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상성
하늘은 아직 밝았다.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우리 부대가 위치한 울창한 산맥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런 맑고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무언가가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실체가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보유 중인 신력이 외부의 존재를 감지합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감을 가진 ‘무언가’가.
분명히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손발이 벌벌 떨리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뭐 하는 새끼냐.”
저 멀리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온몸이 공포로 비명을 내지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다스무르를 멸망시키고.
미호를 절망시켰던 신이라 불릴 만한 존재들.
‘그것들과 같은 종류의 존재.’
인간 따위는 벌레 보듯 내려다볼 수 있는.
아득히 높은 차원에 위치한 무언가일 것이라고.
“시, 신 병장님?”
“갑자기 무슨 소리를.”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는 나뿐이었던 것일까.
나머지 병사들은 그저 갑자기 바뀐 공기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중얼거린 말에 의아해하는 병사들.
하지만, 그 의문에 답해 줄 여유는 없었다.
‘뭘 하려고 저기에 나타난 거지?’
저곳에 나타난 무언가에게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잠시 뒤.
[…….]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저 존재에게 압도된 것과는 반대로.
저 존재는.
‘나 같은 건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거냐.’
내가 자신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
나 따위는 눈에도 차지 않는다는 듯.
작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것.
‘하, 하하.’
아무리 대단하신 녀석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당할 줄이야.
이건 좀.
“자존심 상하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든 말든.
그 존재는 그저 덤덤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할 일을 수행했다.
스르륵…….
“이, 이 녀석들.”
“……늙어 가고 있는 건가?”
우리에게 제압당한 채.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다섯 명의 [악마 계약자]들.
개중에는 젊은 청년도,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중년도, 여자도, 남자도 있었으나.
그들 모두의 피부가.
급격하게 탄력을 잃어 나간다.
‘노화.’
기괴한 광경이었다.
멀쩡했던 인간들의 시간이 급격하게 빠르게 흘러간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중년에서 노년으로.
마치, 그 인생을 한순간에 앞당기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순식간에 불태우는 것처럼.
‘과연.’
저 위에 있는 존재에게…….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라도 한 것처럼.
‘악마다, 이거냐.’
이런 짓이 가능할 만한 존재는 하나밖에 없다.
방금까지 나와 서로 바라보고 있던 그 녀석.
악마 계약자가 부른 것이 분명한 존재.
인간의 영혼을 탐하는.
탐욕스러운 존재.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현상에 당황한 듯.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병사들이었으나.
“다들 주목.”
“……예?”
순식간에 늙어 가고 있는 인간들.
저렇게 늙는 게 저들이 바란 현상은 아닐 테니.
‘단순히 늙고 싶다고 저 난리를 쳤을 리는 없다.’
이건 아마도.
그가 바란 현상을 일으키기 위한…….
대가일 확률이 높겠지.
“무기 든다. 실시.”
그렇다면.
방심할 틈 따위는 없다는 거다.
“……예!”
“실시!”
다행히.
부대원들도 산전수전을 다 겪어 왔다 보니.
당황스러워하는 시간은 짧았다.
내 명령이 떨어진 순간.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군단병에게 어울리는 눈빛으로 변하는 병사들.
‘이만한 대가를 치르면서 행한 일이야. 분명 평범한 짓은 아닐 터.’
나와 병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쩌억…….
“미친.”
“저건 또 뭐랍니까, 제기랄.”
지난번에 나타났던 어둠의 정령 때와 같다.
주변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는다.
“뭐긴 뭐야.”
허공에 나타났던 보이지 않는 무언가.
분명히 보이지는 않지만.
그 녀석이 입을 벌리는 것이 느껴지고.
퉤엣.
그 안에서.
무언가를 뱉어 냈다.
“적이지.”
철푸덕 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은…….
매우 거대한 짐승 같은 형태의 괴물이었다.
“하, 하하……! 절규하거라!”
이제는 뼈가 보일 정도로 노화가 진행된 사내.
그가 마른 목소리로 외쳤다.
“위대한 분의 하수인이 이 땅에 강림하였으니……!”
“쯧.”
사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쪽에 시선을 돌릴 여유는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던 존재.
[악마]의 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볼 일은 다 봤으니, 우리들한테는 관심도 없다 이거냐.’
그 광오한 태도에 약간은 짜증도 났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악마]의 존재감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와는 다른 의미로 엄청난 존재감을 내비치는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엄청 크군.’
423대대가 자리 잡은 산맥은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무들조차 작아 보일 정도로 거대하게 우뚝 선 괴물.
칠흑 같은 피부는 기름진 콜타르 같은 무언가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거대한 네 개의 다리에는 거친 가시 같은 것이 무수히 많이 돋아나 있었다.
쿠웅…….
녀석이 한 발자국 움직이자.
주변의 나무들이 잔디 쓰러지듯 무너졌다.
‘실체는 있다는 건가.’
저 [어둠의 정령]처럼 검은색 피부를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정령과 달리 실체를 가진 몸인 것 같았다.
[식재료 감별(강화)]
[바르가스트]
[악마의 영역, 지옥에 주거하는 짐승입니다.]
[굉장히 독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 일반적으로 식재료로 애용되지는 않지만, 특정 종족의 경우에는 없어서 못 구할 정도로 선호하는 식재료이기도 합니다.]
저 정도로 거대한 적을 상대해 본 적은 [깊은 자들의 교황] 이후로 처음.
아니.
크기만 보면 교황보다도 훨씬 거대해 보였다.
지상에 발붙인 상태로 싸우려면…… 글쎄.
내가 공격할 수 있는 건 저 녀석의 발목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우리 길드도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지.’
[다스무르 요리사]의 기억에서 본 바에 의하면.
우리와 싸운 교황은 사실상 노화로 인해 죽기 직전인 상태였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럼에도 백 명 이상의 우리 길드원들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강적이었으나.
그때의 보스전을 지금 다시 치른다고 한다면.
지금의 우리는 큰 피해 없이 당시의 교황을 토벌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만큼 많은 성장을 이루어 왔으니까.
반면.
저 짐승 놈의 강함은 [전투력 측정기]로 보았을 때 매우 짙은 초록색 정도.
‘조금만 더 강했다면 파란색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봐야 초록색.
우리 부대는 이미 저 정도의 괴물은 몇 번이고 상대해 왔다.
그리고.
“다들, 맛있게 잘 먹어 줬지.”
그 모두가.
내 식재료가 되는 결말을 맞이했거든.
객관적인 전력으로 비교했을 때.
우리 부대원들이 질 수가 없다는 것!
“일하자, 얘들아.”
“충성충성충성-!”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품 안에서 전투 식량을 꺼내 들어 섭취하는 병사들.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거대한 괴수.
그 모습에 위축된 것도 잠시.
“크흐흐…… 간만에 팰 맛이 있어 보이는 덩치로구나.”
“끄흐흐…… 끼에에에에엑!”
용기가 충만해진 병사들.
각자의 무기를 쥔 이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적을 향해 쇄도했다.
* * *
그렇게 시작된 전투.
그런데…….
전투가 개시되고 난 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쯧.”
전황을 살피던 나는.
입에서 혀 차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우리 부대원들이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을 텐데.’
그 생각이.
조금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걱-!
[검사] 계열의 병사 한 명이 괴물의 발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공병과 대장장이들이 혼신을 기울여 만든 검.
거기에 평범한 칼질도 아니었다.
서환에게서 전수받은 B+급의 무예를 가진 병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날린 일격.
“베었다!”
그 검술은 매우 아름답고 정교했으나.
-쿼어어어어어어!
“크읏!”
그 공격을 받은 괴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발을 굴러 병사를 공격했다.
-서걱!
다음으로 적에게 접근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괴물 녀석에게 접근한 뒤, [독고구식]을 휘둘러 그 발의 일부를 베어 냈다.
[무예 - 식]의 효과까지 동원된 깔끔한 베기.
그러나.
-쿼어어어어어어어!!!
방금 전의 병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괴성을 내지르는 괴물.
“이게 문제란 말이지!”
내가 가진 특성은 [단도 숙련]이다.
당연히 모든 전투는 단도로 이루어지며.
그 이름대로.
단도치고는 길다고 해 봐야 짧을 수밖에 없는 단도의 특성상…….
‘저 정도로 거대한 놈들한테는 아무리 열심히 베어 봐야 생채기 수준이란 거!’
아무리 강력한 망치질이라고 해 봤자.
건물을 향해 휘두르면 외벽에 조금 금이 간 거로는 건물을 무너트릴 수 없는 법.
마찬가지 이유였다.
내 칼은 너무 짧고 타격 범위가 적기에.
저 정도의 덩치를 가진 녀석에게는 유효타를 입히기 힘들다.
‘그나마 전사직 각성자들은 나은 것 같기는 하다만.’
나와는 달리 전투에 특화된 직업들.
평범한 칼질이라도 큰 상처를 내는 류의 기술이 분명히 존재하니까.
문제는, 나에게는 그런 스킬이 쥐뿔도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전사들만으로 해결하기에는 저 녀석이 마냥 약한 적도 아니라는 것!
“마법사들을 데려왔어야 했나.”
굳이 423대대에 들른 이유는 이곳의 병사들에게 물품을 보급해 주기 위함이었다.
전투를 상정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
호위를 위해 데려온 전투직 병사들도 있기는 했다만.
그 숫자는 결코 많지 않았다.
‘423대대에 상주하던 병사들은 지상의 병사들에 비하면 약해.’
개중에는 마법사도 있기는 했으나.
그 화력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전투 경험이 그만큼 적을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덕분에, 지금 이곳에는.
저 거대한 덩치에게 효율적이고 광역 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투 인원이 없었다.
“제기랄, 귀찮게 됐네.”
생각보다 전투가 힘들게 돌아가자.
나는 그림자 속을 보며 소리쳤다.
“까망아!”
-커엉.
쿠웅…….
내 부름에 응답해.
그림자 안에서부터 강철로 이루어진 앞발이 튀어나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나 데리고 다니는.
내게서 가장 가까운 호위병.
[강철을 먹는 맥]
까망이는 그 자체로 파란색 등급의 괴물이다.
전성기의 힘으로 비교하자면 저 괴물은 상대도 되지 않겠지만.
-커엉!
아쉽게도.
지금의 까망이는 전성기는 아니었다.
곰만 한 크기의 표범으로 변한 채, 괴물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
‘밥 좀 많이 먹여 둘걸!’
기본적으로 괴물이다 보니.
까망이에게 제공되는 광물의 양은 제한되어 있다.
[번개 지배]로 살모네우스를 지배한 민재 형의 사례와 비슷하다.
지나치게 강해진다면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나마 [번개 지배]는 성립만 된다면 매우 확고한 지배력을 발휘한다.
나와 아리엘라 사이의 [권속]이라는 관계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까망이는 다르다.
[권속]도 아니고, [지배]도 아닌.
‘요리로 꼬신 매우 느슨한 유대 관계.’
지나치게 힘을 주었다가 어느 순간 폭주하기라도 한다면.
그 강력함만큼 우리 길드에게도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다.
덕분에 식사량에 제한을 두었다만.
‘저 녀석을 까망이 혼자서 처치해 주는 건 무리겠군.’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나는 숨을 돌리며 주변의 전황을 살폈다.
‘우리가 질 일은 없다. 하지만…… 전투가 오래 지속되도 좋을 건 없겠어.’
산맥을 내려갈 때의 상황과 같다.
이 정도로 화려한 전투가 오래 지속되면 그에 영향을 받은 다른 괴물들이 달려들 수도 있는 일.
과거에 이 부대에서 큰 소리를 싸우면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 일대가 리자드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 리자드마저 거의 다 사라진 지금.
어떤 괴물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도 이상할 게 없다
‘아예 뱀파이어들까지 동원하면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겠지만.’
내가 뱀파이어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부대원들에게는 비밀.
그걸 동원할 수도 없는 노릇.
‘별것도 없는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고전하게 되자.
머리를 매만질 수밖에 없었다.
‘……상성이란 건가.’
마냥 강해졌다고만 생각했다.
어떤 적이 나타난다고 한들.
우리 군단이 패배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 생각도 조금 안일했던 것 같다.
저 괴물은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분명 우리보다 약할 것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 것처럼.
‘상성에 따라서 별거 없는 적이 엄청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모든 생명을 빼앗긴 채,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가고 있는 저 인간들.
저 녀석들이 방금 본 거대한 존재에게 빈 소원이 무엇인지.
이제서야 짐작할 수 있었다.
‘저 군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를 불러와 달라, 뭐 그런 거였겠지.’
지독할 정도의 상성.
완벽한 카운터픽.
그리고…….
그렇기에.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혼자서 이 괴물을 만났다면.
저 엄청나게 거대한 몸에 짧은 식칼로 생채기만 내다가 패배했을 확률도 높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 전까지의 내가 만났다면, 말이지.’
피식.
나는 작은 웃음을 지으며 칼질을 멈추고 괴물에게서 조금 물러났다.
저 거대한 괴물에게 내 단도를 통한 칼질은 의미가 없으니까.
‘너희도 돌아와라.’
허공을 날아다니며 공격하고 있는 [보조 셰프]들 역시 마찬가지.
보조 셰프들이 사용하는 요리 도구들도 가장 큰 무기라고 해 봐야 돈가스 망치 정도니까.
나는 전투를 진행하고 있던 [보조 셰프]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신 병장님……!?”
“요리 도구들을 빼다니……, 갑자기 왜?”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나를 보며 당황한 듯 소리쳤다.
우리 쪽에도 여유는 없는 전투.
그런 와중에 중요한 전력을 후퇴시킨 거다.
일선에서 싸우고 있던 병사들 입장에서는 무슨 일인가 싶겠지.
그리고.
그런 병사들의 말에 나는…….
“뭐, 보고 있으라고.”
가벼운 헛웃음을 지으며.
[보조 셰프]들이 사용하던 식칼 중 한 자루를 잡았다.
“뭐, 보고 있으라고.”
“그게 무슨.”
“아, 안 보일 수도 있으려나?”
식칼을 붙잡은 나는.
그 식칼의 위로 오른손을 스윽- 문질렀다.
그러자.
[영혼을 녹이는 독 -네펜데스]
내 오른쪽 손목에 자리 잡은 문신.
그곳에서…….
무색무취의 액체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