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무예 사범
“아무리 방심한 상태였다고 해도 그렇지.”
“……저칠을 일합에 제압하다니!”
저칠이라는 양반은 아마도 서환보다 훨씬 앞서가는 실력자였겠지.
방심한 탓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녀석을 일격에 제압했으니.
“서환……. 실력이 많이 늘은 모양이로구나.”
두 수인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예? 어. 그게…….”
“과연. 우리가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도 꾸준히 수련을 쌓아 왔다는 것이겠지. 훌륭하다. 천호 사형에게 매달리기만 하던 그 어린아이가, 이렇게까지 성장하다니.”
사형제의 성장이 기쁘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는 미호.
하지만.
“이, 이게 대체……?”
방금의 현상에 놀란 것은 두 수인뿐만이 아니였다.
당사자인 서환 역시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당황하는 눈치.
-내가 이렇게 강했나……?
라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만.
‘그럴 리가 있냐.’
서환은 그동안 이 게이트에 처박혀서 좌절한 채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실력이 늘어날 리가 있나.
그럼에도 서환이 저칠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먹여 둔 요리.
그리고.
‘길드 빨이지, 뭐.’
피에 젖은 옷 대신 입혀 둔 [강철군단]의 전용 군복.
거기에, 길드에 가입하는 순간 적용되는 엄청난 양의 길드 스킬들.
지금의 서환은.
어제까지의 그보다 족히 두 배는 강해진 상태라고 봐야겠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이런 성장을 이루어 내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어…… 예에.”
“그리고. 저칠의 입을 다물게 해 줘서 고맙다.”
“……예?”
사형제가 저 멀리에 기절해 있음에도 불구.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호.
“사형을 공격한 것을 나무라지 않으시는 겁니까?”
“널 나무랄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직접 나섰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실례를 용서해 주시길.”
“……음.”
“저칠은 입문 시기로 따지면 서환과 비슷한 아이입니다. 그전에도 어느 정도 무예를 익혔던지라 실력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정신의 수양은 조금 더딘 편이지요.”
이제는 무예의 실력 또한 서환이 앞서게 됐으니.
사형이라고 뻗대기도 어렵겠지.
“다만. 저래 보여도 저칠이 마냥 악한 이는 아닙니다. 그런 자였으면 애초에 스승님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지요.”
“저 녀석한테 두 동강 날 뻔한 사람한테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이해합니다. 저칠은 나중에 제가 잘 타이를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시길.”
공격을 당할 뻔했을 때는 어이가 없기도 했으나.
본래라면 이 여자가 말렸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풀린다.
“서환이 나서지 않았다면 네가 말렸을 거라는 말은. 진심인가?”
“네. 은공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으므로.”
“잘 선택했어.”
“……네?”
“만약 내가 여기서 죽기라도 했다면, 너희도 곧 다시 눈 감게 됐을 거거든.”
우리 부대원들이 복수를 하러 온다든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내 요리의 효과는 일시적이니까.”
아예 봉인이 걸리지 않았던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이 녀석들은 그 강함으로 인해 봉인당해 있던 녀석들.
지금이야 내 요리의 디버프로 인해 약해지고, 봉인도 풀린 상태라고 하지만.
“아마 효과가 끝나는 대로, 다시 봉인당하게 될 거다.”
“……!”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싶으면, 내가 주는 불량식품을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 이거지.”
물론, 이번에는 조금 효과가 과했던 것 같으니.
앞으로는 불량식품의 디버프도 어느 정도 조절하기는 해야겠지만.
내 말을 들은 미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은공에게 목줄이 잡혀 있는 셈이로군요.”
“뭐, 그렇게 됐네.”
이 녀석들의 봉인을 일시적으로나마 풀어줄 수 있는 것은.
현시점에서는 내가 유일할 터.
물론 100일 뒤에는 알아서 봉인이 풀리기도 하겠지만.
녀석들은 그것까진 모르는 상황이니까.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싶다면.
내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이 된 것.
“그런 은공이, 비동의 무예를 공유해 달라 하셨으니. 저희에게 선택지는 없었던 것이군요.”
“불쾌한가?”
“설마요. 처음부터 그 내용으로 협박을 해도 되는 일인데, 부탁의 형태를 취해 주신 점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럼. 부탁한 것에 대한 대답은…….”
“말씀하셨던 비동의 무예. 공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됐다!
저칠이라는 양반이 나를 두 동강 내려고 한 것은 사실이나.
지금 이들의 대표격으로 나선 미호는 나를 적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비동의 개방을 약속해 주기까지.
다만…….
그렇다고 안심하면 또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니.
확인을 좀 해 두긴 해야겠는걸.
“저칠이라고 했나? 저 사람이 한 말이 마냥 틀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예?”
“당신들, 상당히 강한 것 같은데.”
특히 방금 깨어난 3인은 원래라면 지금 세상에서는 봉인당해 있어야 할 강자.
밖에 나가면 어지간한 괴물들은 다 썰어 버릴 수 있을 터.
“과연. 왜 저칠의 말대로 이 세계를 침공하려 하지 않느냐. 그 얘기로군요.”
“힘이 있는데 쓰지 않는다……. 사실이라면 고마운 일인데 말이지.”
어디까지나 그게 사실일 때나 고마운 일이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괴물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아마 다른 괴물들도 이놈들처럼 봉인당해 있었겠지.
그리고 봉인이 풀린 뒤에는.
저 저칠과 비슷한 생각으로 침공을 나설 테고.
하지만.
미호는 침공을 선택하지 않았다.
단순히 나에게 은혜를 입어서 그렇다거나.
서환의 설득에 넘어갔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답은 간단합니다.”
“뭐지?”
그 이유는.
나로써는 짐작도 하지 못한 것.
“침공이라니……. 후후.”
가볍게 웃은 그녀가 말했다.
“그런 짓을 해 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싸움은 허망하다든가.
무소유를 추구해야 한다든가.
뭐 그런 얘기를 하려는 건가 했으나.
“저칠의 말대로. 이 세상에 천산문을 세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겁니다.”
“뭐?”
“저 황실처럼, 저희가 세상의 지배자를 자칭할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도 없겠지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욕망에 충실해 보이는 모습.
“그럼 왜?”
“저칠은…… 천산문에서 치른 마지막 싸움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
“그것보다 한참 전에 치른 싸움에서 큰 상처를 입고 기절한 상태였지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그이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모른다니.
뭘 모른다는 거지.
“저희가 아무리 날뛰어 본들…….”
말을 잇는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언젠가 나타날 거마(巨魔)의 파도 앞에서는, 개미처럼 짓밟히고 말 운명이라는 것을…….”
* * *
천산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쟁.
“그곳에 나타난 괴물들은, 하나하나가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이었습니다.”
어쩌면…….
신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적들.
그들이 세계를 파괴하고자 나섰을 때.
그 악에 맞서 싸운 최후의 전장이.
이곳 천산이었다.
“저희 역시 그 싸움에 나섰지요.”
지상의 생명체들 중 제일로 꼽히던.
천산문의 스승.
세계의 법칙을 관리하는 위대한 수호자.
천상의 대라신선들.
그리고…….
천상의 황제와.
그 친위대들까지.
“모두가, 그 거악의 파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이곳 천산에 강림했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나는 고개를 돌려.
전각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산산조각이 난 채 파괴되어 버린 세계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처참한 패배.’
이 세상은 조각조각으로 파괴되어 버렸으며.
그 파편 중의 하나가, 우리 세계로 흘러들어 왔다.
“저칠의 말대로 한다면…… 확실히, 짧은 시간 동안은 이 세계의 패권을 잡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요.”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을 발아래 무릎 꿇게 하고.
위대한 영화를 쌓아 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쌓아 올린 영화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말을 잇는 그녀의 눈에는.
공허함만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잿더미가 되어 버릴 영화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이것이.
그녀가 저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이유.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조각난 채 파괴된 이 세계에 숨어서 짧은 평화를 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은공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예의 전수라고 하셨지요.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지만……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몸. 남은 생을 사형제들과 함께 보낼 수만 있다면. 진정한 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무예 따위, 얼마든지…….”
도대체 얼마나 강한 괴물들이었길래.
이 정도로 절망한 걸까.
“은공께서도 어떠십니까. 저희와 함께 이곳에 숨어 지내시는 게.”
“여기에?”
“예. 조각조각 나 버린 탓에 그다지 넓지는 않습니다만, 은공 한 분 정도야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그녀의 제안은, 순전히 선의에서 이루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일단 부딪쳐는 봐야지 성이 풀릴 것 같아서.”
“이해합니다. 직접 저항하고 깨져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부질없는 저항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호.
“제 눈을 뜨게 해주신 것에 더불어, 다른 사형제 분들 또한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하셨으니…… 저 미호, 힘이 닿는 곳까지는 은공을 돕도록 하지요.”
“그래 봐야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
“부질없는 저항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전력을 다하고 난 뒤에 실패를 해야, 비로소 집착을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힘이 닿는 곳까지는 돕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듯.
[강철군단에 가입을 희망하는 인원이 있습니다 (1)]
[수인종 무예 사범]
[미호]
“……!”
길드의 가입 문구가 나타났다.
“이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력을 다해 돕겠노라고.”
서환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그녀.
“막내를 혼자서 보내는 것도 도리가 아니기에.”
“사, 사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트레이너 NPC가 두 배……!’
부대원들이 무예를 익히는 시간도 두 배로 빨라질 것이라는 뜻.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내게 협력하든 간에.
나로서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용해 주면 그만.
“그러면 일단은…….”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비동으로 가시지요.”
* * *
“시, 신 병장님? 이 사람들은 대체.”
“그럴 만한 일이 좀 있었거든. 아무튼 따라와.”
갑자기 나타난 미호를 보고 당황한 눈치의 광일이.
그를 데리고, 무예 서적을 보관하는 서가로 이동했다.
“광일아.”
“예. 병장님.”
“너. 나한테 민폐 끼치는 거 싫다고 그랬던가?”
“……예? 아. 그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이냐는 듯.
어리둥절한 채로 대답하는 전광일 상병.
난 녀석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어쩌냐. 이번에는 내가 너 때문에 고생 좀 했거든.”
“……예!?”
내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광일이 녀석.
씨익.
“그러니까. 앞으로 더 잘해. 인마.”
“시, 신 병장님? 그게 무슨……!”
그리고.
서가의 구석.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비동의 문 앞에 선 미호가, 허리춤에 찬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칼을 움직이는 그녀.
이윽고.
철문 앞에 선 그녀가 작은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서환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미호 사매는 본신의 무예 실력은 낮은 편이나…… 본문에서의 위치는 꽤 높은 편이시다.
-음? 이유가 있나? 뭐, 그 스승이란 양반의 딸이라든가.
-설마. 본문은 철저한 실력 지상주의.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실력지상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임에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다는 여자.
미호.
그 이유는 간단했다.
-미호 사매의 머릿속에는…… 본문이 보관하고 있는 모든 무예가 들어 있다.
-……!
-그 지식을 통해 새로운 무예를 창조하는 일에도 이골이 난, 천산문 최고의 지능이시지.
그렇기에.
미호은 천산문에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직위를 맡고 있었다.
-무각주.
무각이라 함은.
무예를 보관하고 있는, 바로 이 서재를 일컫는 말.
‘이 서재의 주인이라는 뜻.’
그녀는 이곳에 있는 모든 무예를 알고.
그 무예를 통해 새로운 무예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일종의 연구실장.’
그리고, 무각주라는 말은 즉.
천산문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예.
그 무예들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
그래.
-비동에 있는 무예 역시 마찬가지다.
촤르르륵…….
“……!”
비동의 앞에서 검무를 추는 미호.
그 검무에 맞춰.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의 쇠사슬들이, 스스로 풀려난다.
화르륵.
비동을 봉인하고 있던 거대한 부적들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고.
끼이익.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철문이.
스스로 그 입을 열었다.
천산문의 봉인된 무예를 보관하는 장소.
비동으로 향하는 길이.
지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