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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21화 (121/227)

121화 이상식욕자 (3)

춘천시에는 한 경찰관이 있었다.

그 경찰관이 어렸을 적.

집에 강도가 든 적이 있었다.

자칫하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쿵!

문을 부수며 진입한 경찰들.

빠른 대응 덕에,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얼마나 멋있던지.

그 모습을 보고 꿈을 키운 아이가 경찰관이 되었다.

[봉사와 질서.]

남들이 뭐라 할지언정.

악인을 벌하고 시민을 구한다는 의지 하나로 똘똘 뭉친 신임 경찰관의 탄생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신임 경찰관은 필요하다면 순직할 각오까지 되어있었다.

자신의 손에 닿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전력을 다해 해결해 보이겠노라.

그렇게 다짐했던 경찰관이었으나.

아쉽게도.

직후에 일어난 일은, 경찰관의 손에 닿는 일이 아니었다.

물에 잠겨 가는 도시.

바깥세상과의 연락 두절.

괴물의 출현.

많은 사람들이 죽고, 도시의 질서가 무너질 때.

갓 임관한 신임 경찰관 따위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경찰관이 할 수 있던 일은 하나.

도시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질서를 어지럽히는 괴물들을 잡아 죽이는 것.

-우리 그룹에 가입하겠다고?

마침 비슷한 목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복수를 위해 괴물들을 사냥하던 이들.

신임 경찰관과 동기는 약간 달랐지만.

생각해 보면 크게 다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주변 인물의 죽음으로 복수자가 되었다면.

경찰관은 무너진 질서에 대한 복수를 행할 뿐.

문제는, 식량이었다.

그룹에서 나름 제공하는 식량이 있었으나, 경찰관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모두가 식량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도시의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그 질서를 지켜내지 못한 그가 아까운 식량을 축낼 수는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으나.

경찰관은 식량을 남들에게 양보했다.

먹을 게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괴물을 먹겠다니. 씹어 먹고 싶을 정도의 증오라는 건가.

-……언니는 비위도 좋네요.

구역질 나는 맛이긴 하지만.

배가 채워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 *

쿠웅…….

놈의 거대한 덩치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빈 공동에 놈이 쓰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쿨럭.

어떻게든 처치하긴 했다만.

내 쪽도 상황이 영 좋지는 않았다.

“큭큭…… 죽겠네, 제기랄.”

약탈자 그룹의 이상식욕자와는 격이 달랐다.

그놈은 [대적자] 버프를 받은 나 혼자서도 후드려 팼지만.

이쪽은 그러고도 고전했을 정도의 강적이었다.

슬쩍 몸을 내려다보자.

온몸에 성한 구석이 없는 것이 보였다.

[절대 미각]으로 인한 요리의 중첩까지 있었으니.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미 시체가 되어야 정상이었을 몸 상태.

그나마 다행인 건.

스르륵…….

짓이겨 나간 살점들이 알아서 회복되고 있다는 것.

“몇 번을 봐도 적응은 안 되지만.”

짓이겨 나간 살점이 스스로 회복하는 모습은 꽤 징그러웠다.

뱀파이어의 피를 요리하지 않고 생으로 마셔 버린 결과.

내 몸은 ‘약간’ 뱀파이어에 가까워졌다.

괴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다행히 이 정도 재생력을 얻은 정도로는 그럭저럭 인간 취급인 듯하다.

덕분에, [절대 미각]으로 인한 페널티도 억누를 수 있었다.

지금 같은 중상을 입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 재생력 덕에 생존에 유리해진 것은 사실이니.

좋게 생각해야지 뭐.

‘난 그나마 다행이다만.’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끼잉.

전투로 인해 생겨난 파편들을 주워 먹으며 크기를 키웠던 까망이었으나.

지금은 다시 새끼고양이 같은 크기로 변한 채 낑낑대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 흩뿌려져 있는 것은.

[최하급 뱀파이어 나이트의 뒷다리]

[최하급 뱀파이어 나이트의 머릿고기]

“……쯧.”

여기저기 뜯겨 나간 뱀파이어들의 사체들.

“[안개화] 덕분에 여분의 목숨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결국 쿨타임이 있으니.”

한 번 붙잡혔을 때는 안개화를 통해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잡힌 순간에는 얄짤없이 입안으로 직행.

괜히 이름이 [이상식욕자]가 아니라는 듯.

그렇게 뱀파이어를 잡아먹을 때마다 놈은 조금씩 체력을 회복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버프라도 받는 듯 힘도 조금씩 강해졌었다.

……내 요리를 먹은 부대원들을 적들이 보면 저런 느낌일까?

싶었을 정도.

“……무능한 것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옆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바라보자,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아리엘라가 보였다.

영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뭐야 너. 싸움은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싸움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저와 권속이 성장하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런 거였냐.

힘겨운 전투에 몰아넣어도 좋아하길래 안 어울리게 전투광 속성이 있는가 했더니.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

지금 묘하게 화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글쎄다.

권속에게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권속이 죽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자존심 상해서요.”

꽤 간단한 이유였다.

“주인님이 이끌고 왔던 군세처럼 신성력을 두른 것도 아니고. 물리 공격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말 그대로 힘만 믿고 덤벼드는 돼지 같은 괴물……. 상성으로는 저와 제 권속들이 우위에 있었을 텐데.”

결과는 뭐.

보다시피.

나와 까망이가 가담해서 이기긴 했다만.

그럼에도 아슬아슬했다.

아마 뱀파이어들만으로 토벌하는 건 불가능했겠지.

“결국 이기긴 했잖아? 자존심 상할 일인가 싶은데.”

“……제 능력과 권속들이 온전했다면, 저희만으로도 이길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가?

하긴.

나와 부대원들에게 토벌당하기 전에는 권속의 숫자도 엄청나게 많았으니까.

아리엘라도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고.

인해전술을 통해 어떻게든 이겼을지도 모르지.

‘역시. 어느 정도 성장시켜 두긴 해야겠어.’

퉤!

입안에 고인 피를 대충 내뱉은 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나는 쓰러져 있는 이상식욕자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주변에 쓰러져 있는 뱀파이어들에게 말했다.

“언제 다시 기운 차리고 날뛸지 몰라.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해라.”

“예……!”

“끄윽. 형제들이여, 일어나라.”

“주인님의 주인님의 명령이다.”

“윽. 허리가…….”

어떻게든 전투에서 살아남은 뱀파이어들.

놈들이 아픈 몸을 끌고 이상식욕자 녀석을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했다.

-크륵!

몸의 자유를 빼앗긴 녀석이 불쾌한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으나.

-카아아아아악!

“어우. 살벌하네.”

힘이 없어서 몸 가누기도 힘든 상태일 텐데.

얼굴만은 엄청나게 살벌했다.

그나마 전투 초반에는 말이라도 했지.

전투가 좀 격화된 시점부터는 저렇게 아예 짐승처럼 변해 버렸다.

“음. 이 상태로 뭘 듣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다행히.

난 이 녀석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이곳에 온 바.

이렇게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을 때의 경우도 나름 생각을 했단 말이지.

난 녀석의 얼굴 근처로 몸을 옮겼다.

슥.

놈의 얼굴.

정확히는 입 쪽으로 군홧발을 조심스럽게 내밀자.

-카악!

거대한 괴물이 얼굴을 들이밀며 내 발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어이쿠, 정지.”

-그르륵.

가까스로 발이 뜯겨 나가는 걸 피한 나는 벌어진 녀석의 이빨을 잡아 쥐었다.

한 손으로 윗입을 벌리고.

군홧발로 아랫입을 벌린다.

“자, 아~ 합시다.”

그렇게 강제로 입을 연 뒤.

그 사이로 준비해 온 음식을 던져 넣었다.

쿵!

음식을 넣고 손을 빼자마자 거칠게 닫히는 입.

조금만 늦었으면 손이든 발이든 한쪽은 잘려 나갈 뻔했다.

“식겁했네.”

-그르륵!

녀석은 그러고도 계속해서 내 쪽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짐승 같은 괴성에, 입에서는 침까지 주륵 흐르고 있다.

짐승.

아니, 진짜 괴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가 던져 넣은 요리가 녀석의 위장에 닿을 때쯤.

-……넌 대체, 뭐 하는 놈이지?

괴물 같던 녀석의 입에서.

평범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 * *

“정신이 드나?”

-뭐 하는 놈이냐고 물었다.

“음. 괜찮은 것 같네.”

짐승처럼 날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조금 까칠하지만 평범하게 말을 하는 녀석.

[냉철한 이성의 슬로스 브리스킷]

[슬로스]는 나무늘보와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강한 완력을 지니고 있어서 위협적이지만.

공격을 받아도 전혀 흥분하지 않고 나른해 보이는 모습으로 싸우던 녀석.

놈이 가지고 있던 특성이 바로 이것.

[특성 : 흔들리지 않는 정신]

[대부분의 상황에서 차분함과 이성을 유지합니다.]

거기에 내 [특별소스]의 효과가 ‘냉철한 이성’.

특성과 소스의 효과가 겹쳐진 결과.

-배가 고프군…….

“미안하지만 참아.”

여전히 배고픔을 느끼긴 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대화는 가능하게 됐다는 게 중요한 거지.

“난 신영준이라고 한다.”

-…….

“직업은 군인. 취사병 병장.”

놈의 앞에 털썩 앉은 나는 자기소개부터 시작했다.

뭐 하는 놈이냐고 묻기에 대답해 줄 생각이었는데.

-……알고 있다. 밖에서 온 군인.

“뭐야? 알고 있었네.”

녀석은 날 알고 있던 것처럼 말했다.

하긴.

“네가 나와 부대원들을 던전으로 인도했으니까, 당연한 건가?”

-…….

던전을 탈출해, 우리 부대에 구원 요청을 해 온 남자.

그 남자를 보낸 게 바로 이 녀석이다.

던전 공략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어쩌면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설명할 필요가 없다면 나야 좋지. 아쉽지만 얘기할 시간이 많지는 않거든.”

-무슨 의미지……?

“그 요리의 효과가 오래가진 않아서. 조만간 넌 또 미쳐 날뛰게 될 거다.”

-…….

“그 전에 할 얘기는 다 해야 하지 않겠어?”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녀석.

난 그 시선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내 직업은 요리사다.”

-요리사……?

“그래. 요리사. 나도 처음엔 이게 무슨 직업이냐 싶었는데, 지내다 보니 나름 나쁘진 않아.”

-요리사가 나한테는 왜.

“최근에 이 직업에 대해서 신경 쓰이는 게 조금 생겼는데 말이지.”

녀석에게 식칼을 가리키며 말한다.

“네가 거기에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

“너. 원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며. 어쩌다 이 꼴이 됐는지 설명해라. 처음부터 끝까지. 가급적 자세하게.”

흘깃.

살 속에 파묻혀 있는 눈동자가 내 쪽을 흘겨보았다.

-네 명령을 들어야 하나?

“응. 안 들으면 심하게 맞을 거거든.”

-…….

“뭐. 방금 건 농담이고.”

아무래도 다짜고짜 명령조로 나온 게 조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데.

그런 눈으로 보면 뭐 어쩔 건데.

“던전을 탈출해 우리 부대를 찾아왔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네가 자신을 보냈다고 하더군. 바깥으로 나가서 도시를 구할 사람을 불러오라는 명령과 함께.”

-…….

“그 구원 요청을 받고 와서, 도시를 해방시킨 게 우리다. 즉.”

슥.

손가락으로 녀석의 미간을 가리킨다.

“너는 우리한테 진 빚이 하나 있다는 거지. 안 그래?”

-……후우.

“네가 원하는 걸 우리가 이뤄줬잖냐. 네 쪽에서도 보답이 있어야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묘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는 녀석이었으나.

-조건이 하나 있다.

“조건?”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부탁을 하나만 들어다오.

부탁이라니.

“뭘 착각하고 계시나 본데. 네가 지금 뭘 부탁하고 그럴 처지가 아니세요.”

-너라면 쉬운 일이다. 싫으면 거절해도 좋다. 나도 입을 열지 않으면 그만이니.

“……그러지 뭐.”

미안한 얘기지만.

‘너무 어려운 부탁이라면 그때 가서 없던 일로 해 버려도 그만이니까.’

힘이 지배하는 세상.

더 강한 쪽은 나다.

나중 가서 없던 일로 해 버려도 아무 문제없다는 거다.

이 녀석만 화병이 나고 말 텐데.

그러면 몇 대 더 때려주면 되는 거고.

-약속. 믿는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나름대로 수긍을 한 듯.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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