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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18화 (118/227)

118화 밀림 (4)

부대에 복귀한 신영준 병장과 그를 발견한 이상아가 경례를 나눌 때.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땅이 스스로 움직이고, 마치 길을 안내하는 듯 갈라지는 거목들.

그것만으로도 경외심이 들 정도로 웅장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오는 신영준 병장의 모습까지.

“저게 대체.”

“……그러려니 하기. 잊지 말자.”

그들이 놀라고 있는 사이.

경례를 마친 이상아는 신영준을 향해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안에서 무슨-”

“아, 조심해.”

그녀의 발이 갈라지는 나무들 사이를 밟은 순간.

콰직!

“……!?”

물러서던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정해.”

“……저한테 하는 말은 아니신 것 같은데.”

이상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그 나무뿌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진정하라는 것은 이상아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이 녀석한테 한 말이야.”

그의 손이 나무를 부드럽게 쓸었다.

“진정해. 나랑 친한 사람이거든.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부드러운 말을 건네자.

이내 스스슥 소리를 내며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는 나무뿌리.

“이건 대체.”

“아까 말했잖아? 생각보다 잘 풀렸다고.”

씨익.

“우리, 이제 친구거든.”

* * *

“뭐 아무튼 잘 풀렸다는 것만 알아 두면 될 거야. 그리고.”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이상아를 뒤로하고.

“철욱 부대원은 거기 있나?”

농부 각성자를 부르자.

사람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뛰쳐나왔다.

“충성! 어떻게, 가신 일은 잘되신 겁니까?”

“덕분에.”

“오오……!”

자신이 가르친 비료 제작법이 도움이 된 점이 꽤 뿌듯한 듯.

호탕하게 웃는 철욱.

“다행입니다, 다행이야!”

“그리고. 기뻐할 만한 소식이 하나 더 있다.”

“예?”

난 손가락으로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쪽에 있는…… 뭐라고 했지? 농부의 혼을 불태울 만한 것들?”

“아. 예. 그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만.”

“잘 말해 놨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예?”

요리사인 나는 좋은 재료가 있어야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좋은 결과물이 나올수록 얻을 수 있는 경험치의 양도 늘어난다.

다른 생산직도 이런 점은 마찬가지이다.

“대신, 저 안쪽에서 키우는 것만 허용이다. 내가 없을 때는 비료도 좀 챙겨 주고.”

“가, 감사합니다!”

전투도 병행하며 경험치를 수급하는 나와 달리.

순수하게 농부로서 능력을 키워 온 그에게 있어서, 재배 가능한 종이 늘어난다는 것은 성장 가능성이 크게 열린다는 뜻.

철욱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만 주의할 점이 하나 있어.”

“……?”

“내가 처음 발견했을 때랑은 외형이 좀 바뀌어 버렸거든. 신기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일겠지만…… 섣불리 다가가진 말도록.”

인간으로 치면 영양실조에 걸려 있던 알라우네.

나무 한가운데에 얼굴만 떡하니 박혀 있던 그 기괴한 모습은 뭐랄까.

‘일종의 에너지 절약 모드 같은 거였나 보더라고.’

제대로 된 영양 보충이 이뤄지자, 모습이 꽤 크게 변해 버렸단 말이지.

그 모습을 보고 섣불리 다가갔다가 공격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다.

친해진 건 나뿐이니까.

철욱이 재배 가능한 채소가 늘어난다는 건 내게도 좋은 일이다.

좋은 재료가 있어야 좋은 음식이 만들어지니까.

그리고 알라우네와 친구가 됨으로써 얻은 또 하나의 장점은.

“부대 후방의 방어는 저 숲에 맡겨도 될 거야.”

강력한 아군을 얻었다는 것.

전투직 부대원들 대부분이 춘천으로 원정을 나가 있는 상황.

인제군은 그나마 안정화가 된 편이라고 한들.

전력이 크게 줄어든 건 사실이다.

어떤 괴물이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마냥 안심하긴 힘들었던 게 사실.

‘이제 걱정은 좀 덜어도 되겠지.’

이 부대가 내 집이라고 알려 둔 이상.

친구의 집이 무너지는 걸 보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어차피 채소 보충을 위해 한 번은 부대에 들러야 했다만.

생각보다 많은 걸 얻어 가는 느낌.

나쁘지 않았다.

‘이제 대충 채소들 보충 좀 하고, 다시 춘천 쪽으로 복귀해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군단장님!”

한 병사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자.

“그 남자가, 깨어났습니다!”

“그 남자라니.”

“깨어나는 대로 보고하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병실에 누워있던.”

아.

당장은 떠날 때가 아닌가 보다.

* * *

병사의 안내를 따라 병실을 찾아가자.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침상에 누운 채 의식을 잃은 상태였던 남자.

그가 눈을 뜬 것이 보였다.

끼익.

어딘가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던 남자.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다, 당신이 병사들이 불러온다던 그 높으신 분입니까?”

깨어나면 바로 보고하라고 해 놨더니.

진짜로 뭐 설명도 없이 바로 나한테 뛰어왔던가 보네.

“아,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아아! 다행입니다. 제 말 좀 들어주십쇼.”

내 옷깃을 붙잡고 다급하게 소리치는 남자.

“내 고향…… 춘천을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거긴 지옥이나 마찬가-.”

“아. 그건 이미 해결됐습니다.”

“지, 모든 게 수몰돼서…… 어?”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이 남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 조금 체감이 됐다.

“그, 그랬군요.”

난 그에게 춘천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줬다.

그가 쓰러지기 전에 한 구원 요청을 듣고 춘천으로 향했고.

던전은 클리어, 사람들은 세상으로 탈출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내 얘기를 들은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쓰러지기 직전에 뭔가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 착각이 아니었어…….”

“안쪽의 상황을 보니, 조금만 늦었으면 식량 부족으로 인간들끼리 전쟁을 벌였을 것 같더군요. 당신 덕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진 셈입니다.”

“다행이군요. 정말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정말로.”

꽤 감정이 복받치는 것인지.

고개를 꾸벅이며 고마움을 표하는 남자.

그나저나.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만.”

“예? 아. 뭐든 물어보시죠. 제 고향을 구해 주신 은인분들이시니. 뭐든지.”

“당신은 그 던전, 이라고 해야 하나? 도시에 갇혀 있던 사람이 맞습니까?”

“예에. 그렇습니다만.”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단 말이지.

“그 던전에서 어떻게 빠져나오신 겁니까?”

던전에서 탈출에 성공한 것은 오직 이 남자뿐.

“도시를 외부와 단절시켰던 그 폭포는 결코 평범한 게 아니었어요. 어지간한 철판도 금세 갈아 버릴 정도의 수압이었으니.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탈출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 남자가 엄청난 강자라면 또 모를까.

[식재료 감별(강화)]

[최하급 전령 Lv.3]

그런 것도 아니란 말이지.

그 벽에 쏟아지던 폭포를 뚫고 나올 수 있는 건 우리 부대원 중에서도 드물겠지.

나 역시 [절대미각]의 효과로 여러 요리를 중첩시킨 뒤에야 가까스로 가능하지 않을까.

그나마도 그렇게 통과하고 난 뒤에는 중첩된 버프에 대한 부작용으로 며칠은 앓게 되겠지.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 질문에, 남자는 조금 주저하며 답했다.

“그 도시에는 괴물이 있었습니다.”

“어인들을 말하는 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놈들의 대장도 죽었고, 나머지도 던전이 닫힌 순간 말라 죽어버렸죠.”

“아뇨, 어인도 어인입니다만.”

“?”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남자.

“인간과 어인을 구분 없이 잡아먹는 괴물…… 식인종이 있었어요.”

이 남자가 그 폭포를 뚫고, 우리에게까지 도착할 수 있던 이유.

그건 꽤 의외의 것이었다.

* * *

대충 탄약대대에서의 일을 모두 마친 뒤.

나는 춘천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얘도 데려가세요.”

“응?”

그러던 중.

나를 찾아온 이상아가 건넨 것은 검은 솜뭉치 같은 생명체.

-끼잉…….

[강철을 먹는 맥]

까망이었다.

전투원들이 많이 빠지면서 혹시 몰라 남겨 두고 간 녀석.

“잘은 모르겠지만, 저 밀림 안에 있는 존재가 이 부대를 지켜준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기름이 없어서 장거리 운용을 못 할 뿐이지. 여기는 전차도 있고, 공병들이 설치한 방어시설들도 많아요. 저 숲까지 우릴 지켜 준다고 한다면 방어력은 차고 넘칠걸요. 그쪽은 그렇지 않잖아요?”

전투 계열 각성자는 춘천 쪽에 더 많지만.

그쪽의 방어시설은 임시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물 주변에 방벽을 세운 정도가 전부이다.

나름 공병들이 방어시설을 늘려 보려고 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었다.

“부대에서 비축 중인 자재 대부분은 이미 강화가 끝나기도 했고.”

“그쪽 공병들이 오히려 자재가 급할 상황 아닙니까. 데려가셔도 될 것 같슴다.”

까망이의 능력은 자재를 강화하는 것에도 있었기에 데려가도 되나 했지만.

공병들의 말을 들어 보니 괜찮다는 것 같다.

이상아가 다시 한번 말했다.

“자재 강화도 강화지만. 까망이를 데려가라고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군단장님의 호위 때문이에요.”

“호위라니.”

“저번부터 그랬고, 이번 일도 그렇고. 군단장님은 몸을 너무 안 아끼세요. 그러다 언젠가 호되게 당하실걸요.”

“설마.”

예전이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나.

나름 여러 일을 겪다 보니, 이제는 전투 능력으로도 나름 자신이 생긴 편이다.

다른 부대원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수준의 깡스탯.

거기에 [절대미각]의 강화로 인해 요리의 버프가 중첩되기까지 하니까.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군단장님도 사람이잖아요? 사람인 이상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거든요. 지금 세상은 실수 한 번에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세상이구요.”

“으음.”

“사람 일은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잔말 말고 데려가세요.”

기분이 조금 묘했다.

군대 소문이란 게 으레 그렇듯 조금 부풀려지는 게 있다 보니.

내가 한 일들도 꽤 과장돼서 퍼진 게 많았다.

그 덕분인지, 요즘 병사들은 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꽤 있었다.

솔직히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런 와중에 이런 걱정이라.

꽤 오랜만에 받아 보는 걱정에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지 뭐.”

“잘 생각하셨어요.”

걱정해 주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뭐하니까.

실제로 춘천 쪽에 자재가 더 필요할 것이란 것도 맞는 말이고.

-낑!

기쁜 소리를 내며 내 품으로 들어오는 까망이.

저쪽에 돌아가면 일단 이 녀석 전용 요리들부터 다시 만들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켜보니.

[전투력 측정기]

녀석의 몸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이 보였다.

짙은 푸른빛.

“…….”

아리엘라는 물론.

알라우네보다도 짙은 색이었다.

조금만 더 짙어지면 남색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 역시 대단한 놈이었구나.”

-낑?

지금은 식사를 제한해 작은 고양이처럼 생긴 모습이지만.

이 녀석의 잠재력이 허용하는 최대까지 철물을 먹인다면.

얼마나 강해진다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철욱이 작은 박스 하나를 건넸다.

이미 필요한 채소류는 모두 그림자 속에 보충해 둔 상태라 뭔가 했는데.

상자를 살짝 열어 보자.

처음 보는 모양의 식물들이 담겨 있었다.

아니.

처음 보는 건 아니구나.

“벌써 재배가 된 건가?”

“재배라고 하기보단, 원래 자생하고 있던 녀석들이죠. 지력이 달려서 죽어가고 있던 걸 군단장님 비료가 살렸잖습니까.”

알라우네의 주변에 박혀 있던 정체 모를 식물들.

“재배하는 게 목표인데, 자생하고 있는 걸 뽑아 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하. 저라고 생각 없이 가져왔겠습니까. 이미 씨앗이나 모종 같은 건 전부 얻어 둔 상태입니다. 맘 놓고 쓰셔도 될 겁니다.”

“오.”

역시 [농부] 각성자.

이런 능력은 대단한데.

“그럼. 이제 가시면 언제 돌아오시게 되는 겁니까?”

“글쎄. 한동안은 그쪽을 안정화하는 데 집중할 것 같은데.”

춘천 쪽은 아직 제대로 자리 잡았다고 말하기가 힘든 상황.

제대로 된 기지조차 없어서 빈 건물 하나를 임시 거점으로 쓰는 정도니까.

“여유가 된다면 좀 자주 들러 주셨으면 좋겠군요.”

“왜? 여긴 이미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말씀하신 대로 제가 만든 비료도 주고 해 봤습니다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라서요.”

아.

알라우네를 말하는 건가.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나무들이 한 번씩 머리통을 툭툭 때리고 지나가고 그럽니다. 그 상자에 담긴 녀석들도 가져가려고 하니까 엄청 화를 내더군요.

“하핫.”

“군단장님 드리려는 거라고 소리치니까 그제야 좀 진정됩디다.”

“고생했겠네.”

“처음 봤을 땐 외모만 보고 놀랐는데, 얼마나 화가 많은 녀석인지. 군단장님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끔 얼굴 좀 비쳐서 그놈의 화 좀 죽여 주셨으면…….”

“사정이 되면 한 번씩 들르지 뭐.”

사실.

여기 좀 더 머무르는 것도 아주 나쁜 선택지는 아니겠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병실에서 남자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 식인종은 인간하고 괴물을 구분 없이 잡아먹는 녀석이라, 저도 놈과 마주치고 당연히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니었단 건가?

-저를 붙잡고는 도시의 경계로 끌고 가서 말하더군요.

밖으로 나가라.

바깥의 인간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그러곤…… 자기 팔로 폭포를 가로막은 뒤, 그 사이로 저를 내던졌습니다.

[던전]은 한번 입장하면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춘천의 시민들은 춘천이 던전화되자 갇혀 있었을 뿐, 외부에서 던전 안으로 입장한 적은 없다.

폭포만 해결한다면 탈출은 가능하다는 것.

그렇게 밖으로 나오게 된 남자는 어떻게든 자신들을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다가, 우리에게까지 도착했다는 거다.

-제가 죽을힘을 다해가면서 여기까지 온 건…… 춘천이 제 고향이란 것도 있지만, 두려움도 컸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그 괴물이 한 말을 최대한 빠르게 이행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쫓아와서 저를 잡아먹을까 봐…….

도시 안을 돌아다니던 괴물.

녀석은 던전이 클리어되는 순간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식욕자라.’

안 그래도 한번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놈에게도 묻고 싶은 게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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