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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71화 (171/227)

171화 첫눈

“놈들이 도망칩니다!”

적들의 대장 격이었던 괴물이 죽고.

그 괴물을 이용한 공격 또한, 신영준 병장에 의해 사라지자.

아직 많은 숫자를 유지하고 있던 적 병력은 조금씩 후퇴를 시작했다.

“추격할까요?”

“그러자……고 말하고는 싶다만.”

이민재 병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쪽 피해도 너무 크군.”

“그럼……?”

“일단 부상자들부터 수습한다!”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에.

나는 몸에 힘을 빼고 지친 숨을 내뱉었다.

[스킬 - 보조 셰프의 발동을 취소합니다.]

스킬도 취소하자.

허공을 날던 요리 도구들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

“맙소사…….”

그 모습을 본 부대원들이 묘한 감탄을 내뿜는 것이 보였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익힌 스킬이나 특성들은 대부분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것들.

주로 서포트 용도의 기술들이 많았다.

특히, 겉으로 봤을 때 이거다 싶은 효과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지.

하지만.

이 [보조 셰프]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크흠. 조, 조금 멋있는 것 같기도?’

허공을 날아다니는 다양한 무기들.

겉으로 봤을 때의 화려함은, 이민재 병장의 번개하고도 비견될 정도다.

“멋있다…….”

병사들의 선망 어린 표정.

약간은 우쭐한 마음도 들 정도였으나…….

“요리도구만 아니였다면 더 멋있었을 텐데.”

“…….”

뒤이어 들려 오는 얘기가.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왔다.

“염동력 같은 건가? 역시 신 병장님. 하필 전부 요리도구인 게 유일한 흠이군.”

“…….”

“엄청 화려한 능력을 개화하셨군. 너무 강력한 능력이라 요리도구만 사용 가능한 게 페널티인 건가.”

“…….”

나와 특성을 공유하지 않는 [보조 셰프]는 [요리 도구 숙련]만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도구를 줄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칼만 주기엔, 여러 도구를 주는 편이 범용성이 좋다.

공격을 막을 때는 표면적이 넓은 웍이나 프라이팬 등이 칼보다 나을 테니까.

그나마 칼이나 돈가스 망치 같은 건 괜찮지만.

아무래도 웍이나 뒤집개, 프라이팬 같은 게 허공을 날아다니다 보니.

화려하고 강력한 기술이라기보단.

뭐랄까.

‘주방에서 일어난 폴터가이스트 현상 정도……?’

그냥.

신기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제기랄.’

서포터 직업 주제에 멋은 무슨 멋이냐.

우쭐해진 마음이 곧바로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선망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나뿐만은 아니였다.

“이, 이병민 이병. 네가 이렇게 강했다고?”

나와 같이 무예를 익히고 돌아온 이들.

그들 모두가, 부대원들에게 경악의 눈빛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무예라는 걸 익혀서 그렇게 강해졌다?”

“예. 그렇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슴까.”

평범한 편에 속했던 병사가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발휘한 거다.

그와 비슷한 수준이였던 다른 병사들 입장에서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일.

“그거, 우리도 익힐 수 있는 거냐?”

“예. 그러기 위해서 신 병장님이 교관들을 데려왔습니다.”

“교관이라니?”

“엄청나게 강하고 기도 센 양반들임다. 신 병장님은 그 교관들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으신 건지.”

뭐긴 뭐야.

불량식품 좀 먹여 주니 좋아하더라.

“신 병장님이라. 크흠.”

이병민 이병과 얘기하던 박 일병이 슬쩍 목소리를 낮춘다.

“그 무예란 걸 익히면…… 우리도 신 병장님처럼 칼을 날릴 수도 있게 되는 거냐?”

“예? 그럴 리가요.”

“…….”

“그딴 게 되는 건 신 병장님뿐인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저건 신 병장님이 무예를 익히기 전부터 가능했다고 들었슴다.”

“……그, 그런 거냐.”

다행히.

무예에 대한 설명은 다른 부대원들이 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귀찮은 일이 하나는 줄어든 느낌.

‘어디 보자. 그럼 나는.’

전후 처리를 시작해야겠지.

* * *

전투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느낌에 들어가자.

나는 민재 형을 찾아갔다.

“왔냐, 영준아.”

“내가 너무 늦은 게 아닌가 모르겠네.”

“설마. 딱 적당할 때 와 줬어. 부상자가 꽤 많긴 하지만…… 전투의 성과에 비하면 적은 편이지.”

민재 형은 다른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부상자들은 거의 다 정리됐고…… 아. 그러고 보니.”

“음?”

“이 인근의 창고 같은 곳에 생존자들이 단체로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그거…… 네 짓이겠지?”

“아, 일단은.”

정확히 말하면 내 짓은 아니다.

내 권속인 아리엘라.

그녀는 후방에서 마냥 분탕만 친 게 아니었다.

그녀가 확보한 영역 내의 인간들을 모아, 안전한 곳에 숨겨 둔 것.

“그 사람들은 정수아가 데려갔다.”

“정수아가? 원래 생존자들을 담당하는 건 이상아 아니었나?”

“상아 씨는 요즘 생산직 쪽에서 일하느라 바쁘거든. 오히려 정수아가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인망이 조금 높아. 특히 우리 부대가 구출한 사람들이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더군.”

그러고 보니.

노예로 갇혀 있던 사람들을 구출할 때마다.

꼭 그 근처에서 무언가 얘기를 하던 정수아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시킨 건 정령 드론 업무뿐인데. 얼마나 성실한 거야.’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할 줄이야.

원래도 사람들을 케어하는 데에 재능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원래 생존자들과 관련된 업무는 이상아 조장이 맡고 있었다만.

본인이 좋아해서 하는 일인 듯하니.

아예 관련 업무를 이관해도 괜찮을지도.

“그러고 보니, 광일이는?”

“도망치는 적 병력들을 추격하러 갔다. 멀쩡한 병사들 몇 명이랑, 네가 이번에 데려온 처음 보는 두 사람도 같이.”

“오. 되게 호전적인데.”

“그러게 말이다. 제 말로는 숙련도작을 해야 한다나……?”

숙련도 작이라니.

아무튼, 광일이는 많이 바쁜 모양.

“그건 그렇고.”

대략적인 보고가 끝나자.

민재 형은 내 눈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그림자 같은 괴물은 정체가 뭐냐?”

마지막에 나를 습격한 존재.

[어둠의 정령].

그 녀석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거겠지만.

“나도 몰라.”

“뭐?”

그게 뭐 하는 녀석인지 따위.

나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이름 자체는 알지만. 왜 나를 노렸는지를 모르겠다는 게 맞겠네.”

저 녹색갈기 부족들은 ‘대지의 정령’을 사용했다.

[요리사의 눈]에 나온 정보에 따르면.

어둠의 정령은 굉장히 불길한 존재라는 것 같다.

일반적인 이들은 계약 자체를 하지 않는다든가.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라든가.

꽤나 보기 드문 존재인 것처럼 설명되어 있었지.

‘그런 녀석이 왜 나를 노렸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어둠의 정령은 거대한 악마의 하수인으로서, 여러 차원에 죽음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녀석.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것 같더라고.”

“뭐?”

그 얘기에.

민재 형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악마라니. 그런 게 실제로 있다는 거냐?”

악마.

성경 같은 곳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

‘이 시스템의 번역은 꽤나 대충이니까, 실제 그 악마와 같은 존재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리엘라가 실제로는 뱀파이어가 아님에도 불구.

그 특성은 여러모로 뱀파이어와 유사했던 것과 마찬가지.

저 악마 역시.

성경에 나온 그 존재가 아니라고 할지언정.

그와 굉장히 유사한 존재일 확률이 높겠지.

하지만, 뭐.

나는 놀라는 민재 형을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쯤 되면 뭐가 나와도 이상하진 않잖아?”

“그, 그렇긴 하다만.”

민재 형은 그 존재의 이름을 듣고 크게 놀란 모양이지만.

나는 이전에도 한 번, 악마라는 존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내 권속이 되어 버린 아리엘라.

그녀가 비슷한 말을 했었거든.

‘뱀파이어의 선조는 악마라던가, 뭐라던가?’

악마는 그 말에 강제성을 지니며.

밤의 귀족에게는 그 피가 옅게나마 남아 있기 때문에, 복종의 맹세를 하게 되면 돌이킬 수가 없다던가.

그때 처음 악마의 존재에 대해 들었다.

서환과 미호 등이 살던 세계를 멸망시킨 것도.

어쩌면 그런 녀석일 수도 있겠지.

“그 정령이 다루던 시체…… 하나는 그 대전사라는 녀석이었고, 하나는 [대주술사]라는 녀석이더라고.”

저들 부족의 주술사들은 정령을 다룬다.

아마 그 대주술사라는 녀석이, 자신마저 희생해가며 어둠의 정령을 소환한 거겠지.

“그럼 이 어둠의 정령이 널 노렸던 건, 설마.”

“어허. 확실한 건 아니야.”

“그 악마라는 녀석이…… 널 노린 건가.”

민재 형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악마라……. 그런 녀석을 상대로, 우리가 싸울 수 있을까.”

“뭐, 당장 급한 건 아니잖아? 게다가.”

나는 아직 요리의 버프가 유지되고 있는 칼을 들었다.

[항마의 기운]이, 내 칼에 깃든 채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뱀파이어도 토벌한 전적이 있으니까.”

저 어둠의 정령 역시.

이 기운에 피해를 입은 듯하니.

“상대하는 방법은 없지만은 않다는 건가.”

사실, 내 요리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힘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 역시, 사람.

‘묘양사의 스님들. 전부 성기사 아니면 사제. 성직자 계열이란 말이지.’

우리 부대 최초의 사제.

신중수 일병도 불교도 출신이다.

그 후에 가입한 사제들 중에는 다른 종교 출신들도 많다만.

아무래도 스님들은 그 직업상.

이 게임에서 얄짤 없이 성직자 계열로 가 버리는 것 같다.

‘진짜 대충인 전직 시스템이다 싶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스님들이 신이시여, 어쩌구 하는 꼴이 영 적응은 안 된다만.

자고로 악마를 패는 건 언제나 성직자 아니겠냐.

그냥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시도했던 영입이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든든한 우군.

당장 악마가 나타날 리도 없고.

대처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

물론.

정말 말처럼 아무 준비 없이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나름의 대비는 해 둬야겠지.’

적이 당장 나타나지만 않는다면야.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많으니까.

“그건 그렇고, 스님들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응?”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질 않으니.”

“아.”

자세한 일을 길드 메시지로 설명하기에는, 워낙 바쁘기도 했고.

좀 복잡한 일이라, 나중에 직접 만나서 알려 줄 생각이었다.

나는 민재 형에게 내가 부대를 떠난 뒤 겪은 일을 모두 알려 주었다.

“과연……. 왜 갑자기 한 달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겠다고 한 건가 했더니. 그런 이유였나.”

“운이 좋았지.”

“너와 함께 떠난 상인이 네가 아니라 웬 스님들과 같이 왔을 때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민재 형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광일이의 광기가 제어할 수 있게 되다니……. 다행이야.”

“그러게. 녀석도 엄청 좋아하더라.”

“뭐야. 그렇게 남 얘기처럼 말하기냐?”

“응?”

그야.

남 얘기가 맞으니ㄲ…….

“너도 내심 신경 쓰고 있었잖아. 광일이가 광전사가 된 거.”

“……크흠.”

그 말에.

나는 민망하게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이 남들 생각을 많이 한단 말이지. 이 형은.’

내 능력들에 대해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이 형이었다.

내가 광일이의 광기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단 것 역시.

민재 형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

“네가 생각보다도 부대원들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

민재 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요리를 통해 부대원들의 멘탈 케어를 해 주고 있다는 것도. 갑자기 세상이 반쯤 멸망해 버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건, 아마도 네 덕분이 크겠지.”

“갑자기 무슨 소리래. 부끄럽게.”

“하지만. 나는 네 멘탈도 걱정될 때가 많다.”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바라보자.

조금 걱정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는 민재 형.

“다른 이들의 멘탈이야 네 요리가 어느 정도 케어해 준다지만. 너는 누구도 케어해 주지 못하니까.”

“나야 뭐. 워낙에 강철 멘탈이라. 혼자서도 잘하네요.”

“하하. 너 잘났다, 그래. 아무튼. 네가 신경 쓰고 있던 일 하나가 해결됐다고 하니. 나로서도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군. 그건 그렇고. 무예라…….”

민재 형은 혹시나 하는 말투로 물었다.

“그거, 마법사들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될 확률이 높겠지?”

“아마도?”

“……끄응.”

아쉬운 한숨을 내쉬는 민재 형.

기본적으로 무예는 몸을 움직이는 기술이다.

신체 능력이 높지 않은 비전사 계열 각성자들은…….

“익히는 것 자체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효율이 좀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네.”

“너는? 넌 비전사 계열을 넘어서 비전투 계열이다만.”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나는 논외로 쳐야지.”

“……그렇긴 하지.”

어쩌면 사수들은 조금이나마 활용할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총검술이라든가, 뭐 그런 걸로.

하지만.

“마법사들이 활용할 구석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군.”

익힐 수는 있겠지만.

투자하는 시간 대비 효율은 나오지 않겠지.

“조금 아쉽군.”

“뭐 어때. 전열이 단단해지면 후열의 마법사들도 안정되니까. 화력도 더 늘어나지 않겠어?”

“그건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민재 형답지 않게도.

눈에 보일 정도로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 * *

그후로.

우리 부대는 부상자들을 정리하면서, 승전의 기세를 놓치지 않고 진격해 나갔다.

지난 전투에서 [녹색갈기 대전사]를 쓰러트렸던 덕분일까.

적들의 저항은 이전보다 약해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숫자는 엄청난 편이었지만.

무예를 익힌 병사들을 필두로.

여러 동맹 세력들이 앞장서 전투를 벌인 결과.

[ROK.17 지역의 영토, ‘소도시 (2)’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영토의 지배권이 유지되는 동안, 추가적인 ‘점령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결국 우리는.

녹색갈기 부족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인 화천군과 철원군.

그중 하나인, 화천군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후우.”

“아직 정리 못 한 지역이 훨씬 많을 텐데, 용케도 지배권이 인정됐네.”

“우리 세력이 큰 것보단…… 원래의 지배세력이 물러난 게 크겠지.”

[요리사의 눈]을 통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녹색갈기 부족은 짧은 시간에 그 숫자를 불릴 수 있는 세력이다.

지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더 진격해 나가고 싶다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띠링.

[무당 : 일단은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거다.]

익숙한 소리와 함께.

한 줄의 메시지가 눈앞을 채웠다.

‘여기까지만 하라니.’

겨우 이긴 전투다.

이 승기를 몰아가도 모자랄 판에, 무슨 얘기인가 싶었으나.

토옥.

“……어?”

볼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니, 내리고 있던 것은.

“눈…….”

강원도의 첫눈은 조금 빠르게 내린다.

겨울의 첨병이, 조금 이른 타이밍에 찾아왔다.

“첫눈이군요.”

눈이라.

어렸을 적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하얀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렐 때가 있었다.

하지만, 강원도의 군인들에게 있어서 저 눈들은 조금 이쁜 하늘의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멸망한 세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저 눈은…….

‘재앙이나 다름없겠지.’

여기까지만 해야 한다는 이유 역시.

짐작이 갔다.

‘겨울을 버텨 내려면, 전투에 집중하고 있을 여유는 없을 테니까.’

한숨을 내쉬니.

입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온다.

“잘 견뎌내야 할 텐데.”

겨울이 찾아왔다.

아마도.

21세기 이후, 가장 혹독할 겨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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