힘은.
사용한다면 엄청난 전력이 된다.
이런 세상이니만큼.
머지않아, 부대원들에게는 시킬 수 없는 더러운 일들도 생길 것이다.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뱀파이어들.
이 녀석들이라면, 그런 일을 맡기기에도 제격이겠지.
“최대한 빠르게 권속을 늘려라.”
그렇기에.
나는 구역질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으면서, 녀석에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다만?”
“지금의 제 힘으로는 많은 권속을 만드는 건 불가능해요. 주인님에게 빼앗긴 피가 너무 많다보니.”
나름대로 이번 요리로 돌려주기는 했다만.
내 능력치도 많이 오른 만큼, 녀석의 능력은 많이 떨어진 것.
“지금 상태라면. 많아 봐야 100명 정도일까요.”
“뭐, 그 정도면 적당하군.”
어차피 제한이 없었다고 해도 그 정도 숫자만 유지할 생각이었다.
피를 먹는 뱀파이어들.
녀석들을 유지하기 위해선 피가 필요하다.
몬스터들의 피로 유지 가능한 병력은, 많아야 100인 정도일 테니까.
“그 후로는 약탈자들을 처리하더라도 권속들의 성장에 사용할 것. 추가적인 약탈자들의 위치를 알게 되면 그때그때 알려 주지.”
“알겠습니다.”
“근방의 악질들은 모두 네가 청소해 줘야겠다.”
어차피 약탈자 제거는 언젠가 해야 할 일.
그녀가 청소와 재활용을 통해 주변의 치안을 안정시키고 세력을 키우는 동안.
우리 부대 역시, 벙커와 탄약대대의 투배럭을 통해 생존자들을 영입.
길드의 규모를 키워 나갈 것이다.
“그러면, 말씀하신 인원을 채운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될지.”
“그다음에는…….”
잠깐 고민을 거친 뒤 말했다.
“다음 단계로 가야겠지.”
* * *
그리고.
그로부터 2주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부대도 놀고 있지는 않았고.
벙커와 탄약대대 사이의 길을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청소.
괴물들을 사냥함으로써 힘을 기르고, 부대 주변의 안전을 확보했다.
탄약대대의 대대장실에 앉아 있던 나를 찾아온 손님.
“끼잉.”
“오. 까망이 왔냐.”
지난번 전투에서는 이 녀석이 도움이 됐다
우리 화력으로도 뚫기 어려운 벙커에 구멍을 내준 것은 물론.
전성기보다 약해진 상태로도 뱀파이어 몇 마리를 동시에 상대해 줬지.
그 공을 인정받은 결과.
자재 창고를 집으로 삼고, 그 바깥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끼이잉!”
영역 동물이라서 그런가?
탄약대대를 떠나진 않고, 안쪽에서 잘 돌아다니더라고.
다른 부대원들과도 꽤 친해졌지만.
아무래도 심심할 때면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오곤 한다.
발에 머리를 비벼 대는 녀석.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개냥이다.
“……야. 까망아.”
“낑?”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도 막. 머릿속에 이상한 명령 같은 게 박혀 있고 그러냐?”
“???”
“아니, 됐다. 내가 뭘 묻는 거람.”
그동안 의심만 하고 있던 것이 얼마 전에 확신으로 바뀐 뒤.
나는 꽤 심란한 상태였다.
‘인류를 적대하는 악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의지가 괴물들을 조종해, 인류의 무력을 먼저 제거했다.
멀쩡하던 세상에 갑자기 괴물들이 나타나 문명을 파괴해 버렸다.
그 ‘멸망의 날’ 역시.
저 악의와 무관하지는 않겠지.
내 목표는 나와 부대원들의 생존이다.
고향에 있을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다던가, 여러 가지 목표도 있긴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생존.
하지만 인류를 적대하는 악의의 존재가 확실하게 된 지금.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악의를 상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 강력한 괴물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을 박아 놓은 존재.
신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그 악의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
“갈 길이 멀구만…….”
한숨만 나온다.
악의가 존재한다는 걸 눈치챘다고 해도.
그렇게 초월적인 존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솔직히 감도 안 잡힌단 말이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쎄다.
“시스템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는 것 정도인가.”
정체불명의 시스템.
하지만 우리를 죽이려 드는 괴물들과 달리, 일단 시스템은 우리에게 살아남기 위한 힘을 주었다.
던전을 발견했을 때는 던전의 존재에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그 안내를 따라가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까망이 녀석을 쓰다듬고 있자니.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한 병사가 대대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음? 무슨 일이야?”
“은인께 질문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정수아.
정령을 통해, 우리 부대의 위기를 파악한다는 중요한 업무를 맡은 병사였다.
“최근에 부대의 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 조금 느슨한 편제긴 하지. 너는 마법사조에 들어가 있는 거로 돼 있던가?”
나는 조금 머리를 굴린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능력을 생각하면 마법사조는 이상하긴 하군. 정찰조 같은 걸 따로 만들어서-”
“아뇨. 그것도 그거지만. 묻고 싶은 건 그 부분이 아니라.”
“음?”
“군단장님의 직속 부대가 없더군요.”
전사조장, 전광일.
마법사조장, 이민재.
사수소장, 서수혁.
생산직은 이상아, 이공우, 그리고 박씨 할아버지 3인.
그들 모두가 내 휘하에 있다고는 하나.
내 직속 부대가 없기는 하다.
나야 일단 군단장이니 관여는 하지만.
조장들의 권위는 존중해 주려고 하는 편이고.
“군단장님의 위치나 중요성을 고려하면. 직속 부대…… 친위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흠.”
“지원자를 모집한다면 많은 이들이 모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드는 이들이 있었다.
“저 역시, 그중 한 명이고요.”
나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정수아.
나를 은인이니 뭐니 하는 명칭으로 부르는 여자니까.
아무래도 내 친위대에 지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슬쩍 고개를 뻗어 뒤를 보자.
문밖에 서 있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병사들도, 너하고 같은 의견인가.”
“네.”
정작.
그중에 423대대 시절부터 함께한 부대원들은 적었다.
‘친위대 같은 얘기가 나오면 나랑 사적으로 친한 사람들이 먼저 지원하지 않나? 조금 의외네.’
밖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본 결과.
나와 말 한마디 나눠 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지상에서 합류한 생존자들.
특징이 하나 있다면…….
약탈자나 뱀파이어들.
그들에게 붙잡혀 있다가 구출된 이들이 많은 것 같은데.
‘……우연인가?’
그들이 보내는 선망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였다.
친위대라.
나쁘지 않은 얘기긴 하다만.
“각하다.”
“어째서입니까? 저희는 모두 군단장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언제나 내게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차리던 정수아였으나.
이 결정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반발하는 모습.
그래도 말이지.
“친위대 역할은 이미 있거든.”
“……예?”
나는 내 발아래의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만 알아 둬.”
평범하기 그지없는 검은 그림자.
그 안에서.
내게 고개를 숙이는 여자의 형체가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들로 충분하다.’
당장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 이들에 대한 원한이나 적의가 수그러들 때쯤.
정식으로 길드에 가입시킬 예정인 이들.
내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100인의 병력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당장은 필요 없다.”
“하지만…….”
“네 능력은 정보전 쪽에 맞아. 산맥을 지키고 있는 박태준 병장이 복귀한 뒤에는 고려해 볼 만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정찰조를 따로 만드는 건은 진행하도록 하겠지만. 친위대는 참아라.”
“……알겠습니다.”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이들.
그림자 속의 병력도 약간은 하자가 있다.
언젠가 증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 되겠지.
“아, 맞다. 이왕 온 김에 하나만 말해 두자면.”
“네? 무슨 일이신지.”
“조만간 바빠질 것 같으니까. 미리 준비해 둬.”
“바빠질 거라는 말씀은?”
아리엘라에게 명령한 병력이 모였다.
그러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거든.”
“다음 단계……?”
멸망해버린 세상.
인류의 멸망을 바라는 것 같은, 정체 모를 악의.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것이 많지만.
그걸 해결할 만한 뚜렷한 방법도 딱히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스템의 안배를 따라가는 것뿐.
다음 단계라고 할 만한 것도.
당연히 하나뿐이다.
“점령.”
[점령전이 진행 중입니다!]
[강철 군단]
[점령지 - 산맥(3%)]
“생각해 보면. 참 개같이도 오래 걸렸어.”
이제.
이 일대를 지배하에 둘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