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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64화 (164/227)

164화 밤의 귀족 (2)

신영준 병장이 게이트에 입장하기 전.

아리엘라는 생각했다.

‘본녀가 이 안에 따라갈 필요가 있나?’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고 하니.

딱 봐도 오래 걸릴 일 같고.

장막 너머에 느껴지는 힘은 강하긴 하지만.

강철의 마수인 ‘맥’보다는 약했다.

시간 낭비가 싫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신영준의 권속이 되기로 한 것은 그가 넘겨주는 은총…….

그러니까, 밥 때문.

아무것도 안 하면서도 매끼 맛있는 피를 먹을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잘만 활용한다면…… 다음 작위를 노려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최근에 준남작에서 남작으로의 승작을 이룬 그녀.

그녀는 주인인 신영준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많은 부분에서 성장을 이뤘다.

안 그래도 상승 욕구만은 넘쳤던 그녀.

한번 계급의 상승을 이루어 내자, 그 쾌감을 쉽게 잊기 힘들었다.

뭣보다…….

‘조금은 열심히 일해야 간식도 챙겨 주고 하시는 거 아니겠어.’

그렇기에, 주인에게 제안했다.

잠시 자신의 자유 행동을 허락해 달라고.

주인을 설득하기 위한 말은 간단했다.

‘최근에 남작으로 승작하면서 생긴 변화가 몇 가지 있는데요.’

‘……뭐지?’

‘권속으로 삼을 수 있는 개체 수가 늘어나고…… 또, 권속으로 만들 수 있는 종족의 범위가 조금 넓어진 것 같아요. 음. 최근에 만난 괴물 중에 예를 들면.’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신영준 역시 크게 놀라며 그 행동을 허락했다.

‘그 녹색피부 돼지들 정도?’

그렇게.

카르슈타인 혈족과 녹색갈기 부족의 전쟁이 결정되었다.

* * *

부족원들의 관리를 맡은 상위 계층의 전사.

하르잔은 아침부터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크르륵……. 지난 밤에 전사들이 10명 넘게 사라졌다!

그 분노의 원인은 다른 게 아니었다.

-멍청한 놈들! 또 제멋대로 순찰 구역을 벗어났다가 길을 잃은 거겠지!

녹색갈기 부족의 전사들은 매우 빠르게 성장한다.

하지만 그런 만큼, 몇몇 개체를 제외하면 육체에 비해 정신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전투에 있어서 그 숫자는 그야말로 폭발적이나.

평상시에는 지독할 정도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종족이기도 했다.

-조사는 하지 않는 건가? 하르잔.

-크륵! 멍청한 놈들이 명령을 어겨서 생긴 사고일 게 뻔한데, 조사는 무슨 조사!

-그럴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하룻밤에 열씩이나 되는 전사가 사라진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한 번에 사라진 이들은 많아 봐야 셋 정도였다.

-이상한 건 그놈들 머릿속이겠지! 지금은 마수들의 뱃속에 들어가 있을 놈들을 내가 왜 신경 써야 하나!

-……흠.

하르잔은 그 전사들이 개별 행동을 하다가 마수에게 사냥당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마수는 계속해서 세상에 풀려나고 있고, 그 양도 워낙 많다.

일대의 패자가 된 녹색갈기 부족 역시.

영토 내의 마수들을 모두 제거하진 못했다.

그로 인한 사고가 하루가 다르게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

‘허나 기묘하다. 고작 이틀 전에도 이 일로 하르잔이 분노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어린 전사들이라고 한들, 고작 이틀 만에 또 사고를 칠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노회한 주술사인 하카진은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혹시 모르니. 조사를 해 봐야겠구나…….’

본래라면.

이런 일은 주술사들의 예언을 통해 해결한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는 주술사들의 예언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안개를 걷어 내는 데 성공했거늘.’

많은 주술사들의 협력으로 그 존재의 방해를 치우는 데에 성공했으나.

얼마 전 치러진 대규모 침공 전쟁에서.

그들 부족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냥 패배하기만 했다면 다행이지만.

많은 주술사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문제.

그들의 예언은 다시 안개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녹색갈기 부족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발로 뛰는 수밖에.’

하카진은 사라진 전사들이 맡았던 순찰 경로를 되짚었다.

정말 그들이 제멋대로 경로를 이탈했다고 한들.

그 흔적을 더듬는다면 유해 정도는 찾을 수 있을 터.

그런 생각으로 조사를 시작한 하카진.

그런데.

-음?

조사를 시작하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하카진은 주변의 공기가 이상함을 느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설마!

하카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녹색 피부의 주술사가 급하게 땅에 손을 가져다 댄다.

-정령들이여!

그들의 고향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만큼.

이질감이 느껴지는 흙에는 주술이 잘 통하지 않았으나.

-이 땅의 기억을, 나와 공유해다오!

그와 계약을 맺은 대지의 정령들.

그들이 어떻게든 이 땅의 기억을 읽어 그에게 전해 주었다.

* * *

-크워어어……!

주변을 순찰하던 녹색갈기 부족의 어린 전사.

그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존재.

그것을 어떻게든 떨쳐 내려고 날뛰어 보는 전사였으나.

“후후……. 죽음이 두려운가 보구나.”

-크륵, 컥…….

“걱정하지 마라, 아이야. 이것은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것은.

전사에 비하면 가녀리기 그지없어 보이는 존재.

하지만.

그 작은 몸에서 나오는 힘은, 전사의 그것을 월등히 압도하고 있었다.

결국.

전사의 저항은 맥없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중얼거리는 작은 여인.

“본녀가 네게 선사하는, 두 번째 삶일지니…….”

* * *

-허억, 허억……!

여기까지가.

정령이 하카진에게 전달해 준, 땅의 기억.

그 기억을 살핀 하카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터,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대한 마(魔)로구나.

직접 그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

노련한 주술사인 하카진이었으나.

그런 그로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이 세계는 침공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 정도의 존재가 지상을 활보하고 있단 말인가?

사실.

그의 의문은 합당한 것이었다.

밤의 귀족은 무한에 가까운 군세를 부리는 종족이다.

비록 혈족의 말예라고는 하나.

그 일원인 아리엘라 역시, 매우 강력한 존재인 건 마찬가지.

본래라면 100일은 더 잠들어 있었어야 정상이었겠지.

하지만.

하카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어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의가, 인간의 무력을 제압하기 위해 그녀의 봉인을 강제로 해제했다는 것.

둘째.

그로 인해 그녀는 머릿속에 강력한 주박이 새겨진 채로 한 벙커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는 것.

그리고 셋째.

그 주박에서 벗어날 힘을 키우기 위해, 군세를 외부로 내보낸 결과.

그녀는 한 토착종의 무리에 의해 토벌당했으며.

그 무리를 이끄는 취사병에 의해…….

그녀를 지배한 주박 역시 해제되었다는 것.

벙커에 갇혀 있던 시절의 아리엘라는 본연의 능력을 상당 부분 제한당한 상태였다.

권세를 늘리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어렵고 복잡해져 버린 덕에.

그녀의 군세는 밤의 귀족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적고, 나약했다.

하지만 지금.

이제 그녀를 가둬 두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본래라면 수백 일은 더 봉인당해 있어야 했을 규격 외의 존재.

태양을 제외하면 그 군세를 당해 낼 자가 없다고 여겨지는 종족.

밤의 귀족이.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하기 시작했다.

하카진은 직감했다.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부족에 큰 위기가 찾아오겠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이 땅의 기억으로부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하카진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일단 일대의 부락을 관리하는 상위 전사.

하르잔에게 이를 알려야 한다.

그 후에는 대전사와 대주술사를 찾아간 뒤.

거악에 대비할 방법을 부족 단위로 논의해야…….

“발걸음이 무척이나 빠르구나.”

-……!

“급히 가야 할 곳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하카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이곳을 찾아오는 것과.

정령을 통해 땅의 기억을 읽는 것까지.

시간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된 결과.

‘달…….’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밤이 찾아왔고.

“바쁜 건 알겠지만, 본녀와 잠깐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떻겠느냐.”

밤의 주인이 그를 찾아왔다.

-저, 정령들이여!

“음? 단둘이 얘기하는 건 민망하다는 건가. 후후. 귀엽기는.”

-저 악귀를 제압해다오!

대지의 정령들이 하카진의 부탁에 부응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정령들은, 아리엘라의 피부에 닿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크뤄어어어억!!!

-……쿨타르! 타구진까지!

어둠 속에서 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 정령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이들.

그들의 정체는, 하카진의 동족.

녹색갈기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나.

그들의 고향.

푸른 초원을 떠올리게 하던 녹색 눈동자.

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

-아, 아아…… 이럴 수가.

“너무 부러워하지 않아도 좋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습한 숨결.

하카진은 몸을 벌벌 떨며 눈을 감았다.

“너도 곧 우리와 함께하게 될 테니.”

그 몸의 떨림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잠시 뒤.

-주인님께, 영광을…….

정령들의 목소리를 듣고, 부족원들에게 존경받는 주술사.

부족의 지도자들과 위대한 선조들을 제외하면 고개를 숙인 적도 없던 그가.

이계의 여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 * *

“과연. 네놈들의 언어는 이런 식인가 보구나. 돼지 같은 생긴 놈들답게 참으로 허접한 구조로구나. 나로서는 발성하기도 힘들겠어.”

-정말이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어쩔 수 없지. 네놈 같은 야만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언어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니.”

주술사의 피 안에 녹아 있던 지식.

그 파편이 아리엘라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녹색갈기들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를 찾은 게 예언을 통한 것은 아닌 게 확실하겠지?”

-예에. 저희의 눈을 가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안개를 걷어내는 것은 지나치게 고단하여…….

“휴우. 벌써 들킨 건가 했는데, 아니라니 다행이야.”

아리엘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대로구나.”

농담이 아니라.

아리엘라는 정말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직 군세를 늘리기 위한 작업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벌써 존재를 들켰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발을 뺄 수밖에 없었겠지.

“그럼. 이제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얘기해 보거라.”

-어떤 정보를 말씀하시는지……?”

“쯧. 다른 짐승들에 비하면 똑똑한 편인가 했더니, 눈치가 없는 점은 비슷하구나. 홀로 돌아다니고 있을 만한 놈이 있는 곳. 슬쩍 모습을 감춰도 문제가 없을 만한 녀석들. 위험한 강자들이 몰려 있어 접근하면 안 되는 곳. 혹은, 너희들의 급소 같은 장소. 뭐라도 좋다. 아는 게 있느냐?”

녹색갈기 부족의 오르크들은 높은 긍지를 타고난다.

본래라면 어떠한 종류의 협박도 듣지 않는 종족.

심지어는 신영준 병장의 요리마저도 그를 완벽히 굴복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나.

-……정도가 있습니다.

“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정보로구나.”

-영광이옵나이다…….

권속이 되어버린 하카진에게는 저항할 의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본래의 성정과는 무관한, 절대적인 복종.

밤의 귀족이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점이었다.

-근처 부락을 관리하는 것은, 상위 전사인 하르잔입니다…….

“그렇구나. 약점이라 할 만한 점은?”

-그는 매일 밤 소수의 전사들을 이끌고 마수 사냥을 나섭니다……. 제가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말려보았으나, 전투를 숭상하는 전사답게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이더군요.

아리엘라는 하카진의 말에서 작은 감정을 찾아냈다.

“네 조언을 듣지 않았다는 게로군.”

-……예.

“그 이유가, 정말 전투를 숭상해서일까?”

-……아니겠지요.

그러자.

주술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감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놈들은 태생부터가 멍청하게 태어났으니……! 뇌마저 근육으로 채워진 녀석들이, 자신들의 우둔함을 속이기 위해 꺼낸 변명이 전투를 숭상한다는 말일 겁니다. 현명한 자의 조언을 알아먹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것들……!

“쌓인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지난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술사들은 퇴각을 권했는데도, 전사인 하라-발이 전투를 감행한 끝에 벌어진 참사……! 실로 벌레만도 못한 지능이 아니겠습니까. 대족장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거늘.

그 추악한 감정을 목격한 아리엘라는 기쁜 웃음을 지었다.

“네 말대로. 참으로 어리석은 녀석들이로구나. 그렇다면, 똑똑한 네 조언을 무시한 그 전사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끔찍한 일을 겪고 난 뒤, 제 말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어야 하겠지요.

“후후……. 좋은 대답이구나.”

그녀가 손짓하자.

하카진의 뒤로, 권속이 된 녹색갈기의 전사들이 나열했다.

“네 조언을 무시한 이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을 네게 빌려주마.”

-그 말씀은?

“똑똑한 너라면, 그 전사가 충분히 후회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지?”

-아아! 물론입니다!

주인의 은총에 감격한 주술사가 과장되게 몸을 숙인다.

그리고 그날 밤.

아리엘라의 권속 중에는, 꽤 강력한 전사 한 마리가 포함되었다.

그 전사가 관리하던 일대의 부락이 모두 몰락하기까지.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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