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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95화 (195/227)

195화 저녁 시간

-제 머릿속을 지배하던 그 주박은…… 결코 평범한 게 아니었어요.

그야 그렇겠지.

모든 군사 시설에 괴물을 쑤셔 박고.

그 괴물들에게 군사 시설을 지키라고 명령한 거다.

평범한 주박일 리가 있나.

-반면, 아까 만났던 그 인간들은 평범해 보이더군요. 그런 녀석들이 100명이 몰려온다고 한들, 주박을 푸는 건 불가능해요.

당장 이 녀석만 해도.

수백에 달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괴물이다.

그런 식으로 주박을 깨트리는 게 가능하다면.

진작에 스스로 주박을 깨고 자유를 얻었겠지.

하지만.

‘불가능하다기엔…… 결과적으로 이 녀석의 주박도 깨지긴 했단 말이지.’

정확히는.

[시스템]에 의해 녀석이 내 권속이 되어 버린 결과.

기존에 녀석을 지배하던 주박이 사라졌다는 느낌이다.

‘권속.’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권속을 가지고 있는 것은 현시점에서 나와 민재 형뿐이다.

민재 형의 경우에는 [최하급 전기 지배] 특성을 이용.

전기로 이루어진 괴물을 지배하에 두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민재 형이 사용한 방법이야말로 가장 정석적인 권속의 획득 방법이 아닐까 싶다.

내 경우에는 조금 다른 방법.

쉽게 말해 편법을 사용했었거든.

‘스스로 내게 굴복하도록 요리로 꼬드겼지.’

그 과정에서.

아리엘라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마족의 말에는 강제성이 있다.

고작 말 한마디에 그녀가 내 권속이 된 이유는.

바로 저 강제성 때문이겠지.

그리고, 방금 전 내가 만났던 녀석들은.

‘악마 계약자라고 했지.’

무려 악마다.

아리엘라의 주박이 깨진 것이 마족이라는 것들의 말에 담기는 강제성 때문이라면.

악마라는 존재 역시.

비슷한 짓을 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겠지.

아니.

‘그 악마란 녀석이 주박을 건 장본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는데.’

어찌 됐든.

주박이 없어진 경우가 없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이런 짓이 나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라는 거다.

“녀석들이 이 부대를 찾아온 이유도 네가 말한 바로 그걸 노린 거겠지.”

“괴물들의 주박을 풀 수 있다는 거?”

“그래.”

대부분의 군부대는 괴물과의 싸움에서 전멸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게 바로 이 부대.

온갖 개고생을 해 가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

우리는 리자드들을 토벌하고, 산맥의 주인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여기서 전멸했다면, 이 부대를 점거하고 있던 건 리자드들이었겠지.’

[요리사의 눈]을 통해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

고지대에 위치한 군부대라는 점.

빠르게 각성법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점.

좀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던 덕에, 어떻게든 토벌하는 데 성공했던 리자드들이지만.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도 결코 약한 녀석들은 아니었어.’

내가 입고 있는 이 군복만 해도 그렇다.

산맥에서 내려온 지 꽤 시간이 지났다.

군복 역시 이상아 조장의 실력이 오를 때마다 새로 만들어서 보급되었지만.

‘군복의 주재료는 여전히 리자드의 부산물들이지.’

그만큼 놈들의 비늘과 가죽은 매우 단단하고 뚫기 어려운 것이었다.

약점을 안다면 처리하기가 힘들지는 않겠지만.

약점을 모르는 상태라면 지금의 부대원들이라도 쉽게 처리하지 못할 괴물들.

그 숫자도 수백에 달했으니.

아까 생각했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들.

그중 하나라도 누락되었다면 우리가 전멸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강적.

“우리가 전멸했었다면, 이 부대를 점거하고 있었을 리자드들을…….”

“세상에 풀어놓으려고 한 거다.”

그런 녀석들이라도 멍청하게 우리 부대만을 공격했기에 괜찮았던 거다.

그놈들이 세상에 퍼져 나갔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혔겠지.

‘아니, 그 일은 막는 데 성공했으니까 중요하지 않아.’

그보다도.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다른 쪽.

이 녀석들은.

동료가 있다는 것처럼 굴었으니…….

“박태준 병장. 이 녀석들이 괴물을 해방하려고 한 곳이…… 여기 423대대뿐인가?”

“……아니.”

“맙소사.”

군부대를 점거하고 있는 괴물을 해방할 수 있는 놈들.

저 녀석들의 동료라는 인간들 역시.

인근의 다른 군부대로 찾아가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

“그놈들이 얼마나 많은 부대를 찾아갔을까.”

“정확한 숫자는 나로서도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건…… 12군단에 소속되어 있던 군부대들. 그곳을 노리고 있을 거란 것 정도다.”

“……돌아 버리겠네, 진짜.”

“지금쯤이면 다른 부대에도 도착했을 거다. 그곳에 있는 괴물들이 주박에서 풀려나고 있겠지.”

이놈들이 괴물을 해방하려는 이유.

그렇게 해방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근처는 우리 부대의 영향권이니까.’

놈들이 괴물을 풀어놓은 이유는…….

우리를 공격하기 위함이겠지.

태준이 녀석의 말대로라면.

저번에 우리가 송출했던 라디오 방송.

그게 저 녀석들이 우리를 공격하게 된 계기라던가.

‘라디오를 내보낸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아마 많은 목숨을 살렸을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적에게 노출시키기도 했다는 거다.

‘……우리 부대는 괜찮아.’

부대의 주요 거점.

탄약대대와 비마나의 방어는 굳건하다.

‘그곳들을 수호하는 강력한 존재들이 있으니까.’

비마나의 영역을 순찰하는 [용아병]

탄약대대에 뿌리내린 [알라우네]

용아병은 본래가 영역의 수호에 특화된 존재.

용아병이 수호하는 비마나는 우리 부대가 전력을 다해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

알라우네 역시 마찬가지.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 식물형 몬스터의 특성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다는 제약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게 뿌리내린 곳에서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몬스터다.

‘우리 부대는 방어전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산맥을 내려온 지 오래된 지금도 마찬가지.

군단의 진짜 힘은 공격이 아닌 방어에 있었다.

아무리 군부대들을 점거하고 있던 괴물들이라고 한들.

군단의 거점을 쉽게 무너트리진 못하겠지.

문제는 우리 부대가 아닌.

다른 쪽.

“라디오를 튼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 라디오에는…….

우리 부대의 거점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각지에서 각자도생하고 있었을 생존자, 각성자들.

그들에게 좀 더 안전한 지역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군단을 찾아오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지만.

‘그 사람들은 지금쯤이면 우리 거점을 찾아오고 있을 확률이 높다.’

저 녀석들은 우리를 노리고 이번 공격을 해 온 것일 테니.

우리 거점 근처에 있는 군부대들.

12군단의 괴물들이 풀려났을 터.

우리를 찾아오고 있는 생존자들.

그들은 군부대에서 풀려날 괴물들의 공격에 완벽하게 노출되는 셈이다.

‘게다가 특별한 종류의 괴물도 있으니까.’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아리엘라다.

전차대대를 점거하고 있던 눈깔 괴물 역시 마찬가지.

저 둘처럼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빠르게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종류의 괴물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부대도 힘겨울 정도로 강력한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일.

“태준이, 너.”

그렇기에.

나는 궁금한 점 한 가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내가 이곳으로 오는 걸 방치한 거지?”

박태준 병장.

이 녀석은 사태가 이렇게 돌아갈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내가 이곳을 찾아오는 걸 말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부대 최고의 버퍼이자.

전투 능력으로도 딱히 꿀리지 않는 나다.

지금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인재.

내가 사태의 수습에 가담한다면 조금이라도 피해가 줄어들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그 중요한 상황에서 나는 이곳에 있었다.

‘차를 타고도 지상으로 내려가는 데 1시간은 걸리는…… 최악의 격오지 부대에.’

이미 괴물들이 퍼져 나오고 있다면.

내가 아무리 서둘러도 늦을 수밖에 없겠지.

“아까 말했잖아? 그렇게 하려다 말았다고.”

“박태준 병장.”

“응? 뭐냐, 영준아.”

“대답이 틀렸어.”

한시가 아까운 상황.

미안하지만 선문답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관등 성명.”

“……예. 병장, 박태준.”

지금의 나는 군단의 장이고.

이 녀석은 군단의 병사다.

“무당이니 뭐니 장난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대답해.”

“……엄청난 위압감이로군.”

내가 진심을 담아 노려보자.

그 기세에 짓눌린 듯.

눈을 찡그리며 놀라는 태준이 녀석.

“고작 몇 달 못 본 사이에…… 대단한 성장을 거쳤구나. 영준아.”

“너도 누가 무당 아니랄까 봐, 말하는 걸 듣다 보면 화가 다 날 정도야.”

“큭큭. 확실히 직업에 영향을 받아 버렸을지도 모르겠어.”

내 기세가 영향을 준 것일까.

태준이 녀석이 자세를 바로 하고 말을 이었다.

“영준이 네 말대로 괴물들이 풀려나면 엄청난 위협이 될 거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최대한 빨리 합류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문제는 우리가 아는 게 없다는 거다, 영준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녀석.

“그 녀석들이 어느 부대의 괴물들을 해방시켰을지, 그렇게 풀려난 괴물들 중 어떤 녀석이 위협적일지.”

“…….”

“어떤 녀석이 가장 먼저 사람들을 습격하게 될지, 그 괴물들이 어떤 약점을 지니고 있을지.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12군단의 군부대…….

라고 해 봐야 한두 곳이 아니다.

강원도는 군부대가 ‘깔려 있다.’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군부대가 자리 잡은 장소.

그 전체에 사람을 보낼 수도 없는 일.

결국.

녀석들이 ‘군부대의 괴물들’을 해방시키려고 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한들.

어느 군부대의 괴물이 해방될지.

더 나아가.

그중에서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괴물들이 어떤 놈일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아니, 잠깐만.’

알 수 있는 예외가.

딱 한 명 있기는 하지.

“영준아, 내 병과가 뭔지 잊은 건 아니겠지?”

“레이더 반…….”

레이더.

접근해 오는 위협을 감지하고, 요격에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설비.

우연인지, 필연인지.

레이더반 왕고 출신인 태준이 녀석.

“나라면 알 수 있다.”

녀석의 특성은…….

레이더와 굉장히 유사했다.

“물론 내 능력도 만능은 아니야.”

자신감 있게 알 수 있다고 한 것과 달리.

바로 약한 소리를 하는 녀석.

“오히려 페널티가 너무 많아서 문제일 지경이지.”

“점성술의 한계라는 건가?”

“그래. 아까 말한 정보들 어떻게든 알아내 보려고 했다. 알아내는 즉시, 너에게 전달하려고도 했지만…….”

“실패했나 보군.”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 능력치와 레벨로는 한계가 있다는 거겠지.”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의 동기.

박태준 병장.

녀석의 직업은 [천문관]이다.

별을 보며 점을 치는 직업이자.

우리 부대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 계열의 각성자.’

과연.

왜 이 녀석이 내가 산맥을 오르는 걸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내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드디어 이해가 간다.

‘이곳은 주변 일대에서 가장 별과 가까운 장소.’

태준이 녀석이 공을 들인 결과.

녀석의 능력이 최대한 증폭되는 환경이기도 하다.

당장 이곳.

레이더만 해도 그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요소라고 했던가.

“이 정도가 나와 레이더반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만, 그럼에도 한계가 뚜렷했지.”

“그래서…… 내 방문을 막지 않은 거군.”

환경적 요인을 최대한 건드리면서 능력을 최대화해 보았으나.

그럼에도 한계에 맞부딪혔다는 것.

“이제는 아니야.”

하지만 지금.

내가 이곳에 동기를 만나기 위해 방문함으로써…….

거기에 몇 가지 요소들이 추가되었다.

“이 장비들, 참 맘에 들어.”

장비의 보급.

“직접 착용하고도 믿기 힘든 효과들…….”

“뭐, 우리 부대 생산직들이 대단하긴 하지.”

“그때 그 생존자들의 리더 역할을 하던 여자, 이상아였나? 그때는 참 불안해 보였는데 내가 못 본 사이 큰 성장을 이뤘단 거겠지.”

우리 부대가 자랑하는 장비 세트.

그걸 모두 착용한 지금.

태준이의 능력치는 불과 몇십 분 전과 비교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강력해졌다.

“하지만 이걸로도 모자라.”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리고.

내 쪽을 바라보는 박태준 병장.

“거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더 필요해.”

“……아.”

부대에 올라오고 난 뒤.

꽤 긴 시간이 흘러 버렸다.

“나는 너처럼 무당짓은 못 하지만, 그래도 네가 말하려는 게 뭔지는 알 것 같네.”

“그래?”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자.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슬슬 해가 지고 있는 시간.

곧, 별이 떠오를 것이다.

누군가에겐 꽤나 감성적으로 들리는 문장일 수도 있지만.

요리사인 내게는 다르다.

“저녁 식사 시간이잖냐.”

안 그래도.

부대에 찾아온 목적 중에 아직 달성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거든.

간만에 찾아온 부대.

간만에 만난 동기다.

‘저녁 식사 한번 제대로 대접해 줘야 하지 않겠어?’

지금 그의 옆에는.

군단에서 가장 강력한 버퍼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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