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녹색갈기 부족 (4)
-한 존재의 영혼과 육체를 대가로 받는 계약. 하지만…… 우리는 숫자가 매우 많지.
“미친 새끼.”
녀석의 말에.
나는 입에서 터져 나오는 거친 말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녹색갈기 부족은 한 번에 많은 아이를 동시에 잉태한다.
그렇게 태어난 이들이 한 명의 전사로 성장하기까지도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물량은 전쟁을 위해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었지만.
동시에…….
‘악마에게 바칠 몸과 영혼이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하지.’
매우.
매우 불쾌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효율이 좋았다. 갓 성인이 된 전사가 자신을 바치면 그보다 훨씬 강력한 악마의 하수인이 나타나 우리를 위해 싸워 주었으니.
“……하.”
-우리가 사냥한 적의 몸과 영혼을 악마에게 바치면 그 전사들의 힘이 불어났다. 그렇게 [봉헌]을 통해 강해진 전사 수십 명을 바친다면, 부족원들 전체의 힘이 크게 증가하기도 했지.
악마 계약자들이 가지고 있던 특성과 스킬.
사냥한 적을 바침으로써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봉헌]
스스로를 바침으로써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계약]
그 구조가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봉헌]을 통해 힘을 키운 인간일수록.
[계약]을 통해 빌 수 있는 소원이 강력해진다는 것.
-지금 우리 부족원들이 가진 강한 힘에는 그때 악마와 맺은 계약의 영향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지금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전투력 측정기]에도 노란색으로 측정되는 강력한 괴물들.
얘기를 듣자 하니.
과거에는 이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는 것 같다.
외형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으며, 힘도 지금보다는 약했다던가.
‘악마와의 계약으로 힘을 얻으면서…… 외형마저 왜곡된 건가.’
이 녀석은, 효율이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지.
그 말을 들은 탓일까.
얼마 전.
서수혁 상병과 다툴 때 나왔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병사들 목숨의 가치를 하나하나 계산하나 보네.
당시 수혁이 녀석의 경우에도 조금 심하다 싶었지만.
이 녀석들은 그걸 훨씬 넘어섰다.
아예 대놓고.
생명의 가치로 효율을 따졌다는 것.
“……그딴 방식이 잘 돌아갔다고?”
-우리 부족의 전사들은, 부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악마와의 계약 역시 전장에 나가서 죽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었지.
“미친 새끼들…… 미쳤다고밖에 할 말이 없어.”
-그래…… 미친 짓이었지. 당시에는 다들 깨닫지 못했을 뿐.
내 요리로 인해 강제로 입을 벌리게 된 상황이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후회가 큰 듯.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녀석.
-말했듯,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악마가 요구하는 영혼이 많아졌다.
“…….”
-나중에 가서는 봉헌을 통해 힘을 키운 전사를 바치고 나서야, 그보다 약간 강한 수준의 하수인 하나가 돌아올 정도였지.
그때가 되어서야.
부족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강한 하수인들로 버텨 온 것은 좋았지만…….
“많은 부족원들이 그렇게 목숨을 바치게 되니…… 새롭게 태어나는 부족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지.”
그렇게 태어난 적은 수의 아이들.
그들을 가르칠 전사의 숫자조차 모자란 순간이 생겼다.
악마와의 계약은 결국엔 임시변통.
장기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는 것.
반대로, 외부의 존재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결과.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은 오히려 약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대족장을 중심으로. 모든 부족원이 모여 대회의를 거쳤지.
그 회의의 결과.
부족은 결국 악마와의 계약을 중단할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거기서 계약을 멈출 수 있었다면 어리석은 짓을 범하긴 했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거다.
“……계약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며?”
-악마는 생각보다 더 영리한 존재였어.
까드득…….
-그 존재는 몇몇 부족원에게 매혹적인 말을 속삭이고 그들을 매료시켰다.
“설마.”
-대족장이 계약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악마를 섬기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부족원들을 꼬드겨 계속해서 추종자를 늘려 갔지.
“…….”
-그들의 영향력이 더 커진다면 결국 부족은 전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계의 존재와 싸우기 바쁜 와중에 그 악마 추종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내전을 벌여야만 했다.
악마를 추종하는 부족원들과.
이를 막기 위해 대족장을 중심으로 뭉친 부족원들.
그들 사이에 커다란 내전이 벌어졌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대족장 측이었다.
문제는.
-놈들이 소환한 악마의 하수인들에 의해…… 대족장께서 전쟁의 언덕으로 올라가고 말았지.
바로 그 대족장이.
그때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
안 그래도 많은 전사를 계약을 통해 바친 것은 물론.
내전으로 얼마 남지 않은 전사들마저 목숨을 잃은 데다가…….
대족장까지 잃어버린 그들.
그들은.
몰려오는 이계의 괴물들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지경까지 몰리고 말았다.
-초원신께서…… 한 번 자신을 저버렸던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악마와의 계약으로 인해.
부족에게 버림받았던 초원신이었으나.
그 초원의 신이라는 양반은 이 부족에게 꽤나 애착이 있었던 것일까.
멸망이 확정시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렇게 우리는 차원문을 열고 도주하게 되었지.
다른 세계로 도망칠 수 있도록.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문을 열어 준 것.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감정이 복받쳐 올랐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주술사가 눈물을 흘렸다.
-부족의 전통을 버리고, 사이한 힘에 손을 댄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
-이곳에서 잃어버린 전통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이미 우린 너무 많은 걸 잃어버린 상태였지.
그 결과가.
지난번 우리와의 전쟁에서의 패배란 거다.
-더욱더 처참한 것은…….
악마와의 계약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이들.
그나마 그 악마 추종자들을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이들이었으나.
-그 정도로 큰 대가를 치러 가며 추종자들을 없앴는데도…… 여전히 숨어 있는 추종자가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몰래 숨어 있던 생존자가.
그들 사이에 껴 있었다는 거다.
까드득.
-그게 심지어 그토록 현명하던 내 친구…… 대주술사였을 줄이야.
지난번 전쟁의 마지막 순간.
그 대주술사라는 괴물.
그 녀석이 나를 노리고 소환한 것은…… 대지의 정령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
어둠의 정령이었다.
악마의 하수인.
사실.
그런 녀석이 왜 나를 노린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노릴 거면 광일이나 노리던가. 거기서 내가 뭘 했다고.’
나는 그 전투에서는 별로 한 일도 없었다.
그런 나를 노리고 정령이 덤벼들 때는 진짜…….
솔직히 좀 많이 억울했었지.
아무튼.
-악마와의 계약은 부족에게 있어서 반란보다도 심각한 죄악이다.
대주술사가 어둠의 정령을 소환하는 것을.
온 부족원이 목격한 순간.
-전쟁의 승패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지.
그냥 주술사도 아니고.
무려 대주술사가 악마와 계약하고 있었다는 것이 들통나 버린 것.
이 녀석이 말했던 내전이 어떻게 발발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주술사들의 수장이 악마와 계약한 거다.
“그 부하였던 너희도 대주술사와 한통속이 아니냐고 의심받았나 보군.”
-……나와 다른 주술사들은 항변했다! 대주술사…… 쿠르단이 배신한 것일 뿐. 악마와의 계약 따위 우리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노라고!
“미안한 얘기긴 한데. 나 같아도 안 믿기겠다, 야.”
수장이 악마와 계약한 상황.
다른 평범한 주술사들은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으리라고.
어떻게 쉽게 믿을 수가 있을까.
안 그래도 서로 간의 불화가 쌓여 가던 상황이라고 했던가.
부족 내에서 주술사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고.
바닥을 뚫고 들어간 신뢰는…….
증오로 변했다.
-전사들은 그간 패전의 원인까지 우리 주술사들의 책임으로 몰았다. 거기에 악마와 계약했다는 누명까지 씌워졌지.
“그래서, 결국.”
-사냥이 시작됐다.
부족의 전사들은 그들의 동족.
주술사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주술사들 역시 마냥 사냥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터.
사냥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뭉치고, 방어에 돌입했겠지.
즉.
‘내전.’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시기.
녹색갈기 부족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들었다.
‘과연.’
어째서 창수가 저들의 영역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는지.
그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내전이 한창이니, 외적을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가 있나.’
다만…….
그 얘기를 들으며.
“……쯧.”
마냥 남 얘기라고 생각하기는.
조금 힘들었다.
‘우리도 그 악마 계약자라는 놈들에게 공격을 당한 판이니까.’
내가 본 악마 계약자들은.
모두가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괴물들과의 싸움에 집중하기도 바쁜 상황.
같은 인간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 잠깐만.’
그렇다면.
“그 악마 계약자들에 대한 약점 같은 건 아는 게 있나?”
-약점이라.
반대로 말하면.
이 녀석은.
우리가 앞으로 싸울 적과 이미 싸워 본 적이 있다는 뜻이잖아?
-악마가 보내 주는 하수인들에 대해서라면 대충은 알고 있다.
“오……!”
-오랜 내전을 겪었으니까 말이지. 추종자들을 상대하기 위한 노하우도 쌓이더군.
미친.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며 먹였던 [솔직함]의 요리였다만.
‘생각보다 더 중요한 정보다.’
그 자리에서 바로 요리해 버렸더라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정보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하수인들의 약점일 뿐이다.
“……?”
-악마에게 홀려진 이들이 왜 악마에게 홀렸는지……, 악마를 추종하는 이들 그 자체를 박멸하는 방법은 죽이는 것 외에는 알 수 없다.
악마에게 홀린 채.
동족과 전쟁까지 벌이려 한 녀석들.
이건 혹시.
“세뇌를 당한 상태라던가…… 뭐 그런 건가?”
그 악마가 세뇌 계열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나한테는 마냥 남 얘기도 아니고.’
당장 나만 해도 세뇌 비슷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이니까.
423대대의 상공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그 존재감.
그런 녀석이라면.
세뇌 정도는 가능하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
-글쎄. 그거까진 모르겠지만. 놈들은 뭐랄까……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
사명감?
-악마가 무얼로 그들을 꼬드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리사욕으로 움직이는 느낌은 아니었어.
“흐음.”
-대주술사만 해도 그렇다. 어째서 우리를 배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누구보다 부족을 위해 헌신하는 친구였어. 그렇기에 대주술사의 자리도 기꺼이 양보한 것이었지. 사욕을 위해 부족을 배신할 이가 아니거늘, 어째서 우리를 배신했는지…….
흐음.
이 부분까지 답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뭐.
모르는 걸 내놓으라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잘 들었다.”
대충 필요한 정보는 다 들었다고 생각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음? 글쎄.”
정보는 잘 받아먹었다만.
이 녀석은 결국 인간을 노예로 다루던 괴물.
고맙다고 풀어 주기는 힘들었다.
“일단, 한동안은 감옥 신세를 져야겠지.”
마침 비마나에는 감옥 시설도 있다.
맘 같아선 죽이고 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다만.
이 녀석은 저 악마의 하수인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으니까.
목숨만은 붙여 둔 뒤.
두고두고 정보를 빼먹으면 될 터…….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가.
내 말에.
덤덤하게 고개를 푹 숙이는 녀석.
나는 그 모습에서.
뭐라고 해야 하나.
‘……안도하고 있다?’
감옥행이라는 얘기를 듣고.
안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말하는 내용을 들어 보면.
이 녀석은 나이가 상당한 편인 것 같다.
주술사들은 체력이 강한 편도 아닐 테니.
잘못하면 감옥에서 옥사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그 처우에 안도하는 것처럼…….
“아, 그러고 보니.”
-크륵?
아직 묻지 않은 질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럼, 너는 뭘 하려고 한 거지?”
부족의 내전이 생긴 거까진 이해하겠다.
그렇다면.
“다른 부족원들처럼 내전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혼자서 외곽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며.”
다른 부족원들과 함께 행동한 것도 아니고.
혼자서 영역의 외곽을 돌아다니다가 창수에게 들켜서 납치된 이 녀석은.
대체.
뭘 노리고 그곳에 혼자 있었단 말인가.
-……후욱!
[솔직함]의 요리는 여전히 적용되고 있는 상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나올 것이라 예상했으나.
“……엉?”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기 직전.
녀석은.
떨리는 몸짓으로 자신의 손을 들더니.
-콰직!
막 벌려지려고 하던.
자신의 턱을
“……미친!”
퍽! 퍽! 퍽!
하고.
벌려지려고 하는 자신의 입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녀석.
저렇게 해서까지.
자신의 입이 열리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이유 따위는.
하나밖에 없다.
‘이 새끼……!’
숨기고 있는 거다.
내게 절대로 알려선 안 되는 무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