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환자식 (1)
건물 안을 밝힌 작은 횃불들.
그로 인해 생긴 그림자.
그 안에 손을 집어넣자 온갖 물건들이 잡혀 나왔다.
“배추, 당근, 오이…….”
“저건 뭐야. 달걀이랑 고기까지 있는데?”
“이번엔 요리 도구들까지.”
사실.
이건 엄밀히 따지면 내 능력은 아니다.
[그림자 장막].
내가 권속으로 받아들인 남작급 뱀파이어.
아리엘라의 특성.
-귀족만의 우아한 개인 공간이, 어쩌다 이렇게…….
그림자 안쪽에서 누군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외부인을 초대한 적은 극히 드물다고 했지.’
내가 들어갔을 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꽤 섬세한 감성의 개인 공간이었던 모양이다만.
-여관방으로 모자라서.
지금 저 안에는 뱀파이어 100인이 꾸득꾸득 들어차 있는 것은 물론.
-창고로 쓰이는 꼴이라니.
각종 식자재.
그리고 내 개인 물품들로 가득 찬 공간이 되어 버렸다.
-흐윽. 흐으윽…….
요리를 통해 굴복시켜 권속으로 삼은 뒤.
대부분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랐던 아리엘라지만.
저 안에 내 물건을 채워 넣겠다는 명령만은 정말로 싫어했다.
그러나…….
‘내가 하겠다는데, 지가 싫어하면 뭐 어쩔 거야.’
싫어했다뿐이지.
그녀에게 거절권 따위는 없었다.
이 좋은 공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잖냐.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이 안에 넣어둔 물건들은 쉽게 썩지도 않는다.
던전에 질병이 돌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가 작용하는 거겠지.
아무튼 중요한 건.
‘이 공간이 최고의 냉장고란 거지.’
이번 던전행.
차량에 많은 식량을 담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혹시 부대원들과 내가 떨어질지도 모르니, 쉽게 조리할 수 있는 군용 전투식량만 채웠지.
그 외의 식재료는 모두 그림자 안에 때려 박았다.
그 안에 손을 넣자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재료들을 들어서 내게 건네준 거고.
실제로 안쪽에서 이뤄진 일은 뱀파이어들의 고된 상하차 작업 같은 거였겠지만.
밖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건물의 돌바닥에서 뜬금없이 온갖 식재료와 도구가 튀어나온 걸로 보였겠지.
사람들이 아연해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공간 계열의 마법, 같은 건가?”
“외부인들도 각성자가 있다고 했으니. 저 남자는 마법사란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간을 조종하는 마법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는데.”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인 거야.”
“……괜히 저 군인들의 대장이 아니란 거겠지.”
조금 거창한 오해를 하는 것 같지만.
굳이 나서서 정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동맹으로 꼬드겨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강한 존재로 오해해 준다면 오히려 감사지.’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은.
[그림자 장막]을 사용하는 걸 본 것은 부대원들도 처음이란 건데.
“역시 신 병장님.”
“대단하시구만.”
뭔가.
그러려니 하며 넘기는 모양.
“……아니. 이게 ‘역시 신 병장님’하고 끝날 일 맞아요? 저런 능력은 이제 요리사의 영역도 아니잖습니까.”
드물게 반발하는 병사도 있기는 했다만.
“뭐야?”
“쟤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됐네.”
“신 병장님 하시는 일은 그냥 그러려니 해. 안 그러면 머리 아파, 인마.”
……아무튼!
그림자 안의 공간은 상당히 넓었다.
부대의 여유 식량을 꽉꽉 채워 넣었음에도 여유가 있을 정도.
상당한 양의 식재료.
적은 양의 요리도 복사해 대인원을 먹일 수 있는 스킬, [오병이어]까지.
두 조건이 갖춰진 지금.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수백 명의 인원도 몇 년은 먹여 살릴 수 있다.’
재료를 정돈하며 창수를 비롯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직전에 만났던 태완의 그룹과는 다르지.’
그들은 던전 공략에 협조할 가능성이 아예 없던 이들.
게다가 우리에게 식량을 내놓으라고 반쯤 협박을 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들은 협조적인 것은 물론, 오히려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해 주려고 했지.
그렇다면.
‘성의에 보답해 줘야겠지.’
* * *
창수가 이끄는 그룹, ‘복수자들’.
그 일원인 범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공간 마법이라니.’
군인들의 대표로 보이는 사내.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엄청난 양의 식재료와 요리 도구들을 꺼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공간을 조종하는 마법을 이용한 것이겠지.
그들 그룹은 상대적으로 인원수가 적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어느 그룹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하지는 못했다.
복수심에 불타 어인을 사냥하는 이들.
그들은 이 도시의 어떤 각성자들 보다도 높은 평균 레벨을 자랑하는 그룹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중의 누구도, 저런 짓은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불을 쏜다거나, 얼음을 만들어 내거나.
그런 종류의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
더 어이가 없는 것은.
턱 턱.
“흠. 준비는 이 정도면 됐고.”
그 엄청난 수준의 마법사가 바닥에 요리 도구들을 쌓아 올리는가 싶더니.
대뜸 요리를 시작해 버렸다는 것.
“마법사들! 불 지펴!”
“예!”
“뭐야, 화력이 왜 이렇게 약해?”
“아. 그게. 이 던전에서는 저희 화력이 좀 약해지다 보니…….”
“불이 약한 거만큼 요리할 때 화나는 일이 없다는 거 알지? 더 세게!”
심지어 화염 계열의 마법사가 들러붙어 불을 피우는 모습까지.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니, 이런 식으로 요리를 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진 범석은 근처에 서 있는 군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들 대장이란 사람. 공간 계열의 마법사 같은 거 아닙니까?”
“예?”
“그런 사람이 왜 요리를 하고 있답니까? 요리가 취미인 건가?”
순수한 궁금증이었으나.
얘기를 들은 병사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조금 기다려 보시면, 다 알게 되실 겁니다.”
“그게 무슨.”
궁금한 점이 해결되기는커녕 더 커지는 대답.
범석은 조금 짜증을 느꼈으나.
‘……아니. 저 남자의 취미가 요리든 뭐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곧 관심을 꺼 버리기로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
괴물들을 쳐 죽이는 것.
외부에서 왔다는 저 군인들도 마찬가지.
괴물 놈들을 쳐 죽이는 데 도움이 될지, 안 될지가 중요할 뿐.
‘다른 일에 괜히 심력을 써 봐야 손해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구석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소.
그 방 중 한 곳에는…….
범석의 아버지도 있었다.
어렸을 적.
언제나 당당하게 그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던 아버지.
어린 기억 속의 그는 마치 거인처럼 거대하게만 보였다.
나이를 먹어 가며 덩치는 점점 자신과 비슷해졌으나.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대단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존경스러운 사람.
하지만.
갑작스러운 수해와 괴물의 등장.
그로 인해 범석의 아버지는 평생 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거기서 멈췄으면 그래도 다행이었겠지만.
범석의 아버지는 그런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정신을 깊은 곳에 가둬 버리기를 택했다.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새끼들…… 그놈들한테 복수하는 데 도움만 된다면, 다른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지금 요리를 하고 있는 남자도 그렇다.
그의 취미가 요리니 뭐니.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보아하니. 꽤…… 아니, 엄청나게 강력한 마법사인 것은 확실해 보여.’
그들의 대장은 저들과의 동맹을 고려하는 중이었다.
꽤 강력한 마법사.
동맹이 된다고 한다면 그의 복수에 도움이 되겠지.
그 외의 것은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일.
범석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뒤.
멀리서 요리가 진행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양이 묘하게 적은 것 같은데.’
자기가 대접을 하겠다느니 거창하게 말하더니.
정작 그가 만드는 요리는 기껏해야 1인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쯧…… 한바탕 싸우고 와서 출출한데. 저런 식으로 언제 요리를 다 만들겠다고.’
식사 따윈 허기만 달랠 수 있으면 그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재료를 꺼내던 모습은 확실히 경악스러웠지만.
괜히 맛을 챙기겠답시고 거창하게 요리를 하는 꼴은 시간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1인분의 요리를 그릇에 나눠 담은 남자가, 그 위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병이어]
그 순간.
“……어!?”
범석의 눈앞에.
남자가 만들었던 요리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그 공간 마법으로 이동시킨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을 했으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 뭐야 이건.”
“요리가 복사……된 건가?”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옆을 둘러보자.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의 앞에 요리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군인들까지 포함해 100명이 훨씬 넘는 인원들.
그 모두에게.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으려 했던 범석이었으나.
등 뒤로 차가운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신화에서 기적으로나 다뤄질 법한 짓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런 걸 보고도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범석은 아까 질문을 했던 병사에게 다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기.”
“잘 먹겠습…… 아. 예? 또 뭐 질문 있으십니까?”
막 요리를 입에 담을 생각에 싱글싱글 웃던 병사.
그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 표정에 범석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지만.
이것만은 물어야 한다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바깥의 인간들은 모두 저렇소?”
“모두 저렇냐는 게 뭔 소립니까?”
“그러니까…… 당신이나 다른 군인들, 바깥의 인간들. 모두 저 남자하고 비슷한 수준이냐 이거요.”
꽤 진지한 질문이었다.
창수가 이끄는 그룹.
‘복수자들.’
그들은 이 수몰된 도시에서는 강자로 손꼽히는 이들이었다.
범석 자신만 해도 그렇다.
물속이라는 불리한 환경에서도 어인 두세 마리를 동시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강자.
하지만 저 남자가 한 짓에 비하면.
그딴 전투 능력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문득 든 생각이 하나.
‘저 남자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비슷한 수준이라면?’
어쩌면.
이 도시에서는 강한 편이라고 뻗대던 자신들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복수를 위해 힘을 키우던 시간이 모두 허무해질 것 같은, 끔찍한 상상이었으나.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설마요. 무서운 소리를 하시네.”
질문을 받은 군인은 오히려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란 거요?”
“당연히 아니지! 부대원들이 전부 신 병장님 수준이었으면 이깟 던전은 진입하고 한 시간도 안 돼서 클리어됐을걸요. 신 병장님이 돌연변이 수준으로 뛰어나신 겁니다.”
“그, 그런 건가? 후…… 다행이군.”
그 끔찍한 상상은 아무래도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범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신 병장님하고 지낸 지 꽤 오래된 편이긴 한데. 그런 우리도 신 병장님 하는 일에는 놀랄 때가 많거든요.”
“그 정도인가?”
“……어차피 이 던전에서는 우리랑 같이 활동할 테니. 잠깐은 전우라고 봐야하려나?”
이상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군인.
그는 무언가 혼자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임시 전우라고 생각해서. 서비스 하나 해 드리죠. 간단한 조언입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 병장님이 하는 일에 일일이 놀라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괜히 정신적으로 지치게 되기 마련이거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게 베스트예요.”
“그러려니 하라니…….”
“’저런 게 말이 되나?’ 같은 생각은 해 봐야 답도 없고 스트레스만 받기 마련이오. 대신 그만큼 신 병장님이 대단하신 거구나! 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편하단 거지.”
방금 부대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공간 같은 건 요리사랑 아예 상관이 없는데? 이게 말이 되나?] X
[그만큼 신 병장님이 대단하다는 뜻이구나!] O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노하우 중 하나니까, 새겨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
“…….”
범석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만큼 강력한 이가 동맹이 되려고 한다는 뜻이니까.
좋게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잡설은 그만하고. 슬슬 밥 좀 먹읍시다. 배고파 죽겠네.”
“아. 미안하오.”
“사과는 안 해도 되고. 대신, 기대는 해도 좋을 겁니다.”
“기대라니?”
“신 병장님의 다른 능력들도 대단하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요리 실력이거든.”
피식.
농담이라도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한 범석은 작은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뭐. 맛있어 보이긴 하네.’
다양한 반찬들이 섞인 백반 세트.
몇 달을 호밀빵과 생선 정도로 때웠으니, 군침이 조금 도는 것도 같았다.
그 요리를 한 숟가락 입 안에 담는 순간.
“……!?”
아공간 마법을 본 기억은.
‘따위’로 만들 수 있는 충격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