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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38화 (138/227)

138화 AI가 좀…….

고위 주술사는 요새의 성벽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저 안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겠지.

아마도, 주술사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을 요새.

그렇기에 후퇴를 건의했던 그였으나.

‘부족에서 손꼽히는 전사인 하라-발이라면. 어쩌면…….’

그런 생각을 놓지 못한 채.

이렇게 멀리서 요새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픽.

-…….

주술사는 한 생명의 불씨가 꺼지는 것을 느꼈다.

강자가 나타나기 힘든 그의 종족에서, 종의 한계를 뚫고 거듭난 위대한 전사.

그중 한 명의 불씨가, 지금 꺼졌다.

-낭패로다…….

부족의 침략 전쟁이 재개되고 난 뒤.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 전투.

이 전투에서의 승패는 상당히 중요했기에, 그만큼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왔으나.

그 결과는.

-전사들에게 전하라.

지휘관의 사망.

그리고.

-저 요새를 공략할 방도가 없으니, 최대한 안전하게 후퇴하라고.

부족의 패배였다.

* * *

나름 비장했던 내 각오가 무색하게도.

다른 괴물들을 처리하는 과정은 비교적 수월했다.

“뭐지?”

“뭔가, 아까보다 기세가 떨어진 것 같은데요.”

큰 부상을 입고도 아무렇지 않게 덤벼들던 괴물들이었으나.

그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주술사들과 연계하던 전술도 없고, 묘하게 우왕좌왕하는 모습.

-하, 하라발……!

“?”

그런 와중에, 몇몇 괴물들이 내 뒤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몸의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간 채 움찔거리고 있는 괴물.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녹색갈기 치프틴]이라고 돼 있었지.’

괴물들이 중얼거리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한 단어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라발.

[지휘관]

[녹색갈기 부족 워 치프틴 하라-발 VS 강철 군단 지휘관 김현석 중위]

“미친. 지휘관이었어?”

어쩐지 엄청 강하더라니!

분위기를 보아하니, 평범한 지휘관 정도도 아닌 것 같았다.

이 괴물들 사이에서 꽤 입지가 큰 놈이었던 듯.

놈의 시체를 보는 괴물마다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왜 굳이 지휘관이 직접……. 음. 직접 올 만도 했나?’

생각해 보면.

저들이 이번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요새의 안쪽을 두들기는 것은 필수였다.

지휘관이 직접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작전.

실제로 녀석이 없었으면 우리 부대는 무난하게 적들을 처치했겠지.

녀석이 있었기에, 광일이가 쓰러지는 위기도 생겼다.

‘뒤통수 갈겨 가면서 어찌어찌 처리했으니 다행이지.’

내가 나서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다른 곳에서 활약 중인 병사들도 놈에게 한 명씩 처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강한 광일이마저 쓰러트린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놈의 처치가 늦었을 때의 경우.

빠르게 놈들의 지휘관을 처치한 덕에, 적들은 우왕좌왕하며 기세를 잃었다.

결국.

“이놈이 마지막임다!”

“족쳐!”

투석기를 타고 요새 안쪽으로 들어온 괴물들.

그놈들을 모두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방심하긴 아직 일러.’

요새 성벽 밖.

성문에 막혀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할 뿐, 여전히 많은 괴물들이 남아 있다.

엄청난 숫자.

어떤 억지를 부려서 요새의 방어를 뚫으려 들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그렇게 나온다고 질 생각은 없다.

‘나도 아직 남은 수가 있으니까.’

품 안에서 쉬고 있는 까망이는 물론.

가급적 사람들 앞에서 꺼내고 싶진 않지만.

아직 동원하지 않은 뱀파이어들까지.

놈들의 다음 행동에 따라, 나 역시 숨겨둔 수를 꺼내 들어야겠지.

그러기 위해 적들의 동향을 살피려고 하던 찰나.

“놈들이 물러갑니다!”

“어?”

어떻게든 요새를 공략하려 할 것이라는 내 생각과 달리.

적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벌써?’

아직 병력이 많이 남아 있는 놈들.

패전을 확정 짓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나 싶다만.

짐작 가는 이유는 하나.

“지휘관을 잃은 것 때문인가.”

어떻게든 뚫으려면 뚫을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놈들은 지휘관을 잃은 상황이다.

제대로 된 지휘가 이뤄질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우리 요새를 공략한다고 한들, 저쪽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터.

그런 큰 피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전투를 지속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확인해 주려는 듯.

띠링.

[점령전이 종료되었습니다!]

[교전 세력]

[녹색갈기 부족 VS 강철 군단]

[지휘관]

[녹색갈기 부족 워 치프틴 하라-발 VS 강철 군단 지휘관 김현석 중위]

[교전 지역]

[대도시 (3)]

[교전 결과]

[강철 군단의 승리]

[첫 점령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첫 점령전 승리에 대한 보너스로, 보상이 지급됩니다.]

[단체 스킬 - 전쟁 노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는 메시지.

그리고.

[레벨이 상승합니다.]

[중급 요리사 Lv.30]

“……오.”

레벨업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 * *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나는 적들.

물론.

그걸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추격해라!”

“조져!!!”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적들을 상대로 치러진 이번 전투.

요새를 끼고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지.

야전이었다면 아무것도 못 하고 패배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저렇게 많은 병력이라도, 방어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

후퇴할 때.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우리는 후퇴하는 적 병력을 끈질기게 추격하며 괴롭혀 주었다.

다 추격하면 오히려 역공을 당하겠다 싶은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난 뒤에야 요새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렇게 요새로 복귀하자.

[무당 : 굉장하군……. 정말 굉장해.]

태준이 녀석이 길드 메시지를 보내왔다.

마지막까지 추격을 하면서 피해를 입힌 덕분일까.

직접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녀석이 상당히 흥분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당 : 놈들이 입은 피해가 정말 엄청나군. ……대체 어떻게 이런 결과가.]

[셰프 : 그 정도야?]

[무당 : 그 정도냐고? 네가 상상하는 이상일 거다!]

태준이 녀석은 산속에 처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

얼마 전까지는 저쪽과 정보전을 펼치느라 우리의 행보를 보지도 못했다 보니.

[무당 : 놈들은 자기들이 질 거라는 생각조차 안 했을걸.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고.]

그동안 우리 부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기도 이르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격퇴했다지만.

생각보다 놈들이 후퇴하는 타이밍이 빨랐다.

‘아마도 그 치프틴이란 녀석이 죽은 걸 알자마자 후퇴한 거겠지.’

이번에는 어떻게든 막아 냈다지만.

다음에도 우리가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무당 : 그렇긴 하다만. 놈들도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공격하는 건 힘들 거다.]

[셰프 : 음?]

금방 다시 공격해 올 것이라 생각했다만.

태준이 녀석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무당 : 놈들의 숫자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 병력을 지휘할 수 있을 만한 개체는 얼마 없을 거야.]

아.

확실히, 저 괴물 중에 특별한 강자는 드물긴 했었다.

대부분이 비슷비슷한 수준의 괴물이었지.

이번에 쓰러트린 그 지휘관 같은 녀석.

그놈이 적들에게 있어서는 생각보다 중요한 전력이었단 건가.

[무당 : 이번 공격이 실패했으니, 같은 전력으로 공략을 하려면 더 뛰어난 지휘관이 있어야 할 텐데…… 너희가 쓰러트린 놈보다 뛰어난 개체는 저들 사이에도 없거나, 있어 봐야 한두 마리 정도겠지.]

[셰프 : 더럽게 강하긴 했어.]

[무당 : 더 뛰어난 지휘관을 투입하기는 힘드니, 다시 너희를 공략하려면 몇 배는 더 되는 전력이 필요하다 판단하겠지. 그전까지는 지금 같은 요새 공략을 시도하기는 어려울 거야. 기껏해야 소규모 부대를 보내 괴롭히는 수준이 한계가 아닐까 싶군.]

이번과 같은 대규모 공세는 한동안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번 전투의 여파가 컸나 보네.’

반대로.

우리가 이번에 패배하거나, 후퇴하기라도 했으면 저놈이 이 일대를 휩쓸고 다녔을 테지.

요새니, 용아병이니.

그동안 꿍쳐 놨던 특전을 모두 쏟아부은 것으로 모자라.

‘신력’까지 동원한 덕에 참사를 막아 낼 수 있었다.

“적들도 이번 피해 때문에 주춤할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뭐. 그것도 오래가진 않겠지. 결국 서쪽에 저놈들 본진이 있다는 건 변함 없으니까.”

“끄응.”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우리가 놈들을 토벌해야 해.”

민재 형이 그렇게 말하자.

병사 중 한 명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거 뭐 안 될 것 있습니까?”

“……응?”

“저 쇳덩이들만 있으면, 어렵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부대원들의 시선이 바깥을 향했다.

요새의 성벽을 순찰 중인 병사들.

“맞네. 저것들이 있었네.”

“솔직히 저것들이 나보다 강할 것 같은데.”

[열화 용아병]의 모습이 보였다.

“저놈들. 신 병장님 말대로라면 몇 시간마다 한 마리씩 늘어난다는 거 아닙니까?”

“일단은 그렇지. 아직은 병영의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최대 200체까지가 한계긴 하지만.”

“저런 녀석들이 200체라니. 그쯤 되면 괴물들 본진이고 뭐고……!”

음.

병사들은 용아병들이 활약하는 모습만을 봤으니.

이놈들을 무슨 전천후 무적 병기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만.

“아~ 그건 좀 어려울걸.”

“예?”

한번 보면 알겠지.

나는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는 용아병 한 마리를 보며 소리쳤다.

“거기 한 마리! 이리콤.”

-…….

내 명령을 인식한 듯.

우리 앞으로 삐걱거리며 다가오는 용아병.

“오오……!”

“가까이서 보니까 더 기깔나네.”

검은 강철 갑옷으로 전신을 두른 기사.

나중에 가슴팍에 군단 마크 같은 거라도 하나 붙여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은 모습.

하지만.

멋있는 건 맞는데, 그게 다거든.

난 눈앞의 용아병을 향해, 이번에는 다른 명령을 내렸다.

“앉아.”

-…….

내가 명령을 내렸으나.

용아병은 반응이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몇몇 병사들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신 병장님…….”

“너무하시네. 얘가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앉아.’라니.”

나는 병사들의 반응은 무시하고, 다음 명령을 이어 갔다.

“손.”

-…….

“뒤로 취침.”

-…….

“앞으로 취침.”

-…….

몇 가지의 명령을 계속해서 내려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용아병.

“……봤지?”

“뭘요?’

몇몇 병사들은 뭐 하시는 거냐는 듯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으나.

눈치가 좋은 병사들은, 명령이 거듭될수록 인상을 찌푸렸다.

그중 한 명인, 서수혁 상병이 말했다.

“제한적인 명령밖에 수행하지 못한다. 이겁니까?”

“바로 그거야.”

이놈들.

와라, 가라, 공격해라, 방어해라 정도의 명령은 어느 정도 알아먹는다만.

그 외의 명령은 못 알아먹는다.

몇몇 게임에서 고용 가능한 NPC들이 떠올랐다.

어디 가서 공격하라든가 그런 명령은 참 기깔나게 수행한다만.

그 외에는 간단한 명령도 못 알아먹는 경우가 대다수인 NPC들.

“사실 전투도 비슷해. 공격은 빠르고, 방어력도 뛰어난데. 임기응변이라고 해야 하나, 전투를 이끌어 가는 센스가 없거든.”

“아…….”

“신체 스펙 자체는 버프 없는 광일이랑 비슷할지 몰라도, 실제로 맞붙으면 십중팔구는 광일이가 이길 거다.”

이놈들이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은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저 성문 틀어막기 같은 것.

좁은 곳에서 치러지는 전투는, 변수랄 게 거의 없다.

그렇기에 용아병들의 성능이 십분 발휘되었다만.

“우리가 공격을 나서는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지.”

“……아무래도 공격 측은 능동적인 상황 판단이 필수니까요.”

사실.

설명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열화 용아병]

[강대한 힘을 지닌 용의 이빨로 만들어진 용아병들은, 용들이 자신들의 창고를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최고의 수호자들입니다.]

[보물창고를 지키기 위해 탄생한 병사들인 만큼, 무언가를 방어하기 위한 전투에서 높은 효율을 자랑합니다.]

‘방어에 특화된 수호자.’

이 말대로.

공격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방어용 병력에 가깝다는 것.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놈들.

“AI가 개구려.”

병사들이 묘한 눈으로 용아병들을 쳐다보았다.

이전의 멋있는 기사를 보는 눈은 온데간데없는…….

“…….”

고철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 * *

그렇게, 전투의 뒤처리가 진행되고.

그마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쯤.

나는.

생활관의 한 방을 찾아갔다.

문을 노크하고 잠시 기다리자.

“뭐하냐?”

“아, 신 병장님…….”

방 안에서 궁상을 떨고 있던 거구.

전광일 상병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할 거 없으면 면담 좀 하자.”

간만에.

군단장다운 일도 해 봐야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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