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28화 (128/227)

128화 요새 (1)

[암부] 놈들의 습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

나는 부대의 간부들을 회의실로 집결시켰다.

‘사망자는 없나.’

꽤 강력한 암살자의 습격이었으나.

다행히 부대원들 중에 사상자는 없었다.

다만…… 사상자가 없을 뿐.

모두가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후욱…… 후욱…….”

“광일아. 괜찮냐?”

“괜찮슴다……. 크륵. 조금만 있으면, 진정될 겁니다. 크르륵.”

“어, 어어.”

갑작스러운 전투로 인해 [광기] 특성을 사용해 버린 광일이.

녀석은 회의실에 앉아 광기를 가라앉히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괜히 우리 부대 최고의 전사가 아니다.

그나마 이 녀석은 외상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다만.

“형하고 수혁이도. 아프면 치료 먼저 받고 와도 되는데.”

“나중에.”

“이 정도는 금방 낫습니다.”

이민재 병장과 서수혁 상병.

두 사람은 아예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광일이가 저렇게 멀쩡한데, 나만 다쳤다고 쉴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야, 형이랑 수혁이는 1:1에 적합한 직업은 아니니까.”

마법사와 사수.

원거리 화력에 특화된 직종인 그들은 기본적으로 근접전에 취약하다.

강제적으로 근접전을 유도하는 암살자에게 고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둘 모두 전투 경험이 상당한 만큼 적을 격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공격을 어느 정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

“그런 식으로 따지면 신 병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요리사인 신 병장님이 상처 하나 없이 적을 격퇴하셨는데, 전투직인 제가 상처를 입은 것 자체가 잘못이죠.”

“아. 그건.”

“정말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그냥 버틸 수 있으니, 이 얘긴 여기까지 하시죠.”

아니.

그게 아니라.

상처 하나 없이 적을 격퇴했다니.

‘난 그냥 죽을 뻔했는데?’

언젠가 실수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며, 혹시 모르니 까망이를 데려가라던 이상아의 조언.

그 조언을 따라 품 안에 넣고 다닌 까망이가 도와줘서 다행이지.

만약 까망이가 없었다면…….

글쎄.

‘지금쯤 정수리가 두 동강 난 좀비로 변하고 있지 않았을까?’

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방심해서 죽을 뻔했다니.

쪽팔리잖아.

나중에 이상아한테 따로 감사를 전하기로 하고.

“아무튼. 박태준 병장님 말이 사실이라면, 곧 그 괴물들이 몰려온다는 거군요.”

상처 부위를 억누르며 말하는 서수혁 상병.

회의실로 향하면서, 나는 태준이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었다.

“태준이 녀석의 답변을 요약하자면 강원도 서북부는 지금 특정 몬스터 세력한테 먹힌 상태라고 한다.”

민재 형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녀석의 능력은 좀 추상적이다만. 아마도 여기서 서북부라면.”

“철원이나, 화천?”

“둘 다일 수도. 본래라면 그들은 바로 동쪽…… 우리가 있는 곳을 공격할 예정이었다더군.”

그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몇 개월 전에 서북부를 먹었다니.”

“……그럼 그사이에는 뭘 했답니까?”

본래라면 몇 개월 전에 이미 우리 쪽을 침공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들.

하지만.

“태준이 녀석이 막아 준 거야.”

“예?”

423대대.

강원도에서도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위치한 부대에 자리 잡은 [천문관].

어느 날.

태준이 녀석은 늘 하던 대로 산맥에서 별점을 보던 중.

[무당 : 나 외의 누군가가 별의 운행을 엿보려고 하더군.]

저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무당 : 대충 느껴지는 것만 해도…… 당시의 우리 부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놈들이 우리 쪽을 향하는 건 최대한 막아야만 했어.]

[셰프 : 그래서.]

[무당 : 싸움이 시작됐지.]

그게 태준이 녀석의 소문이 뜸해진 시점이었다.

별의 운행을 두고 벌어지는 전투.

‘평범한 전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싸움이었겠지.’

다행히도.

별의 운행을 보는 일이라면 [천문관]인 태준이 녀석의 전문.

423대대가 위치한 저 높은 산맥은 특히나 별의 운행에 관여하는 데 유리한 면이 있다던가.

그렇게 별의 운행을 엿볼 수 없게 되자.

한창 세력을 넓히려고 하던 저 괴물들의 세력은, 자신들 점령지 바깥의 정보를 엿볼 수 없게 되었다.

놈들의 세력 확장 역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고.

“저쪽 입장에선 자신들의 눈을 가릴 만한 존재가 이쪽에 있다는 뜻이니까.”

“경계심을 품게 됐다는 거군요.”

“그런 거지.”

놈들은 지레 겁먹어서 점령지에 머물기를 선택했고.

덕분에 몇 개월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다만.

[무당 : ……몇 개월이 한계더군.]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태준이 녀석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상상이 갔다.

[무당 :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저쪽이 훨씬 더 노련했어. 숫자도 더 많았고.]

몇 개월의 정보전.

태준이 녀석은 꽤 잘 버텨 주었으나…….

‘그것도 어제까지.’

결국 패배한 건 이쪽이란 거다.

“놈들은. 우리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됐겠지.”

“끄응.”

연락이 뜸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있으면 태준이에게 확인을 받곤 했다.

-동쪽으로 가는 게 좋을까, 서쪽으로 가는 게 좋을까?

-이 던전 클리어할 수 있겠냐?

뭐 그런 것들.

저쪽도 비슷한 식으로 능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침공을 막을 만한 세력이 존재하는가?

뭐 이런 내용이었겠지.

그리고 그 결과.

저들은 우리를 향해 진격해 오기를 선택했다.

“비교해 보니까 지들이 더 강했단 거겠지, 아마?”

“…….”

과거.

아리엘라를 권속으로 삼은 직후.

나는 그녀의 뱀파이어들을 사방으로 정찰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 살아서 귀환한 것은, 북쪽 끝에 펼쳐진 검은 장벽을 발견한 뱀파이어 몇 마리뿐.

나머지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땐 그냥 괴물에게 죽었겠거니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놈들한테 당했을 확률도 높겠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괴물들이 도시를 점령하다니.”

“이상할 거 없지 않습니까? 인제군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원래는 괴물들로 넘쳐 났잖아요.”

“지금 말하는 놈들은 단일 세력인 게 문제지.”

강원도 서북부라고 하면 아마도 철원과 화천.

그 두 곳일 확률이 높다.

우리도 이제야 인제군을 겨우 점령하고, 춘천시를 점령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상황.

그런데 이미 몇 개월 전에 그 두 곳을 점거한 세력이라니.

“빡세겠는데.”

솔직히.

머리가 살짝 아파 오는 적이란 건 확실했다.

“으음.”

“차라리 탄약대대 기지였다면 괜찮았을 텐데 말입니다.”

탄약대대 기지를 거점으로 사용한 지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지금 인제군의 탄약대대에는 공병들이 설치한 방어 설비들이 즐비했다.

‘군부대에서 가져온 각종 무기들에…… 공병들이 설치한 장벽이나 함정들까지.’

게다가 얼마 전.

나와 친구를 먹은 알라우네가 어느 정도 기지를 지켜 주기로 약속하기도 했으니까.

그쪽이라면, 적이 아군의 몇 배 병력이라고 해도 방어해 낼 자신이 있다만.

“형. 지금 우리 방어 설비가 어느 정도지?”

“이 거점에서?”

“응.”

잠깐 고민하던 민재 형.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없다.”

“…….”

“굳이 따지자면 이 건물 자체하고. 저 바깥에 설치된 장벽이 끝이지. 저것도 방어 설비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춘천에는 아직 제대로 된 거점조차 없다.

적의 침공을 막아낼 설비 따위 있을 리가 만무.

“박태준 병장님 말대로라면 괴물들은 엄청나게 많은 숫자로 몰려들겠죠.”

“아마도.”

서수혁 상병이 아픈 상처를 짓누르며 말했다.

“저희도 부대원들이 꽤 늘긴 했습니다만, 마땅한 방어 설비 없이 대규모의 괴물들을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입니다. 그러니.”

본인도 내키지는 않는 듯하나.

어쩔 수 없다는 말투.

“……후퇴를 건의드립니다.”

후퇴라.

간부들의 표정이 조금 찡그려졌다.

녀석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아무리 우리 부대원들이 강해졌다고 한들.

‘방어 설비도 없는 곳에서, 수적 열세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고 하면…… 솔직히 좀 쫄리긴 해.’

게다가 저 괴물들.

생각보다 강하단 말이지.

[전투력 측정기]로 알아본 결과.

놈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매우 짙은 노란색이었다.

‘아리엘라’

‘알라우네’

‘강철을 먹는 맥’ 등.

파란색 기운을 내뿜는 괴물에 비하면 급이 두 단계 정도 낮기는 하다만.

“문제는 숫자입니다.”

태준이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들은 엄청난 숫자로 몰려올 터.

나와 간부들을 덮친 암살대만 해도 생각보다 강했다.

아마도 암살에 특화되어있을 괴물.

그럼에도 전면전에서도 생각보다 버겁다고 느껴졌을 정도니까.

아예 암살이 아닌 전면전에 특화된 다른 개체들이 몰려온다면?

아무리 우리 부대원들이라도 고전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춘천을 버리고 떠난다라.

“그건 안 되겠는데.”

“예?”

내가 자신의 의격을 바로 기각해 버리자.

수혁이 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던전에서 풀려난 각성자들 대부분이 아직 이 근처에 머물러 있잖냐.”

[침식이계 다스무르]를 클리어한 뒤.

그 안에 있던 시민들이 세상에 풀려났다.

대부분이 각성자라는 귀중한 전력.

“안 그래도 죽은 사람들이 많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각성하기 힘든 환경이야. 저들을 살려 둬야 인간의 전력을 키울 수 있어.”

괴물과 인간의 싸움은 인간 측이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미 각성을 마친, 수천 명의 각성자들.

저들이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다면?

“저들이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되는 순간, 다른 생존자들을 끌어들이고 각성시켜 나갈 수 있게 될 거야.”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서 지내고 있는 생존자들.

그들을 이끌고, 전력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안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한 괴물들이 나타날 거라는 얘기까지 들은 상황.

인간 측 전력의 핵심이 될 각성자들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이 여전히 춘천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

던전 안에서 각성만 마친 이들이 많아, 레벨도 성장도 모자라다.

“우리가 이곳을 버리는 순간, 저 각성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개격파 당하고 말 거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인상을 찌푸리는 서수혁 상병.

후퇴하자는 의견을 내긴 냈지만.

사실 녀석도 그 의견이 맘에 들진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판단하에 나온 제안이었겠지.’

녀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난 마땅한 대안도 없이, 현실적인 의견에 대해 안 된다 안 된다 연호하고 있는 셈.

불만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내 경우.

대안도 없이 한 말은 아니거든.

“결국. 제대로 된 방어시설이 없는 게 문제라는 거잖냐.”

“……예. 그렇죠.”

탄약대대에 비해 미약한 방어시설.

몰려 들어올 괴물들을 막기에는 부족함이 크다.

그렇다면.

“그 방어시설. 만들면 되는 거 아냐.”

“……?”

“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어시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게 그렇게 단기간에 될 일이라면 고생도 안 했-”

“아니. 아니. 내가 말실수했네.”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

“정확히 말하면, 만드는 건 아니지.”

각성 초기.

우리 부대는 운이 좋게도 남들보다 훨씬 빠른 각성을 이룰 수 있었다.

덕분에 ‘최초 달성 보상’을 우수수 달성했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때 얻었던 물건 중,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는 게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릴 만한 물건이 있거든.

“소환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이 말이야.”

[기동요새 비마나]

[기동요새, 비마나를 소환합니다.]

무려 이름부터가 요새인 녀석.

얻어 두고 한참을 썩혀 두고 있었다만.

씨익.

“슬슬 쓸 때가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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