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천살성
“그래……. 일단은 대련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지.”
“대련?”
“그대에게 협박받아서 하는 일. 마음 같아서는 대충 저 대머리에게 전한 무예로 때우고 싶으나…….”
넓은 전각.
그 한가운데에는 훈련 용도로 만들어진 듯한 넓은 공간이 있었다.
“결국은 나도 무예의 길을 걷는 자. 아무리 강제로 하게 된 일이라고 한들, 허투루 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거랑 대련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무예의 길은 복잡하다. 아무런 무예를 잡고 대충 익힌다고 해서 경지에 이를 수는 없지. 모든 이들에게는 그에게 적합한 무예가 있는 법.”
“……그런 건가?”
“누구에게도 적합한 무예라는 것도 존재는 하나. 그런 무예는 아무래도 질이 낮은 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니, 어쩔 수 없지.”
그 말에 떠오르는 것은, 승주 스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항마승병무예’였다.
묘양사의 모든 사람들이 그 무예를 익히고 있었지만.
무예의 등급은 C-로 꽤 낮은 편이었지.
“보통은 스스로 실력을 쌓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무예를 찾게 되나…….”
서환이 목봉 하나를 들고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내가 직접 무기를 주고받은 뒤, 적합하다 생각되는 무예를 전수해 주도록 하지.”
그렇게 시작된 대련.
서환이 입고 있는 옷가지는 낡았고, 쥐고 있는 목봉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다.
아무리 파란색 기운을 품고 있다고 한들.
온갖 장비로 무장한 우리 부대원들을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조금 의문이었다만.
빠악!
“케흑!”
“흠. 신체 능력은 분명 뛰어나나, 능력을 다루는 기술은 처참할 정도로군.”
서환의 목봉에 얻어맞은 이병민 이병이 짧은 단말마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것 같네.
“걱정하지 말라. 그대에게 어울리는 무예가 하나 떠오르는 게 있으니.”
그 후로도 이어지는 대련.
“커허억!”
“허어. 기괴하도다.”
“으겍.”
“과연. 어째서 무예를 원한 것인지 이해가 가는군.”
훈련장의 바닥을 뒹구는 부대원들.
그들을 내려다보는 서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신기함이 담겨 있었다.
“신체 능력과 기술의 조화가 이렇게까지 맞지 않을 줄이야.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말마따나.
놈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우리 부대원들은, 신체 능력이 크게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기술.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그런 건 아니다. 타고난 기질을 보려고 했음이니. 기술이 모자란 것은 무예의 선정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 그저 의아할 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서환이 말했다.
“심, 기, 체라는 것이 있다.”
“?”
“정신. 기술. 그리고 신체. 저 셋을 성장시킴으로써 무인은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대부분의 경우에는 셋이 고르게 성장한다. 아니면 정신만이 뒤처지거나……. 그런데 그대들은 다르군. 신체 능력만이 이상할 정도로 앞서 있어. 이만한 불균형은 본 적이 없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
나야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했다.
“결국 우리가 강해진 건 시스템 덕분이니까.”
괴물을 사냥해 레벨을 올리고.
포인트를 통해 능력치 물약을 먹고.
길드 스킬, 장비 등을 통해 능력치 보너스를 얻고.
덕분에 신체 능력만 엄청나게 뛰어나졌을 뿐.
그 외에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것.
“……? 그게 뭐지?”
아, 그러고 보니.
던전이라는 단어도 못 알아듣고, 게이트 역시 이계문이니 하는 말로 표현하던 녀석.
시스템이란 단어도 아마 다른 식인 게 아닐까.
“그, 괴물을 잡아서 기운을 흡수하고, 그걸로 각성해서 직업을 얻고 하는 것 있잖아.”
“음……?”
“허공에 남들한테는 안 보이는 글자가 나와서 뭐라 뭐라 알려 주고, 그런 거. 너희들한테도 있었을 거 아냐?”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해 보았으나.
“처음 들어보는군. 남들한테는 안 보이는 글자가 보인다니. 의방을 찾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녀석들한테는…… 시스템이 없었던 거구나.’
괴물의 습격과, 시스템의 출현.
그 둘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둘은 완전히 별개.
서환의 세계는 괴물에 의해 습격을 받았으나.
시스템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한테만 시스템이 나타나는 거지?’
잠깐 생각해 보았으나.
마땅한 답은 없었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모종의 방법으로 신체 능력은 빠르게 키울 수 있지만, 그 외에는 평범한 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음. 그러한가. 확실히 내 무예를 탐낼 만한 상황이야.”
서환은 그저 처음 보는 불균형에 신경이 쓰였을 뿐.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크허억.”
“아야!”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대련이 이어졌다.
“……혹시 화풀이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내게 협박당해 억지로 무예를 전수하고 있는 화풀이가 아닐까 싶었지만.
결국 진상은 아무도 모르는 채로 대부분의 대련이 끝나고.
“대충 이 정도인가. 뭐. 대부분 자질은 무난한 편이로군.”
남은 병사는.
단둘뿐이 되었다.
* *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명의 병사.
그중.
먼저 나서기로 한 것은 전광일 상병이었다.
“잠깐.”
“예?”
바로 대련에 나서려던 전광일이었으나.
신영준 병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예?”
“다른 애들하고 대련하는 거 대충 보니까. 광일이 너, 전력으로 해도 될 것 같다.”
“전력으로, 말입니까.”
그 말에.
전광일 상병의 눈이 크게 떠진다.
전력으로 하라는 것.
그건 즉.
“광기를 최대한으로 해방하라고…….”
“그래.”
“……적과 싸울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반쯤 협박당해서 무예를 가르치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서환은 굳이 따지면 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대련은 상대의 역량을 파악함으로써 적당한 무예를 찾아주기 위해 치르고 있는 것.
그 의의를 생각한다면.
‘내보일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건가.’
그제야, 전광일 상병도 그 말을 이해했다.
“예. 알겠습니다.”
결국.
신영준 병장의 조언대로.
“호오.”
“크르륵……!”
온몸의 광기를 해방한 전광일 상병.
그가 서환을 향해, 마치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어중이떠중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나 보군.”
그 기세를 느낀 서환 역시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며 공격에 맞섰다.
병사들과 치러지던 대련 내내 시종일관 덤덤했던 서환.
그 태도는 처음 몇 합까지만 해도 변함이 없었으나.
“……맙소사!”
대련이 열 합을 넘어가는 순간.
처음으로 그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이 기운은…… 설마, 정말로……?”
대련이 지속될수록.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서환.
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로, 천살성이란 말인가.”
열 합을 넘지 않고 끝났던 기존 대련들과는 달리.
전력을 다한 전광일은 서환 역시 단숨에 끝내기는 힘들 정도였다는 걸까.
수십.
어쩌면 백에 가까운 공격을 서로 주고받은 뒤에서야, 대련이 끝나게 되었다.
“……후욱!”
“쿨럭.”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마는 전광일 상병.
광기의 여파로 인해, 승패가 갈린 후에도 여전히 그 기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크르륵.”
“어우. 야, 괜찮냐?”
“……아, 신 병장님.”
짐승같은 울음소리를 내던 전광일이었으나.
신 병장의 목소리에 그 광기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전광일 상병의 상태를 살피던 신영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역시 강제로 가르치게 됐다고 화풀이한 것 아닌가? 그래 봐야 대련인데 이렇게 패다니.”
“그 정도가 아니었으면 멈추지 않았을 테니까.”
서환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전광일 상병을 내려다보았다.
“……네놈. 대단하구나.”
“큭큭. 대단하다니. 이렇게 두들겨 패 놓은 자가 할 말인가.”
전광일 상병을 보며 중얼거리는 서환.
광기의 영향이 남아 있던 전광일 상병은 그 말에 비아냥댔으나.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내가 놀란 것은 네 강함이 아니야.”
“……?”
서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지금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하나, 지금의 네놈조차 당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아마 100번 싸우면 100번 모두 내가 이기겠지.”
“큭! 비꼬실 셈인가. 그럼 뭐가 대단하단 말이오.”
“네놈의 재능.”
“뭐?”
놀랐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가면을 쓴 서환의 옆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내 살아생전에 천살지체를 보게 될 줄이야.”
“아까부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떠들어대는 서환.
그런 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는 광일이였으나.
“네놈. 전투에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해 곤란할 때가 많았겠지. 맞나?”
“……광기를 말하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서환의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흥분이 담겨 있었다.
최고의 재능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흥분감.
“무예란, 약한 자가 자신보다 강한 자를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단련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아까 말한 심기체니 뭐니 하는 것 아니오? 그, 심 부분 얘기인가.”
“맞다. 내 종족은 태어나면서부터 강한 야성을 타고나지. 그렇기에 무예를 통해 마음을 단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놈이 타고난 천살…… 광기라고 했나? 그건 내 야성과 비슷하면서도 더 강하더군.”
“……비슷하다니. 설마.”
서환의 말에.
전광일 상병은 크게 놀라며 되물었다.
“내 광기를…… 억누를 수 있다는 말이오!?”
[광기]는 전광일 상병의 가장 큰 무기이자, 걸림돌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의도치 않게 튀어나온 광기로 인해, 멀쩡한 스님 한 분을 해칠 뻔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걸 원하는 대로 억누를 수만 있다면……!’
흥분한 전광일이었으나.
그에 대답하는 서환의 얼굴에 갑자기 그림자가 졌다.
“그래서 더욱 아쉽구나.”
“……?”
“나로서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기껏 하늘이 내린 재능을 만났거늘, 그 재능이 썩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니…….”
이 자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 *
서환의 말에 의하면.
광일이가 가지고 있는 광기는, 다른 이름으로 서환의 세계에도 존재했다는 것 같다.
‘천살성.’
안 그래도 그들 종족은 야성이 강한 편이지만.
그 살벌한 이름답게, 천살성을 타고난 이들은 평생을 미치광이 살인마로 살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하지만.
“아주 드물게, 그것을 제어할 수 있게 된 경우가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무인이 되었지.”
즉.
광일에게는 이 무예라는 것에 대한 재능이 차고 넘친다는 것.
문제는.
서환은, 광일이를 가르칠 능력이 없다는 것.
“계약을 잊었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모든 것을 바친다.
그것이 서환과 내가 나눈 계약.
그 안에는 서환이 가진 모든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가르침을 아끼려는 모습에, 나는 무력 시위를 벌여야 하나 고민했으나.
“말했지 않는가. 나 역시 아쉽다고.”
“……?”
“그 녀석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은 내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능력이 모자라서이지.”
한숨을 내쉰 그가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따라오라. 내 직접 설명해 줄 터이니.”
나와 광일이는 의문을 품은 채.
서환의 안내를 따라, 전각의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여긴?”
“무예를 담은 책들을 보관하는 장소다.”
조선시대의 도서관이 이런 느낌일까.
나무로 된 서가에는 옛날 방식으로 엮어진 책들이 수없이 많이 꽂혀 있었다.
“나는 봉술을 주로 익혔다. 그 외의 무예에 대해서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밖에 모르지. 다른 무예를 가르치려면 이 비급들을 참고해야만 해.”
“책의 양이 상당한데.”
“스승님의 취미셨지. 자기가 쓰러트린 상대의 무예를 뺏어 오는 것을 좋아하셨거든.”
……잘은 모르는데.
그거 상당히 악질인 거 아닌가?
“그런 면으로는 꽤 악명이 자자하신 분이었다. 너무 강한 탓에 남들도 차마 어쩌지 못했을 뿐.”
“…….”
그렇게 말하며 서가를 뒤지는가 싶더니.
곧 책 한 권을 뽑아드는 서환.
그 책을 바라보자.
[식재료 감별(강화)]
세상 모든 것을 식재료로 인식할 수 있게 된 뒤.
어떤 것에도 사용할 수 있게 된 내 특성.
식재료 감별이 발동했다.
[무예 비급 - 한천검 A+]
“가장 먼저 나와 대련했던 칼잡이. 이름이 뭐지?”
“이병민 이병?”
“신기한 이름이군. 아무튼, 그 칼잡이한테는 이걸 가르치면 좋을 것 같더군. 몸놀림이 둔하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좇는 동체 시력은 나쁘지 않았으니. 작은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이 무예가 잘 어울릴 거야.”
“오…….”
뭔가 대단해 보이는 느낌.
그 후로도 여러 책을 꺼내 드는 서환.
그 대부분이 A, A+급의 무예였다.
‘승주 스님이 익히고 있던 게 딱 이정도 급이었지.’
최소한 그와 비슷한 수준의 무예라는 뜻.
하지만.
‘갑자기 이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뭐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서환은 나와 광일이를 서고의 한구석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그리고…… 천살성을 위한 무예는 이쪽에 있다.”
흉흉한 쇠사슬과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거대한 철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