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침식 이계 (3)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허억. 허억. 끝났나……?”
던전에 진입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펼쳐진 전투는 군단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중상자는커녕, 경미한 부상자도 나오지 않은 완승.
하지만.
“저기! 더 몰려옵니다!”
“미친.”
전투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몰려오는 괴물들.
병력의 질은 이쪽이 압도적이지만.
끝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모조리 제거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신 병장님. 지금은 괜찮습니다만, 부상자가 생긴다면 이 환경에서 치료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의무병과 군종병이 다가와서 말했다.
애초에 이번 던전 공략은 장기전이 될 거라고 각오한 상태.
한 번의 싸움으로 던전을 공략할 욕심 같은 건 없었다.
“전투하면서 계속 이동한다! 저기 보이는 고층 건물로!”
물속에서부터 접근해 온 괴물들.
아가미가 달린 모습도 그렇고.
물이 없는 곳에서는 능력이 떨어질 확률이 높겠지.
“문이 박살 나 있습니다! 유리 같은 거 조심해서 들어오십쇼!”
“어차피 각성자는 그런 거엔 상처도 안 나! 들어가, 들어가!”
어떻게든 건물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건물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그대로 맞으며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어떻게든 계단을 찾아내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오지는…….”
“않는 거 같네.”
도시를 채운 물도 2층 높이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 괴물들이 물 밖으로도 따라 들어올까 경계했으나,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다들 휴식!”
“후우!”
일단은 안심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밖에서 진입할 때는 분명 낮이었지만, 건물 안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요리의 효과가 아니었다면 다들 어둠 속에서 고생 좀 해야 했겠지.
“아~ 전투차량들 밑에 두고 온 게 좀 맘에 걸리는데요.”
“어차피 방수 처리는 다 돼 있잖냐. 나중에 이동할 때 챙기면 되는 거야.”
전투에서는 움직이는 바리케이드처럼 이용할 수 있는 차량들.
하지만 차량들에도 요리를 먹이진 못하다 보니.
차량들까지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지는 못했다.
자랑하는 톱날이나 뿔 같은 무기들도 수중에서는 속도가 줄어들어 활약하기도 힘들고.
아쉽긴 하지만.
굳이 챙기려고 노력해야 할 정도는 아니란 거지.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어디 가십니까?”
“위쪽으로.”
나는 몸을 일으켜 건물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능력치 물약에 뱀파이어를 상대로 한 흡혈까지.
스탯이 엄청나게 올라 버린 덕에, 방금의 전투를 겪고도 피로도가 심하진 않았다.
“어차피 고층 건물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본다는 계획이었으니까. 먼저 올라가 있으마.”
“저희는 힘들어서 죽겠는데…… 대단하십니다.”
“쉬고 있어.”
전기 따위는 진작에 끊긴 건물.
비상계단을 통해 일일이 한 층, 한 층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건물을 몇 층 정도 올라갔을까.
위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
물에서 난리 치던 괴물들이 쫓아 오지 않는다고 너무 방심했던 것일까.
‘물속의 괴물들이 땅에서 활동하지 못한다고, 건물 안에 다른 괴물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기도 늦은 일.
스릉…….
나는 칼을 쥐고 전투를 준비했다.
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존재들.
그 기척이 계단 아래에서 정체를 드러낸 순간.
‘일단 한 놈. 빠르게 처리한다!’
그 형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거, 거기 있는 건 누구요!”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멈칫.
당황한 나는 휘두르려던 칼을 멈췄다.
자칫하면 목을 벨 뻔한 사시미칼이 아슬아슬하게 목 앞에서 정지했다.
‘미친. 죽일 뻔했네.’
내 쪽을 향해 소리친 남자는 자신이 죽을 뻔하고.
내가 죽일 뻔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기랄. 어둠 속에 숨어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이 건물은 우리 영역이다!”
“어느 건물에서 온 녀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전 조율도 없이 1층부터 침입해 와?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뭐라 뭐라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사내들.
하지만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이 건물이 저들 영역이라고……? 다른 건물에서 온 녀석들이란 건 또 뭐야.’
섣불리 반응할 일이 아니라 생각해 대답을 아끼자.
저쪽도 나름대로 애가 탄 것일까.
“왜 대답이 없나! 제기랄. 기름 아깝게…….”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남자.
자세히 보니 나무 막대와 옷가지 같은 것으로 만든 횃불로 보였다.
그들은 거기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화륵.
어둠 속에서 횃불이 켜지고.
그 붉은 빛이 나를 비추었다.
“어느 건물에서 온 놈들인지, 얼굴이나 한번…….”
“……엉?”
횃불로 내 모습을 확인하자.
오히려 사내들의 얼굴이 멍하게 바뀌었다.
“……?”
“못 보던 사람 같은데.”
“아니. 그보다 저 옷 좀 봐.”
“군복……이잖아?”
경악하는 사내들.
나는 나대로 어이가 없었다.
던전 안에 저렇게 생존자들이 많다니.
여기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 * *
“앉으시오.”
건물 안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인간들.
우리 부대원들은 그들의 안내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며 틈틈이 각 층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본래는 사무 용도로 쓰이던 것 같은 고층 건물.
하지만 지금은 곳곳에서 생활 흔적이 보였다.
‘여기서 생활을 시작한 지 꽤 된 건가.’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의 숫자도 꽤 많아 보였다는 것이다.
솔직히 신기할 따름이었다.
‘던전 안에 이렇게 생존자가 많다니.’
지난번에 공략한 던전은 달랐다.
지하철의 공사를 담당하던 인부들은 모조리 벌레들의 먹이가 되었었지.
이 던전은 다르단 건가.
“박태완이라고 하오.”
악수를 청해 오는 남자.
이럴 때 주로 나서는 것은 김 중위긴 했지만.
지금 상황은 외부 세력과의 만남이라기보단, 던전 공략이 주된 목적이다.
“신영준 병장이라고 합니다.”
일단은 내가 나서기로 했다.
군인이라는 신분을 밝히자.
“……진짠가 보군.”
이들이 놀라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들은 보고도 그렇고.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역시 군복이었어.”
“대장님. 1층에 물에 잠겨 있는 차량 중에는 장갑차 같은 것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렇다는 건 역시.”
자기들끼리 흥분하며 뭐라 뭐라 떠들기 시작하는 이들.
태완이라는 남자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드디어 군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로군.”
……움직였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자, 흥분한 이들이 더 떠드는 게 들려왔다.
“거봐! 제기랄. 바깥은 멀쩡할 거라고 했지!”
“그럼 우리도 나갈 수 있는 건가?”
“군인들이 들어 왔다는 건, 나갈 방법도 있다는 거 아니겠어?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끝이란 거다.”
여기까지는 뭐.
대충 이해가 가는데.
“아니. 바깥으로 나간다고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닐 수도…….”
“그래. 각성에 대한 걸 들키면, 정부에 끌려가서 인체실험 대상이 될 수도 있어.”
“그럼 저항해야지. 우리도 그럴 만한 힘은 있잖아.”
“말이 됩니까? 암만 우리가 강해졌다고 해도 체계를 이룬 현대군은 못 이겨요.”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맙시다. 인체실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현대에 나타난 초능력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거예요. 고난 끝에 각성을 거친, TV에 나오는 히어로 같은 존재가 되는 거지.”
……여기서부터가.
영 적응이 안 됐다.
‘이 사람들. 군대가 전멸한 건 물론이고, 바깥 사회가 무너졌단 것도 모르는 건가.’
바깥의 생존자들과는 아예 다른 느낌.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태완이 물었다.
“하나만 묻겠소. 당신들. 원래 춘천에 숨어 있던 군인들이라던가 하는 건 아닐 테고. 벽 바깥에서 온 게 맞나?”
“……맞습니다.”
“오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태완.
“영락없이 바깥세상은 멸망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멸망이라뇨?”
“그야 어쩔 수 없지 않소. 저 벽 바깥으로는 나갈 수도 없고,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사정이 있어서 저 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난 우리 외의 인류는 전멸해 버린 거라고 생각했소. 저 물에 모조리 수몰돼 버린 거라고.”
“……….”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였군. 하긴 수압이 저러니, 바깥에서 진입하는 방법을 깨닫는 데도 시간이 걸렸나 보지?”
“그 전에 잠시만.”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오해를 고쳐 주기 전에 궁금한 것을 먼저 묻기로 했다.
“저 바깥에 벽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하셨죠.”
“맞소. 어느 날 갑자기 바닥에서 천천히 물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저런 폭포 같은 벽이 생겨서 탈출을 막더군.”
“그 날짜가 언젠지 아십니까?”
“그야 알고는 있소만.”
남자가 말한 날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날이었다.
내 전역일 며칠 전.
즉.
‘이 던전. 멸망의 날 당일에 생겨났다는 건가?’
우리 부대에 리자드들이 쳐들어온 날.
춘천은 이 던전에 갇혀 버렸다는 것.
바깥의 생존자들과의 정보 격차도 이해가 갔다.
“정말 당황스러웠지. 곧 군대가 구해 줄 거라던 사람들도 몇 달이 지나니 조용해졌어. 정말 군대가 도와줄 거라 믿는 이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둘로 갈렸었나 보다.
자신들을 제외하고 바깥세상은 모조리 수몰되어 멸망했다.
아니면 자신들만 이런 것이고, 바깥은 멀쩡하니 곧 군대가 들어와서 구해 줄 것이다.
답은 둘 다 아니었지만.
“추가 병력도 곧 들어오는 거겠지? 이런 환경이지만, 장갑차 같은 건 물속에서도 잘 활동할 수 있다고 들었으니…….”
“병력은 우리가 전부입니다.”
“……어?”
신나서 떠들던 이들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탄약대대 기지에 대기 중인 전차를 끌고 오는 방안도 있긴 하겠지만, 큰 병력은 아니니까.
“그, 그런가. 잘은 모르겠지만. 군대의 진입이 이렇게 늦은 걸 보면, 바깥에서도 저 벽을 뚫는 게 쉬운 일은 아닌가 보군.”
그냥 걸어 들어왔다.
우리 이전에 들어온 이들이 없었던 건 딱 봐도 위험해 보여서였겠지.
“그, 그래도 괜찮소! 믿기 힘들겠지만, 이 안에서 우리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했거든. 나중에 우리가 얻은 힘에 대해 보여 주겠소. 아마 깜짝 놀랄 거요.”
그거 아마 우리도 아는 힘일걸.
대충 사정은 알 것 같았다.
‘멸망을 겪은 것 같지만, 장르가 다른 거다.’
인류의 멸망을 다룬 영화에도 종류가 있다.
좀비물도 있는가 하면.
재난 영화…… 홍수로 인한 멸망을 다룬 영화도 있다는 거지.
멸망의 날은 동시에 찾아왔지만.
이들은 이 던전의 특별한 환경 아래, 바깥과는 다른 경험을 한 거다.
“일단 우리가 바깥에서 와서, 여기 사정이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릅니다.”
“그건 그렇겠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알겠소.”
태완의 입에서 나온 설명은 대충 예상했던 대로였다.
멸망의 날이 시작되고.
갑작스레 바닥에 물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외부와의 모든 통신이 두절.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돌도 베어 버리는 엄청난 수압의 폭포로 가로막혔다.
태양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고.
그걸 넘어서 구름조차 사라졌다.
“물이 허벅지쯤까지 차오르니. 괴물들까지 나타나더군.”
“처음에는 악어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괴물과 물을 피해 2층 이상의 건물로 도망쳤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물이 차오르는 속도가 빠르진 않았소. 저지대에 있던 물자들을 높이 옮길 만한 시간은 되더군. 괴물들도 물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고. 덕분에 의외로 사망자는 적었지.”
어?
사망자가 적었다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괴물들을 요리로 굴복시켜 가면서 부하로 삼으려고 한 이유가 뭐였는가.
애초에 평범한 인간들이 대부분 죽어, 남은 인류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세력을 키우려면 괴물이라도 들여야 했던 거지.
“춘천시의 시민분들은 대부분 살아 있다. 그렇게 봐도 되는 겁니까?”
춘천시는 강원도 최대의 대도시 중 한 곳.
그곳의 주민들이 모두 살아 있다면.
그 숫자만 해도 엄청날 터.
“아니……. 그건 아니오.”
“예?”
“……뭐. 일이 많았단 것만 말하겠소. 자세한 건 나가서…….”
태완이 어두운 얼굴로 말하자.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법정에서, 제대로 진술해야 할 일이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괴물들에게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만.
‘……이거. 다른 이유로 죽은 사람은 많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