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뭐, 그러실 것 같긴 했지.
지난번에 녹색갈기 치프틴에게 패배한 뒤.
광일이는 이전보다도 더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더 강해지고 싶단 거겠지.’
지금도 병사 중에서 가장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는 녀석.
전사조의 조장 역할을 하던 녀석이 저러니.
다른 후임들도 긴장을 놓지 못하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머릿수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니.”
“뭐. 나중 가면 아실 겁니다.”
저렇게 군기가 팍 들어가 있는 녀석들.
이번 원정에 참여한 병사들은 부대에서도 평균 레벨이 높은 편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거기에 전광일 상병.
그리고.
‘나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상행의 호위로 붙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과한 병력이다.
‘상행도 상행이지만 동맹 제의를 해야 하니까.’
이만한 전력에, 나까지 직접 나서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결국 상행이란 건 겉절이에 불과하다.
이 남자가 양구군에 있다는 그룹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니, 거기에 숟가락을 얹고자 했을 뿐.
본 목적을 따지자면 동맹 쪽이 우선이다.
‘우리가 강한 모습을 보여 줄수록, 저들도 동맹을 수락할 확률이 높겠지.’
광일이 정도면 우리 쪽 무력을 보여 주기에 딱 적당한 강자라는 거다.
사실 과거에도 다른 세력과의 동맹을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만.
하필이면 그 세력이 뱀파이어라서 무산됐다.
‘이번에는 제발 좀 제대로 된 세력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걷기를 계속했다.
각성자들이니만큼,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면서도 쉴 필요는 없었기에 이동 속도는 생각보다도 빨랐다.
중간에 몬스터들의 습격도 있었지만.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히, 히익.”
“끝났으니까. 고개 드십쇼.”
적당한 수준의 괴물들은 부대원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어갔을까.
멀리서 보이는 표지판이 하나.
[양구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
그 표지판을 보고 있자니.
광일이 녀석이 나에게 다가와 슬쩍 귀띔했다.
“신 병장님.”
“어.”
“여기서부터는 저희 영향력이 끝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우리 부대는 춘천시와 인제군에 자리 잡았다.
그 근방에는 우리 부대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는 상황.
두 도시의 사람들은 우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덕분에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숫자가 매우 적은 편이었지.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사소한 소문도 세계로 뻗어 나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약간만 멀리 이동하는 데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
같은 지역 안에서라면 모를까.
소문 같은 게 그리 멀리 퍼지지는 않는다.
실제로 우리도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으니까.
우리에 대한 것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별문제 없겠지.”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
아마, 지금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정체불명의 세력의 영향권일 것이다.
그들이 정말 우리와 비견될 만한 세력이라면.
범죄자들은 기도 펴지 못하고 있어야 정상이거든.
* * *
그런 생각을 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양구군의 표지판을 발견하고 조금 더 걸어.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멈칫.
“어, 갑자기 다들 왜……?”
나와 부대원들이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별생각 없이 걸어가던 상협만이 무슨 일인가 싶어 눈동자를 굴렸다.
대답을 해 줄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조금 지나면 알게 될 테니.
나는 앞에서 다가오는 기척에 집중했다.
저벅…….
괴물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침착한 발소리.
인간의 기척에.
“자자. 다들 거기까지.”
“어, 어어?”
건물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 명의 사람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뒤쪽은 물론.
양옆의 건물.
그 옥상 근처에서부터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들.
“어, 어느 틈에.”
모두가 상점에서 산 칼이나 석궁 따위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 대표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불량한 태도로 석궁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여길 지나가시려면 통행세를 내주셔야겠는데.”
“통행세라니?”
“이 길은 우리가 관리하고 있거든. 그 길을 쓰려면 통행세를 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이런 대사를 들어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약탈자의 토벌은 대부분 아리엘라에게 맡기고 있었으니.
비교적 여유로운 나와 달리.
던전 안에 갇혀 있다가, 바깥세상으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상협.
그는 상협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길 관리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요. 이 길에 있던 좀비나 괴물들을 우리가 다 처리했지. 꽤 힘든 작업이었어. 그러니 이 길을 쓰는 사람들도 우리 노력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 주셔야 하지 않겠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통행세 같은 걸 받는단 말입니까.”
“도로를 관리하는 국가가 망했으니, 누군가는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소. 우리도 사실은 이런 거 귀찮아. 일일이 말싸움하는 건 더 귀찮고.”
그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군복이라. 탈영병들이신가 보군.”
“…….”
“어디 부대 출신인지는 모르겠는데, 총 든 사람은 없어 보이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총알도 다 떨어졌겠지.”
상협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사방의 건물에 퍼져 있는 적들.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서른 명 이상.
“현명하게 선택합시다. 우리 중 반 이상이 각성자야. 딱 보면 아시겠지만 당신들 위치는 많이 안 좋고. 응?”
“우리도 이제 사람 죽이기 싫다고.”
“큭큭큭.”
절반 이상이 각성자라는 얘기를 듣자.
상협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있는 식량이 많지는 않습니다. 부디 이걸로.”
“클클. 진작에 그러셨어야지.”
“알고 보면 우리도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거든.”
상협은 적당히 타협해서 이 상황을 벗어나려는 듯했다.
하지만.
“쓰읍.”
가방을 열고, 전투식량 한 주먹을 꺼내 든 상협.
그의 손을 내가 붙잡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영준 씨.”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게. 전투식량을 조금 나눠 줘서 전투를 피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일 거라고…….”
뭐.
상인으로서 그런 판단을 내렸다는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누구 맘대로요?”
“예?”
“그 식량들. 우리가 투자한 거잖습니까.”
난 상협의 손에 들린 전투식량을 뺏어 든 뒤.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거기 아저씨들!”
“아, 아저씨?”
자존심 상한 듯 일그러지는 사내의 얼굴.
뭐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도로를 관리하셨으니 통행세를 받겠다는 건데.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는 건 봐준다는 겁니까?”
맘 같아선 바로 밀어 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도 탄약대대 인간의 마을에서 일종의 보호비를 걷고 있으니.
이들에게도 한 번만 기회를 주려고 했으나.
“에헤이. 그건 안 되지.”
“아까는 도로를 이용하는 대가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이미 땅을 밟으셨잖아. 이미 도로를 이용하셨으니, 후불로라도 지불은 하셔야지.”
큭.
“뭐. 그러실 것 같긴 했지.”
기회는 무슨 기회냐.
“광일아.”
“예.”
“우리가 경찰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불법적인 통행세 갈취를 목격한 상황인데. 어떻게 할까.”
“흐흐. 다녀오겠습니다.”
그 소리와 함께.
쿵!
병사들이 몸을 날렸다.
* * *
“하……. 좀 멀리 여행 왔다고 이런 일도 다 겪네.”
“대, 대단하신 분들을 몰라봤습니다. 정말이지 죄송…….”
“아니 뭐. 아저씨가 사과하실 필요는 없고.”
약탈자들을 이끌던 남자.
범재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나서는…….’
30여 명의 약탈자 그룹.
비교적 초창기에 각성한 범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룹은, 이제 막 각성자를 늘리며 힘을 키우던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물자는…….
남들에게서 얻어 냈다.
덕분에 꽤 빠르게 힘을 키웠다고 생각했으나.
‘5분도 안 걸렸어.’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았다.
10명 정도 되는 군인들이 그들 30명을 제압하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었음에도!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군…….’
한 번의 서전트 점프로 4층 높이를 뛰어 버리거나.
건물에 손가락을 박고 바퀴벌레처럼 기어올라, 고층에 자리 잡고 있던 그룹원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던 모습.
두려움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 전투에 참여한 것은 단 9명.
한 명은 원래 전투직이 아닌지, 뒤에서 벌벌 떨며 지켜보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뒤에서 채소나 손질하고 있었지.’
전투를 지켜보며, 뒤에서 양파나 손질하고 있던 남자.
엎드려 있는 범재를 깔고 앉아 있던 군인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예, 예!”
“이런 짓 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꽤 자주 하신 것 같던데.”
“그, 그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면 믿어 주실지…….”
“……너 같으면 믿겠냐?”
남자가 몸을 일으키면서 다른 부대원들에게 말했다.
“아니 뭐. 이런 거 물어보는 것도 시간 아깝네. 얘들아.”
“예, 병장님.”
“이 사람들. 어디 보자. 저 건물 1층에다가 몰아넣어 둬.”
그러자.
병사들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로 되겠습니까?”
“우리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좀 그렇잖냐. 이놈들 물건도 대충 다 압수했고.”
그 얘기에.
범재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하, 하하! 순진한 자식!’
이 군인들.
엄청 강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인 것 같았다.
그래 봐야 스무 살 언저리의 군인들.
이런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엔, 아직 지나치게 순진한 놈들이란 거겠지.
‘우리가 털고 죽인 사람들이 얼만데. 가지고 있는 게 고작 그거뿐일 리가.’
군인들에게 빼앗긴 약탈물들은 근 1주일간 모은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걸 빼앗기는 건 조금 뼈아프긴 하지만.
그들의 진짜 재산이라 할 만한 물자들은 다른 곳에 고이 모셔 둔 상태.
“아저씨들.”
“예, 예에.”
“앞으로는 나쁜 짓 하지 마시고. 어디 보자…….”
말을 멈추고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
하늘에는 노을이 천천히 지고 있었다.
“저 정도면. 음. 한 시간쯤 지나서 나오십쇼.”
“한 시간 뒤에…… 말입니까?”
“예. 그 전에 나오면 그때는 진짜로 뒈지십니다.”
“예, 예에…….”
그 말만을 남긴 채.
그들 모두를 한 방에 몰아 놓고 떠나는 군인들.
“뭐, 뭐야.”
“진짜 가나?”
군인들이 정말로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방 안에 몰린 약탈자들이 웅성거렸다.
“제기랄. 뭐 하는 놈들이야 저건.”
“……주, 죽는 줄 알았다. 진짜로.”
“그 뭐냐. 저 절에 있다는 무승들하고 비슷한 수준 아닐까?”
곡소리를 내는 약탈자들 사이.
한 남자가 말했다.
“그럼. 그만 나가죠?”
“뭐?”
“한 시간 뒤에 나가라고는 했는데. 굳이 따를 필요 있습니까?”
그런 말을 하며 문을 열려고 하는 남자.
그때.
“자, 잠깐만.”
그 손을 붙잡은 것은 범재였다.
“형님?”
“혹시. 혹시 모르는 거잖냐.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우릴 다 죽이면 죽였지. 그렇게까지 할까요……?”
“안 할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문제지. 사람이 얻어맞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야채 손질이나 하고 있던 놈이야. 제정신이 아니란 거다.”
“…….”
“그런 미친놈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한 시간 기다리는 거야 일도 아니잖냐. 조금만 참자.”
“예, 뭐.”
결국 얌전히 건물 안에 처박혀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
창밖을 보니.
천천히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한 시간 지난 거 아뇨?”
“음. 아마 조금 더 지났겠지.”
밤이 찾아오자.
몸을 일으키는 약탈자들.
“좋아, 나가자고.”
“제길. 오늘 장사는 완전 공쳤네.”
“다들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약탈할 기회가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맞는 말이다. 오늘 장사는 공쳤지만, 내일부터 다시 성실하게 뺏고 죽이고 하다 보면 되는 거야.”
“하하. 형님 말이 맞습니다. 오늘 공친 만큼 성실하게 죽이고 다녀야겠는데요.”
건실한 대화를 나누며 문으로 다가가는 사람들.
범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안녕?”
“……?”
열린 문 밖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요사한 붉은 눈빛을 가진, 금발의 미녀.
그 얼굴에 시선이 팔려 눈치채는 것이 늦었으나.
“누, 누구야. 당신.”
여자는 화사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의상.
군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그 군복은 설마, 아까 그 군인들의 동료인가?”
“우, 우리는 시키는 대로 갇혀 있었어! 약속한 시간이 지나서 나가려는 거라고!”
“성질이 급한 아이들이구나, 그래……. 일단은.”
여자는 범재를 살짝 밀며 방 안으로 들어온 뒤.
문을 닫으며 말했다.
“존댓말부터 가르쳐 줘야겠는걸.”
창밖에서 새어 나온 달빛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