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36화 (136/227)

136화 점령전 (4)

-무리한 짓은 하지 말라, 치프틴!

하라-발이 투석기에 몸을 담기 전.

고위 주술사는 그를 말리며 말했다.

-요새 안으로 침투하는 것은 다른 전사와 주술사들로 충분하다. 그들이 성공한다면 그대가 나설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들이 실패한다면 그대가 나서도 실패할 것이야. 일단은 기다리라. 저들이 실패하면, 후퇴한 뒤 작전을 다시 점검해야…….

-크륵.

그 말이 하라-발의 심기를 건드렸다.

분노한 하라-발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부족에서도 손꼽히는 전사이자, 차기 대전사로 여겨지는 전사가 내뿜는 기세.

고위 주술사는 상처 입은 부위가 더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주술사들은 긍지도 모르는가. 전사에게 후퇴란 없다.

-……부족의 전통을 잊었는가? 주술사의 의견을 경청하라. 치프틴.

-주술사의 의견이라. 예전이라면 확실히 경청할 필요도 있었겠지. 하지만.

강 위에 떠 있는 요새.

그리고 그 성문을 틀어막고 있는 기괴한 갑옷들을 턱짓하는 하라-발.

-저런 것들을 보고도 주술사를 믿으라니. 그대라면 가능하겠나.

-…….

고위 주술사는 속으로 한탄했다.

그들이 점성술을 통해 알아낸 정보가 틀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고위 주술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저 요새도 그렇고, 저 검은 갑옷들도 그렇고. 저런 것이 갑자기 나타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지.

-……무언가 심상치 않다. 우리의 인지를 벗어나는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저 요새 안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최대한 설득하려 한 고위 주술사였으나.

하라-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주술사들은 너무 겁이 많아.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

-치프틴!

투석기 위에 제 몸을 얹으며.

하라-발은 덤덤하게 말했다.

-정 그렇게 두렵다면. 내가 죽은 뒤에 병력을 물리시오, 주술사.

-…….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주술사는 한탄했다.

-대족장께서 살아계셨다면…….

주술사가 조언하고, 전사들이 수행한다.

오랜 부족의 전통.

하지만 이 전통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주술사와 전사의 사이를 조율해 주던, 그들의 왕.

대족장은 이제 세상에 없었으니까.

그들은.

지도자를 잃고 다른 차원을 방랑하는 꼴이 되어 버렸으니까.

-……살아 돌아오길 기원하지.

-아니. 그대는 내가 죽기를 바라야 할 것이오. 내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잘못된 정보를 유포한 것으로 모자라, 겁먹어서 도망치자고까지 한 겁쟁이를 용서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치프틴은 요새 안쪽으로 제 몸을 던져 넣었다.

* * *

각성한 뒤에 점점 키가 자라난 결과.

이제는 2미터 30센티에 달하게 된 거구의 전사.

전광일 상병.

그리고, 그런 그보다도 거대해, 거의 3미터에 근접한 초록색 피부의 괴물.

녹색갈기 부족의 치프틴, 하라-발.

쿠우웅!!!

두 거인들이 요새의 한가운데서 격돌했다.

그 여파로 주변의 땅이 흔들렸다.

“제기랄!”

“다들 빠져! 우리가 낄 전투가 아니다!”

평범한 각성자들은 물론.

군단의 병사들조차 전투로 인한 여파를 버티기 힘들었다.

쿵!

“크륵……!”

치프틴이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자.

전광일 상병은 양손의 건틀릿을 교차해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럼에도 충격을 모두 받아 내지 못해, 전광일 상병의 몸이 수 미터씩 뒤로 밀려났다.

몸이 밀려나는 것 정도야, 전투를 겪다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하지만.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은 경악했다.

‘전광일 상병님이 밀려나다니.’

‘최소한 보스 몬스터급……!’

요새에서의 전투가 시작된 뒤.

그가 처음으로 밀려난 순간이었으니까.

한편으로.

전광일 상병을 날려 보낸 괴물, 하라-발은 생각했다.

‘토착종들 중에서도 이런 강자들이 있을 줄이야.’

이번 전투의 지휘관이자.

부족 내에서도 손꼽히는 전사.

부족을 이끄는 대전사조차 그를 신뢰해, 이번 침공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런 그가, 군단의 병사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토착종들은 벌레 같은 놈들뿐이라고 생각했건만.’

[녹색갈기 부족].

그들은 강원도 북서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을 위해 태어난 종족.

그중에서도 병력으로는 한 손가락에 꼽히는 녹색갈기 부족이기에 가능했던 성과.

물론 그 점령지를 모두 안정화시켰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들의 점령지 안에도 그들을 위협할 만한 강적은 얼마든지 있었다.

‘토착종들의 병기고를 지키는 존재들이 대표적이겠지.’

가까스로 그 병기들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으나.

부족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 위협이 될 만한 적들 중에, 토착종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는 약자들.

드물게 마력을 띄는 이들조차 부족의 전사들과 비교하면 한참은 모자랐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카하하하하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요새 입구를 막고 있는 존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요새 안쪽에서의 싸움에서조차 부족의 전사들이 밀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하라-발이다.

하지만, 요새 안에 있던 토착종들은 강했다.

하라-발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간 이들조차 부족의 전사들과 비슷하거나 더 강력한 수준.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큰 전과를 올리고 있던 것이 바로 이 전사.

쿵!

하라-발의 공격이 또다시 전광일 상병에게 적중한다.

피해가 상당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크…… 크하하하! 더, 더 공격해 봐라!”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더욱 기쁘다는 듯 날뛰는 모습.

멀리서 보았을 때도 경계할 만한 강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지휘관인 하라-발이 직접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은 대체.’

녹색갈기 부족은 전투를 숭상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부족에서조차, 이 정도의 광기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에.

하라-발은 한 가지 이야기를 떠올렸다.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전설.

누구도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전사를 꿈꾸는 부족의 아이들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꿈꿨던 존재.

-광전사?

광전사는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는 죽여도 죽지 않는다.

살점이 베여나갈수록 더욱더 쾌감을 느끼며.

피를 흘릴수록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던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전사.

하라-발은 겸허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이 전사.

살려 두면, 언젠가 부족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술사가 말한 것도 거짓은 아니었군.

주술사들의 인지를 벗어난 짓을 벌이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존재가 있다던가.

‘그저 겁먹은 주술사의 헛소리라고 생각했건만.’

만약 이 전사가 정말로 그 ‘광전사’라면.

인지를 벗어나,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도 있겠지.

주술사가 말한 것도 거짓은 아닌 셈이다.

그렇기에 결심했다.

-여기서 죽인다.

콰직!

하라-발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도끼가, 전광일 상병의 어깨에 찍혔다.

아무리 전설에서나 다뤄지는 존재라고 한들.

그 재능을 모두 개화하지 못한 지금.

차기 대전사로 꼽히는 부족의 영웅.

하라-발의 적수는 아니었다.

* * *

콰직!

전광일 상병의 방어가, 기어코 뚫렸다.

괴물이 휘두른 거대한 도끼가 그의 어깨에 박혔다

본래라면 그대로 어깨를 지나 온몸을 두 동강 냈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력.

[중급 재봉사와 중급 공병의 강철가죽 강화 지휘 전투복]

-평범한 가죽이 아니로군.

군단의 공병들과 재봉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방어구.

[강철을 먹는 맥]에 의해 강화된 철판으로 급소를 보호하고.

그 위에 [강철 리자드]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전투복.

군단이 자랑하는 최고의 명품이, 그 충격을 크게 완화해 주었다.

하지만 그뿐.

“크륵!”

전투복조차, 하라-발의 일격을 모두 막아내진 못했다.

철판이 으스러지고, 가죽이 찢겨 나가며.

전광일 상병의 어깨에 박히는 거대한 도끼.

뼈가 보일 정도로 크게 베인 상처.

짜릿한 고통이 전광일의 등을 타고 올랐다.

“크, 크흐흐…….”

다른 이들이었다면, 기절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고통.

하지만 전광일 상병은.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 고통을 광기로 치환했다.

최대한으로 해방된 [광기]가 마치 갑옷처럼 전신을 뒤덮는다.

인간의 언어는 물론.

기어코 인간의 전술조차 상실한 그가 짐승처럼 몸을 날렸다.

“저, 전광일 상병님을 도와야……!”

“아서라 인마! 우리가 끼어들 수준이 아니야!”

전광일 상병, 서수혁 상병, 이민재 병장.

부대에서도 가장 먼저 각성한 이들이자.

각 조의 조장을 맡았던 이들.

그 3인은 다른 부대원들과 비교해도 몇 단계는 앞서나가는 강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전광일 상병은 남달랐다.

평상시의 그는 다른 둘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까지 강한 편은 아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이 ‘광전사’라는 것.

[광기]를 모두 해방했을 때.

그는 다른 두 조장급 병사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

그런 전광일 상병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압도하는 괴물.

군단의 다른 강자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

“젠장!”

“아무나 가서 상병님들이나 병장님들 좀 불러와!”

평범한 병사들은 그 싸움에 끼어들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지원을 요청하러 이동할 때.

전광일 상병의 머리를 채우는 감정은 단 하나였다.

‘즐겁다……!’

눈앞의 녹색 거인은 강했다.

공격 하나하나가 묵직하다.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하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등을 타고 내달린다.

‘이놈과 나!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운다!’

하지만 그런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를 채우는 것은, 희열.

‘영광스러운 죽음이, 나를 기다린다!’

광기에 잠식된 머리로, 전광일 상병은 죽을 때까지 싸우리라 각오했다.

하라-발 역시.

눈앞의 전사가 대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두 강자의 대결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쿠웅.

“크, 크크흐, 쿨럭……! 카하하하하!”

전광일 상병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전투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

그럼에도, 전광일 상병은 광소를 지으며 주먹을 내뻗었다.

-대단한 전사다.

그 앞에 선 하라-발이, 전광일 상병을 내려다보았다.

-토착종들은 약해 빠진 벌레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만, 내 오만이었구나. 전설에서나 들어 본 광전사…… 그걸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음에도, 계속해서 주먹을 내뻗는 전사.

비록 지금은 그보다 약하다고 하나.

-시간이 지난다면 대전사님조차 위협했겠지.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쓰러진 것은 하라-발이었겠지.

-운이 좋았다. 그 재능이 모두 개화하기 전에 싹을 자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르륵…….”

-……주술사가 경고한 존재도 네놈을 말하는 것이겠지. 반대로 말하면. 네놈만 죽일 수 있다면 두려워할 존재는 없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양손에 쥔 도끼를 치켜드는 하라-발.

그 거대한 도끼가, 전광일 상병의 목을 향해 내리쳐진다.

-좋은 싸움이었다. 전쟁의 언덕에서 다시 만나자, 광전ㅅ…….

도끼가 전광일 상병의 목을 베어 넘기려던.

바로 그 순간.

서걱-

어디선가.

살점이 베여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전광일 상병의 목은 아니었다.

-커, 커헉……?

녹색갈기 부족의 치프틴이자.

대전사조차 총애하는 위대한 전사.

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등을 타고 오르는 고통을 참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마는 하라-발.

-도, 도대체 무슨……!

고통을 느끼면서도 상황을 파악하려는 치프틴.

그 모습을 보며.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와. 이 자식 이거 통뼈네.”

전광일 상병, 서수혁 상병, 이민재 병장.

그들 3인은 다른 부대원들과 비교해도 몇 단계는 앞서 나가는 강자들이었으나.

단 한 명.

다른 부대원들과의 비교 대상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 남자가.

군단에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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