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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67화 (167/227)

167화 광전사 (1)

쿠웅……!

-아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분하도다……!

은신처 안에서 치른 전투는, 아리엘라의 예상대로.

뱀파이어들의 패배로 끝났다.

그녀의 권속이 된 이들은 오히려 생전보다도 강한 힘을 얻지만.

그럼에도 숫자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바깥에 태양이 펼쳐진 상황에서는 탈출조차 불가능하니, 압도적인 숫자의 군세를 상대로 불리한 전투를 치러야만 했고.

그 결과.

그녀가 그동안 쌓아 올린 권속의 대부분이 심장을 뽑혀 재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로 돌아간 전사의 뒤에 서 있던 여인을 보고.

-네놈이었구나……!

권속들을 대부분 처치한 주역.

대전사가 이를 갈며 말했다.

-크륵……! 잘도 동족들을 가지고 놀아 줬구나, 사악한 마녀야.

최근 부족을 덮친 커다란 악재.

그 대부분은 이 한 마리의 괴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가 후방에서 암처럼 몸덩이를 키움으로써, 약해진 그들 부족을 토착종들이 공격해 들어온 것이었으니.

그로 인해 부족은 쌓아 올린 영역의 절반가량을 상실해야만 했다.

그 땅과 감응하던 정령들과의 연결이 끊겼고, 부족의 힘도 조금은 약화되었다.

터무니없을 정도의 피해.

‘그 피해를 입힌 거악의 실체가, 고작 이런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존재였을 줄이야.’

그를 무엇보다 화나게 하는 것은.

그녀에 의해 세뇌된 그의 동족들.

그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선조도, 정령도 아닌 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스러져 갔다는 점이었다.

대전사의 기세가 분노로 일렁거렸다.

“가지고 놀기는 했지. 하지만 너무 화내지는 말거라.”

그러거나 말거나.

아리엘라는 머리를 매만지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저 아이들도 충분히 행복했을 테니.”

-뭐라……?

“본녀 같은 고귀한 존재가 저딴 짐승들과 놀아 준 것이다. 짐승들의 입장에서는 저승에 가서도 자랑하고 싶을 일 아니겠느냐.”

명백한 조롱.

이를 듣고도 참고 있을 만한 존재는 거의 없겠지.

———!!!!!

분노한 대전사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날렸으나.

“야만스럽기는…….”

[안개화]

아리엘라의 몸은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뱀파이어들에게 두 번째 목숨을 보장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강력한 특성.

이 특성 탓에, 녹색갈기 부족의 전력이 압도적임에도 토벌에는 긴 시간이 들어야만 했다.

평범한 권속들의 것도 그 정도였는데.

그 주인의 것은 오죽할까.

“착각하지 말거라.”

-도망치지 마라-!

“너 하나뿐이었다면, 너 또한 친히 내 강아지로 만들어 주었을 테니.”

지나치게 큰 숫자의 차이.

그것만 아니었다면, 저 녀석의 피 맛을 봐주었을 텐데.

아리엘라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동굴 밖으로의 탈출을 감행했다.

-어딜……!

대주술사가 주술을 발동해 그 안개를 붙잡으려 했으나.

-주인님을 방해하지 말라.

-……자네는 설마. 하카진! 그토록 현명했던 주술사마저!

마지막 순간까지 숨어서 신중하게 상황을 관망하던 하카진.

그가 내뿜은 주술이, 대주술사를 방해했다.

주술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 아리엘라가 빠르게 동굴을 벗어났다.

새벽부터 시작된 공격.

하지만 그녀의 권속들도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안개화까지 써 가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명령했으니까.’

바깥의 태양은 이제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잔잔한 노을빛이 피부에 닿자.

“크으윽……!”

온몸이 불타 들어가는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으나.

저물어가는 태양은, 그녀를 죽일 정도의 빛을 내뿜지는 못했다.

어떻게든 적들의 포위를 빠져나온 뒤.

그녀가 녹색갈기의 괴물들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던 상당한 병력도, 절반가량이 줄어 있는 상태.

거기에 이제까지 후방을 교란하며 그녀가 직, 간접적으로 해치운 숫자 또한 어마어마할 터.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지?’

실제로.

권속들을 모두 잃었음에도, 그녀의 격은 아득하게 상승해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로서는 해야 할 일을 다 한 셈.

그러니 나머지는…….

‘주인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뭐~’

그녀는 최대한 빠르게 녹색갈기의 영역에서 몸을 빼기로 했다.

한번 이만한 분탕질을 쳐 놓았으니.

아무리 야만스러운 짐승들이라고 한들.

학습능력이란 게 있는 이상, 다시 그녀의 침투를 용납하지는 않을 터.

괴물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

본래라면 밤의 귀족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었지만.

아리엘라에게 있어서, 이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

‘후후……. 이만큼 열심히 일해 놨으니. 특식…… 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 정도는 챙겨 주시겠지?’

그녀의 주인이 약속한.

공로에 합당한 보상…….

“어쩌면…… 저놈들 아까 본 전사 놈의 피를 먹여 주실지도. 후후후.”

즉.

밥 생각뿐이었다.

* * *

-도망치지 마라—-!!!

괴성을 지르는 대전사였으나.

그 소리를 들어야 할 대상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난 뒤였다.

-쫓아간다!!! 저 저주받을 벌레의 목을 따러…….

-진정하라, 대전사.

흥분한 대전사.

그를 진정시킨 것은, 노회한 대주술사였다.

-적의 수괴를 처치하지 못한 것은 아쉽긴 하나…… 이걸로 영토의 후방은 안정화되었다.

-저놈을 잡지 못한 이상, 언제 다시 같은 짓을 할지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런 짓은 내가 용납하지 않지.

통.

대주술사의 지팡이가 바닥을 치자.

대지의 정령들이 그에 감응해 고개를 끄덕인다.

-정령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한, 다시는 같은 장난은 치지 못할 터.

-……허나. 녀석은 우리 동족들을! 전사들을 모욕했다!

-나 또한 오랜 친우인 주술사를 잃었다. 분한 건 마찬가지. 하지만…… 언젠가는 저 마녀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길 터. 복수는 그때 해도 늦지 않다.

-……후욱.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젊은 대전사. 분노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아둔하진 않을 텐데?

-……그렇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대전사.

그가 주변의 전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강대하던 거악이, 우리 전사들의 힘에 굴복해 도망쳤노라!

-크워어어어어어어어!!!

-그러니 이제!

그의 시선이.

저 먼 곳을 향했다.

-거슬리던 토착종들을 정리하러 간다!

발걸음을 옮기는 대전사.

그 뒤를, 전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 * *

후방을 정리한 녹색갈기 부족.

그들의 역공이 시작되자.

각성자들은 빼앗은 영토의 방어에 나섰다.

묘양사, 춘천시의 각성자들, 거기에 군단까지.

3개의 세력이 하나의 부족을 상대하는 싸움이었으나

놀랍게도.

“커헉……!”

“제기랄, 부상자다! 후방으로 옮겨!”

“치료사들도 마나가 다 떨어져 간답니다!”

우세한 쪽은 녹색갈기 부족이었다.

사실 당연한 얘기였다.

전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엄청난 숫자는 물론.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결코 약하지도 않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내정에는 취약할지언정 침공에는 이골이 나 있는 전사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강하군.”

녹색갈기 부족이 열세에 놓였던 것은.

그전까지는 사방이 포위된 채 공격당하는 형태였기 때문.

그중에서도.

후방을 교란하는 뱀파이어들의 세력이 가장 큰 핵심이었다.

뱀파이어가 사라지자.

4면 포위에서 3면 포위로 바뀐 전황.

그 차이는 상당했다.

상당한 병력을 잃었을 것임이 분명한 녹색갈기 부족임에도.

그 3면의 전선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게 되었을 정도로.

‘조금 유리하다 싶을 때는 생각보다 별거 아닌가 싶었다만……. 결국은, 영준이가 굴복시킨 뱀파이어 덕에 가능했던 일이란 건가.’

그 차이를 감안해도, 이전에 비해 전투가 너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

적진의 한가운데서 괴성을 지르는.

3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구의 괴물.

“제기랄. 피어다!”

“또 저 녀석인가……!”

지금까지 군단이 상대한 적 중에 저보다 더 거대한 적은 있었지만.

저보다 강력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녹색갈기 부족의 대전사.

카르가라.

그가 손에 쥔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자.

“커헉……!”

“이한일 상병님!”

그를 상대하기 위해 나선 군단의 정예 병사 셋이, 피를 토하며 날아간다.

그 모습에 군단의 병사들은 불안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동안, 대전사는 뱀파이어의 토벌에 집중한 나머지 각성자들과의 전선에 나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역공에 나서게 된 지금.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장에 나타나, 각성자들을 상대로 무쌍을 펼쳤다.

“……맛있게 생긴 적이네요.”

“어어, 막내다!”

“쟤 또 괴물 먹으려고 한다!”

“도와!”

군단에도 규격 외의 강자가 없지는 않았다.

‘이상식욕자’라는 직업을 가진 이현진.

그녀가 다른 고레벨 병사들과 힘을 합쳐, 어떻게든 대전사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으나.

-하하……. 젊은 대전사가 드물게 신난 듯한데, 방해하면 안 되지.

“……!”

후방에서 대기하던 대주술사.

쿠르단.

그가 대지의 정령들과 교감해 대전사를 보조하니.

대전사의 횡보를 잠깐 저지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이 되냐고, 이게.”

각성자들로서는.

그야말로 거대한 벽을 마주한 듯한 기분.

“제기랄…….”

“신 병장님만 계셨더라면!”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병사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영준이에게 의존하고만 있었던 거다.’

그동안.

군단에는 지금보다 더한 위기가 수없이 많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 정도의 세력을 이룬 것은, 모두 신영준과 그의 요리 덕분이었다.

“춘천시 각성자들은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후퇴하겠답니다!”

“묘양사 스님들도…… 숫자가 적은 자기들로서는, 여기까지고 한계라고.”

“저희도 더는 못 버팁니다! 다른 두 세력이 남아 있다면 모를까. 저희만 남는다면 적들의 모든 화력을 감당해야 할 겁니다!”

아무리 그가 자리를 비웠다고 한들.

그가 직접 만들어 준 전투식량도 있는데, 바로 이 꼴이라니.

‘짜증 나는군.’

이민재 병장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영준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놈들이었냐!”

“……그, 그건.”

“아닙니다!”

적들의 공격이 매섭기는 하다.

기껏 이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왔건만.

요새에서의 방어전을 이겨 냈던 과거와 달리, 이렇듯 제대로 된 방어 설비가 없는 곳에서의 전투는 부족함이 많다는 것.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기에 오히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적들의 영역에 이렇게까지 깊숙이 파고든 상황이다.

신영준의 뱀파이어가 토벌된 지금.

만약 물러난다면.

언제 다시 이곳까지 쳐들어올 수 있을지 모른다.

후퇴한 뒤에 다시 이곳을 탈환하려 할 때는, 글쎄.

지금보다 수십 배는 어려운 싸움을 해야만 하겠지.

파지직…….

이민재 병장의 피부를 타고 푸른 전기가 일렁인다.

콰릉!!!

번개가 내리치며, 한 무리의 적을 숯덩이로 만든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병사들.

그 병사들을 보며, 이민재 병장이 소리쳤다.

“최대한 버틴다!”

“……!”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

후퇴가 아닌 다른 명령에, 많은 병사들이 당황했으나.

눈치 좋은 몇몇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 병장님 일행이 출발했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거겠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번개의 창을 쥐는 이민재 병장.

“그 정도는 해 줘야, 쓸모없는 녀석들이라는 소리는 안 들을 수 있을 테니까.”

“하하……. 뭐, 신 병장님이 그런 소리를 하실 분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확실히, 쓸모없다고 생각되고 싶지는 않군요.”

그렇게.

군단의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사투를 시작했다.

전차의 포화가 빗발치고.

사수들의 사격이 전장에 붉은 궤적을 그린다.

“커허……!”

많은 병사들이 치명상을 입고.

치료사와 사제들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피해가 나오면서도.

“버텨라!”

군단의 병사들은.

전선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영겁과도 같은 고통의 싸움이 이어지고.

“……하, 하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신 병장님이다!”

“신영준 병장님이 오셨습니다!”

구원군이 도착했다.

“민재 형?”

“영준아……. 어떻게든 버텼다.”

마력을 과도하게 끌어 쓴 탓일까.

이민재 병장의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전장에 도착한 신영준 병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녹색갈기 부족의 영토에는, 군단병들이 활용할 만한 어떠한 방어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상태.

그럼에도,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압도적인 숫자의 부족을 막아내고 있었다니.

“……대단하네. 이런 상황에서 여기까지 버티다니. 정말 대단해.”

“큭큭, 너 없다고 우리가 아주 병신은 아니란 거겠지.”

지친 이민재 병장이 바닥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끼린 여기까지가 한계인 거 같다. 조금 자존심 상하지만…… 네가 해결해 줘야겠어.”

“흠.”

일단 신영준이 왔으니.

그에게 맡긴다면.

이 어려운 전장도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이 전장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테니까.”

모든 병사들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걸 해결하라니.”

그 얘기를 들은 신영준 병장은.

손을 절레절레 휘저으며 말했다.

“어……. 될 리가 있나.”

“뭐?”

“아니. 그렇잖아.”

요리를 하려고 해도.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 요리를 먹을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신영준 병장 혼자 싸우자니.

요리 도핑으로 그렇게 오래 싸울 수가 있을 리도 없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데?”

그 말에.

이민재 병장의 안 그래도 초췌해진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영준이 너 이 자식. 너답지 않게 무슨 소리를……!”

“그러니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병사들이 멍한 눈으로 그들의 희망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당사자인 신영준 병장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씨익.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거든.”

“……?”

신영준 병장이 몸을 틀자.

그 뒤에 있던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단단한 군복과 강철의 건틀렛.

그리고.

“전 상병님……?”

짙은 광기로 무장한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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