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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46화 (146/227)

146화 이거 좀 싸한데.

‘이놈을 쳐 죽이는 데 5초면 충분하다.’

상대를 제압하는 선에서 그치려던 첫 의도와 달리.

그의 몸을, 광기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뭣!?”

이전에도 속도와 힘으로는 압도하고 있었으나.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움직임은, 아예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콰직!

광기에 지배당한 전광일 상병의 거대한 손아귀가, 갑옷남의 투구를 한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투구를 쥔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까드득…….

“사, 살려…….”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진 투구가 으스러진다.

투구 안 쪽에 있던 남자의 머리통이 터져버리기 직전.

“멈추시오!”

갑옷남의 뒤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그 목소리를 듣고 급하게 손에 힘을 빼려고 한 전광일 상병이었으나.

“끄, 끄윽.”

손이 그 명령을 듣는 것은 조금 늦었다.

그의 손이 투구를 파고 들어가고.

머지않아 그 안의 살을 으깨기 직전.

팍!

소리를 지른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더니.

손에 든 봉을 휘둘러 그의 손을 쳐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전광일 상병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허, 허억. 허억…….”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

어찌 되었든 간에, 덕분에 남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자.

‘내가 무슨 짓을.’

전광일 상병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뒷걸음질 쳤다.

이성을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광일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를 잡아당겨 준 사람.

신영준 병장의 얼굴이 보였다.

“신 병장님.”

믿고 맡겨달라고 한 주제에 실패한 것으로 모자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일 뻔했다.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는 전광일 상병이었으나.

“잘했다.”

탓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두들기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신영준.

“마지막에 실수한 건 조금 아쉽지만, 사실 그건 내 탓이기도 하고…… 덕분에 좋은 걸 봤거든.”

“예? 그게 무슨.”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잘했다. 쉬고 있어.”

전광일 상병은 의아해하며 뒤로 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신영준과 전광일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많이 다쳤군. 괜찮은 게냐.”

“죄, 죄송합니다. 제가 힘이 모자란 탓에.”

“됐다.”

갑옷을 입은 두 사내도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사내가 남자의 몸 위에 손을 올리자.

하얀 빛무리가 그 위에 쏟아지며 상처를 치료했다.

‘힐러! 사제 각성자인가?’

군단의 의무병.

중수가 치료를 할 때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 치곤 싸움을 말리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지.’

전광일 상병과 싸우던 갑옷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머리를 으깨려던 손을 쳐낸 그 봉술에 담긴 위력도 상당했다.

사제라기보단.

아마 전투와 치료를 병행할 수 있는 직업.

‘……성기사라던가.’

신영준 병장이 그렇게 상황을 관찰할 때.

상협은 해명을 위해 앞으로 나섰다.

“이분들은 탈영병이 아닙니다! 진짜 군부대에서 나온 군인분들…….”

“진짜 군인이라니. 군부대는 모두 전멸했다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는가! 탈영한 병사들이 총을 들고 온갖 패악질을 부린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내가 비록 졌지만, 힘만 있었다면!”

“아니. 잠시만.”

전광일 상병과 싸우던 남자는 화를 내며 반박했으나.

뒤에 등장한 남자가 그 말을 끊었다.

“저 사람들. 남쪽에서부터 올라온 것 같구나.”

“예? 아. 그랬던 것 같군요.”

“그래. 너는 남쪽 하면 생각나는 것이 없느냐.”

“……?”

“……저번 회의 때도 얘기했을 텐데. 남쪽에 큰 군부대 하나가 생존해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아.”

그 얘기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후우. 뻔하지. 듣는 척만 하고 있었던 게로군.”

“그, 그게. 죄송합니다.”

“됐다. 응급치료는 끝났다. 혹시 모르니 나중에 추가적인 치료를 받도록.”

전광일과 싸우던 남자가 뒤로 물러나고.

싸움을 말렸던 쪽의 남성이 앞으로 나서며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그 소문의 군부대에서 나오신 분들 같습니다만.”

“예! 예! 그쪽에서 온 게 맞습니다!”

“탈영병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투구를 벗으며 말을 잇는 남자.

얼굴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던 투구.

그 안에서 나온 것은…….

‘…….’

머리카락이 한 가닥도 보이지 않는.

깔끔한 대머리의 장년인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어쩌다 저렇게…….’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이었으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 절을 찾아온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예. 실은 거래를 제안드리고자…… 예?”

상황이 진정됐으니 본론을 꺼내려던 상협이었으나.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듯 말을 멈췄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 절을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물었소.”

절이라니.

그렇다는 건 저 대머리의 남자는.

‘스님, 이라고.’

스님인 것 자체는 그럴 수 있다.

산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들.

우리처럼 산속에 있는 군부대가 아니고서야.

이런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을 만한 세력은 드물다.

‘그 정체가 절의 스님들이라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하지만.

얘기를 들은 나는 고개를 돌려 상협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까.

저 사람이 스님이고.

여기가 절이라고 하면.

“상협 씨. 당신 설마.”

“…….”

“절에다가 육포를 팔자고 하신 겁니까?”

이 미친 양반아.

* * *

장사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나조차도 아는 거래의 상식이란 게 있다.

‘수요와 공급.’

뭘 팔려고 하면.

일단 그걸 살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

육식을 금하는 절에 가서 육포를 팔려고 했다니.

수요가 0인 곳에 공급만 하겠다는 뜻인데.

“……상인 맞아요?”

“그, 그게……. 이상하네요. 제가 가진 정보에는 절이라는 얘기는 없었는데.”

“…….”

그러고 보니.

아까도 이 세력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식의 얘기를 하긴 했다.

‘생각해 보니 이 양반, 아직 레벨이 10도 안 됐지.’

직업은 ‘초보 상인.’

가지고 있는 특성도 아마 최하급이겠지.

‘정보 습득 숙련이 있다고 해봐야 한계가 있다는 걸 생각해야 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절에다가 육포를 팔자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나보다도 상협이 훨씬 더 당황한 눈치였다.

‘아니. 괜찮을 수도 있나?’

이런 세상이다.

저쪽도 식량에 마냥 여유가 있지는 않을 터.

살기 위해서라면 금계 하나쯤은 빼고 고기를 구매하려 할지도 모른다.

확률로 따지면 상당히 높겠지.

‘뭐.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상행은 어디까지나 얹어가기.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다.

주목적은 동맹.

그쪽으로는, 사실 꽤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광일이가 잘해줬지.’

광일이가 진심으로 상대를 몰아쳐 준 덕분에, 갑옷남도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마지막에 광기를 켰을 때는 조금 식겁했다만.’

그건 제어가 불가능한 힘.

게다가,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녀석을 광전사로 만들어 버린 내가 문제기도 하다 보니.

‘광일이를 탓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광기를 킨 상태의 광일이에게는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

그 점이 상대의 전력 파악에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까.

‘상당히 강해.’

광일이와 싸운 남자도 물론 강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나타난 저 대머리의 스님.

‘광일이를 밀칠 때의 움직임.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앞서 싸우던 남자와 비교해도, 훨씬 더 압도적인 몸놀림.

단순히 스탯이 높거나 한 게 아니다.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술’을 사용한다는 느낌.

저 두 사람이 이 단체에서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저 정도의 인물들이 평균이라고 한다면.

우리와 비견될 만한 단체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거짓말은 아니게 되는 셈이다.

“거래라니. 무슨 거래 말입니까?”

“그게. 식량을 좀 가지고 왔는데 말이죠.”

상협이 말하자.

“식량……!”

특히 식량이라는 부분에서 눈이 크게 떠지는 스님.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그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그들을 제외한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그가 다시금 상협을 보며 물었다.

“그 말. 진짜입니까.”

“예에. 그런데 이게 좀 문제가-”

“……그렇다면.”

뭔가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 무기는 반납해 주셔야겠습니다.”

“그건 즉.”

“……주지 스님에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주지 스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식량에 대한 얘기는 비밀로 해 주십쇼.”

* * *

부대원들은 무기를 모두 내려놓았다.

우리도 잘 알지 못하는 세력.

무기를 내놓는다는 건 좀 위험한 판단이긴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무기를 든 자들을 입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저들 입장에서도 무장한 군인들을 안쪽으로 들이기는 어려울 테니.

우리 쪽에서 한발 양보해 주기로 한 것.

“여기 있소.”

“……엄청 큰 글러브로군.”

그렇게 한 명씩 무기를 반납하고.

내 앞의 광일이까지 반납을 마치자, 내 차례가 왔다.

“여기 있습니다.”

“음? 무기는 이게 전부입니까?”

“예.”

내가 그에게 건넨 것은.

한 자루의 권총이었다.

“권총이라. 하긴, 총이 있으면 다른 무장은 거추장스러울 뿐이겠지.”

“꼭 돌려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군부대에서 지급받은 물건인지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론, 내 진짜 무장은 저런 권총이 아니다.

식칼들은 모두 그림자 속에 넣어 두었다.

‘평소에 권총도 들고 다니길 잘했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나까지 무기를 내놓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무기의 반납이 끝난 뒤.

나와 부대원들은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산을 오르자, 이런저런 자재들로 보강된 넓은 벽이 보였다.

그 벽 근처를 돌아다니는 갑옷 입은 사람들까지.

그들을 지나, 절의 산문을 넘어.

그 안의 풍경을 본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절 안을 돌아다니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

원래도 좀 유명한 절이었던 것일까.

상당히 넓은 부지를 자랑하는 절이었으나, 그마저도 모자란 것일까.

곳곳에는 텐트를 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군종병 데려올 걸 그랬나?’

지금은 사제로 각성해서 ‘신이시여…….’ 같은 기도문을 외우는 녀석이지만.

우리 부대 군종병.

중수는 본래 불교도였다.

이 정도로 큰 절이라면 아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데려오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

나와 부대원들이 사람들을 보며 신기해하자.

“……사람들이 많은 게 신기한가 보군요.”

“아. 예. 조금.”

“근처의 생존자들이 보호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입니다. 모두 받아들이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요.”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인원이라니.

난 솔직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대단하다니요?”

응?

“그야. 이만한 인원수라니. 상당히 큰 세력을 일구셨다는 거 아닙니까. 순수하게 대단하다는 뜻이었는데요.”

“……아. 과연.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군요.”

뭐랄까.

스님의 반응이 조금 미묘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그 표정이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뭐지?”

산문에서 광일이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결과.

이들은 정체불명의 기술 같은 걸 익히고 있다.

아마도 소속원 한 명 한 명이 상당한 강자.

‘거기에다가 인원수까지 많다면…… 좋은 거 아닌가?’

표정이 어두워질 이유가 있나 싶다만.

“크흠.”

제대로 물어볼 틈도 없이.

헛기침을 한 그가 발걸음을 빨리했다.

“죄송합니다만, 잡담을 나눌 여유는 없습니다. 가급적 빠르게 주지 스님께 얘기를 전하고…….”

그 순간.

“승주 스님!”

저 멀리서.

누군가가 우리 쪽을 보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혹시 이럴까 봐 서두르려 했던 것인데…….”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스님이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진수 아버님.”

“승주 스님. 뒤에 저 사람들은 또 누구입니까? 또 외부인을 늘리시려고…….”

우리와 스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덩치 큰 중년 남성.

그가 우리의 면면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군복……? 설마. 탈영병들을 절 안으로 데리고 오신 거요!?”

“그런 게 아닙니다. 진정하시지요.”

“진정하라니.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소리를 지르며 스님에게 따지고 드는 남자.

“안 그래도 사람들이 굶어 죽냐 마냐 하는 판인데. 여기서 사람들을 더 데려와요!? 그것도 탈영병들을!?”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레벨이 올라가며 나름대로 마력 같은 것에 익숙해진바.

우리를 안내하던 이 승수 스님이라는 양반.

‘꽤 고레벨이야.’

아까 광일이와 싸웠던 남자가 공손하게 굴었던 것도 그렇고.

각성자들 중에서도 꽤 지위가 높은 인물일 거라 예상했다.

그런 스님한테 저렇게 강하게 나오다니.

저 아저씨가 그렇게 대단한 양반인 건가? 싶었으나.

[식재료 감별(강화)]

[홍정수]

[영장류 - 인간종]

[신선도 - 상]

그 외의 내용은 없었다.

즉.

각성자는 아니란 건데.

‘……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안감.

나는 최대한 마력에 집중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에 자리 잡은 수많은 사람.

그중에서…….

각성자로 느껴지는 기척은 매우 적었다.

산문에서 만난 이들의 강함이라면 각성자를 늘리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을 텐데.

이 숫자라.

‘멸망의 날’ 직후의 기억이 떠올랐다.

부대원들을 모두 각성시켜야 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시절의 기억.

-한 명이라도 각성하지 않고 넘어가는 사례가 생기면, 자기도 못 하겠다고 우기는 놈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올 거야.

그때.

민재 형과 나눴던 대화까지.

-각성한 병사들과 안 한 병사들 간에 마찰도 생길 수 있고. 그런 불화가 생기면, 결국 분열로 이어지겠지. 그러면…….

-부대가 약해지겠군.

상당히 강력한 각성자로 보이는 스님.

그 스님이,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눈치 보던 모습에.

스님에게 삿대질을 해 가며 소리치는 중년인.

그 모습을 팔짱 끼고 지켜보는, 수없이 많은 비각성자들까지.

“이거 좀 싸한데.”

그것도.

아주 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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