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벽이라니?
던전을 공략함으로써 군단의 영향하에 두게 된 지하철역.
그 철도를 이용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개조 차량과 전차들.
그 두 가지가 확보된 시점에서.
다른 지역으로 진출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 끝까지 닿은 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이라더군요.”
“벽이라니.”
“저도 보고를 받았을 뿐이라,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지만요. 이 선을 중심으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자세한 건 이 아이한테 들으시죠.”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또 다른 뱀파이어.
상태가 좀 이상했다.
여기저기 다치고 초췌해진 것은 물론, 한쪽 팔은 아예 없어진 상태.
“충성! 주인님의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 와중에 군기는 제대로 들은 듯.
없어진 한쪽 팔로 경례를 하려 했으나 손이 안 움직여 당황하는 녀석.
“자세하게 보고해라.”
“예!”
자신의 정찰 임무 초반부터 설명하는 녀석
북쪽으로 가려고 한 사람은 자기 포함 셋이었는데 그중에 둘이 죽어 나간 험난한 여정이었다는 듯하다.
꽤 엄청난 모험이었던 거 같긴 한데 솔직히 관심 없고,
중요한 건 벽에 도달한 후였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묘하게 더워지더군요.”
“더워졌다고?”
“예. 아시다시피 원래라면 대관령 너머 북쪽은 시원하면 시원했지, 더워질 지역은 아니잖습니까. 저도 그래서 당황했습니다만, 어느 정도 나아가자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아까 말한 그 검은 벽이라는 거겠지.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만. 어느 순간부터 하늘까지 닿은 벽이 보이더군요.”
정말 그렇게 높은 벽이라면 여기서도 보일 만도 한데.
아무래도 접근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콘크리트 같은 벽은 아니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림자 같은 느낌의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벽이었죠. 거기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열기라.”
“열등…… 아니아니. 일반적인 인간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 같은 열기였습죠.”
“그래서. 그냥 돌아온 거냐?”
“아뇨. 주인님의 명령은 외부로 진출해 그곳 사정을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막힌 벽이라면 모를까, 일렁거리는 모습을 보니 통과할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하지만…….”
슬쩍 손을 들어 올리는 녀석.
벽에 손을 집어넣어 본 결과가 바로 이겁니다.
뱀파이어들은 약점인 심장을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중상을 입어도 흡혈 몇 번이면 원상 복구된다.
몬스터를 사냥해서도 치료는 가능할 텐데 왜 잘린 채로 뒀나 했는데
보여 주기 위함이었던 모양.
자세히 보니 잘린 게 아니라, 그 너머로 불타서 없어져 버린 것.
“벽의 주변의 열기는 벽 자체가 뿜는 열기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습니다.”
“…….”
“그 후로는 장벽이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를 최대한 파악하고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 돌아온 동지들과 대조해서 그려낸 게 저 선입니다.”
즉.
“그 정체 모를 검은 벽이란 것이 강원도와 외부를 완전히 단절해 놓은 상태다?”
“저희 예상으론 그렇습니다.”
“……누가? 왜?”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누군지는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 남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녀석.
“세상을 이 꼴로 만든 그놈이겠죠.”
“…….”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던 참이었는데.
이런 정보라니.
‘강원도를 둘러싼 경계…….’
그러고 보면.
생각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점령전 현황표.’
[소속 지역 - ROK. 17]
[현재 점령 중인 지역]
[산맥 - 3%]
[소도시 (3) - 3%]
점령전 현황표를 볼 때나.
업적을 달성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올 때.
드물게 보였던 것이 바로 저것.
[ROK. 17]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을 뜻하는 단어.
그렇다면 17은.
‘우리나라에…… 특별시가 한 개. 광역시가 여섯 개지. 특별자치시가 세종이고. 특별자치도가 제주도…… 거기에 도가 여덟 개니까.’
전부 더하니 17.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 직감이 말했다.
이 추측은 아마도,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고.
그리고 저게 아마도 강원도를 뜻하는 숫자일 것이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강원도에 갇힌 채 이 점령전을 수행해야 할 운명이라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네?”
우리가 영원히 여기 갇혀 있어야 할 운명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저 구분 자체가 필요 없겠지.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차단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럼에도.
시스템은 [대분류 ROK]니 [소분류 ROK. 17]이니 하는 구분으로 다른 지역의 존재를 내비치고 있었다.
이유는 아마도 하나.
‘지금은 작은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이 ‘게임’이, 언젠가 대분류로 넘어가게 될 거라는 뜻이겠지.’
당장은 강원도라는 대한민국의 도 하나를 두고 아웅다웅하는 양상이지만.
언젠가 더 넓은 영역…….
대한민국 전체를 두고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어쩌면 그다음 단계까지도.’
뭐.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마 먼 미래의 일.
우리가 할 일은 하나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언젠가 저 장벽을 치우고 이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힘을 기르는 것.
“기껏 들떴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구먼.”
금방이라도 집으로 가,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떴는데.
뭐.
그렇게 쉽게 풀리는 일은 없다는 거겠지.
오히려 최근 너무 승승장구하고 있던 거지.
결코 쉬운 세상이 아니란 거다.
‘그래도. 희망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저 장벽이 언제까지 존재할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직접 쳐부수고 나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게 언제쯤 가능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히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어디까지나 미뤄진 것일 뿐.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 수밖에.
* * *
“어……. 정말입니까?”
“다른 지역으로의 진출은 막힌 셈인 건가.”
나는 그 정보를 조장급 인물들에게만 알렸다.
다른 이들도 충격이 큰 듯.
“좀 놀랍긴 하네요. 저희는 뭐 큰 불만은 없지만요.”
그나마 다행인 건 423대대 병사들을 제외하면 현지인 출신이 대부분이란 것.
개중에도 다른 지역에 가족이 있는 이들이 있기야 하겠지만, 아예 타지 출신인 병사들보다는 불만이 덜하겠지.
“이 얘기. 병사들한테는 하지 않는 거로 하지.”
“사기 때문에?”
“네가 생각한 추측대로 저 장벽이 언젠가 열린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니까.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는 사실을 덮을 정도는 못 되겠지.”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얘기긴 하다만.
당장 할 이유는 또 없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우리 계획이 많이 틀어지겠군요.”
서수혁 상병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본래라면 이 지하철도를 따라 경기도권으로 천천히 진출해 나갈 계획이었습니다만…….”
“뭐. 그 계획은 캔슬이라고 해야겠네.”
“그렇다고 타지로 진출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인제군에만 머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부대와 벙커 근처에는 작은 마을들이 생겨났다.
“지금 흐름대로 생존자들을 수용하고, 몬스터를 사냥하며 세력을 늘린다면. 꽤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는 민재 형.
“아마 네 생각은 반대겠지.”
“잘 아네.”
안정적인 성장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문제는.
애초에 인제군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 도시가 아니었다는 것.
“그나마 군부대가 많아서 상권이 유지되던 도시야. 그 군인들마저 전멸한 지금, 찾아오는 생존자들을 수용하며 성장하는 것도 금방 한계가 오겠지.”
내가 몬스터들을 지배하는 쪽으로 생각한 것도 이런 사정이 컸다.
인제군에 널려 있는 군부대를 하나씩 점거해 나간다면 무기는 많이 확보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걸 쓸 인력에 한계가 있단 말이지.
결국.
이곳의 전력을 유지한 채, 다른 도시로 진출해 세력을 늘려 나가야 한다.
탄약대대와 벙커가 투배럭이라면.
이제는 멀티를 늘려야 한다는 것.
“일단 강원도 내에서 고려 중인 지역은 세 곳 정도군.”
민재 형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춘천시. 속초시. 그리고 양구군.”
“다른 두 곳은 알겠는데. 양구요? 거긴 여기랑 비교해도 큰 곳은 아니지 않나요?”
이상아의 의문에 대답한 것은 김 중위였다.
“여기에 우리 군단의 본부가 있습니다.”
“네? 우리 길드 본부요?”
“아뇨. 각성자 세력…… 강철 군단으로서의 본부가 아니라, 423대대의 상위 부대인 군단 본부 말입니다.”
“……아!”
대한민국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소속 제12 군단 예하 직할부대.
423 방공대대 입장의 군단 본부.
김 중위가 상위 부대의 지시를 받기 위해 운전병들을 내보낼 때, 운전병들이 향할 예정이었던 바로 그 부대다.
사실 우리 부대만 그런 게 아니고.
12군단은 강원도 중북부 지역의 방어를 맡고 있다.
이 탄약대대만 해도 12군단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12군수 지원단 소속.
얼마 전에 탈환한 전차대대는 12군단 휘하의 기갑여단 소속이다.
인근에 널려 있는 군부대들은 죄다 12군단 소속이라 보면 얼추 맞을 정도이다.
‘산에서 내려올 때 영서지방을 선택한 것도…… 군단 본부가 있다는 게 꽤 중요하게 작용했지.’
설마하니 군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김 중위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대에서 섣불리 운전병들을 보낸 건 내 실수가 맞다. 하지만. 그래도 상위 부대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는 해야 한다는 게 내 의견이야.”
“음. 그간의 경험으로 보면, 군단 본부라고 멀쩡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군부대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이상,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지.”
김 중위의 말에 우려를 표하는 전광일 상병.
확실히 김 중위의 말도 틀리진 않다만…….
강한 부대일수록 강한 괴물이 자리 잡는 것 같다던가.
‘무려 군단 본부.’
얼마나 강한 녀석이 자리 잡고 있을지 상상도 잘 안 가네.
“정령안으로 확인하는 것도 힘들겠지?”
“네……. 거기까지는 거리도 거리지만, 애초에 군부대들 대부분이 방울이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어서요. 은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정말 죄송할 따름…….”
“아니 뭐. 죄송할 건 없고. 어쩔 수 없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를 차리는 수아.
뭐 여차하면 뱀파이어들을 소모품 삼아 정찰 보내면 되는 일이니까.
“굳이 군단 본부를 확인하려 한다면, 냅다 병사를 끌고 가는 식으론 힘들 겁니다.”
“이런 건 어때. 근처의 군부대를 천천히 흡수하면서 북진하다가 길드원들이 충분히 늘었을 때…….”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는 너무 느리니까 다른 곳으로 진출할 방법을 찾던 거 아닙니-.”
어쩌다 보니 군단 본부로 진출하냐 마냐로 열띤 토론이 오가게 돼 버렸네.
나도 나름 생각하는 게 있다 보니 대화에 끼어들려고 하던 찰나.
“저기, 조장님들.”
“군단 본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빠르게 선점한다고 나쁠 건- 어?”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병사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뒤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제, 제발. 도와주십쇼.”
“예? 도와주고 자시고.”
“누구신데 여기까지…….”
“제발…….”
털썩.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도 없이 도와 달라고 말만 하더니.
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남자.
쓰러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 중요한 것이었다.
“던전…… 던전이. 도시를 집어삼켜 버렸어…….”
던전.
……던전이라고?
본의 아니게.
부대의 다음 진로가 결정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