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계약자들 (2)
“신이 없는 우리는…… 인간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녀석의 얘기가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한 말은.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살아가느라 바빴던 나로서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아니.
신경 쓰지 않고자 노력해야만 했던 이야기였다.
‘우리 세계는 멸망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멸망이 계속 진행된 결과.
‘세상이 완벽하게 멸망해 버린다면?’
까마득한 이야기 같지만.
난 그 사례를 이미 알고 있다.
‘서환과 미호.’
그들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강한 힘.
무예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세계는.
산 하나만을 남겨 둔 채,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다.
‘다스무르.’
그 교황은 물론.
교황의 밑에서 세계를 수호하던 수호자들이나 신수들은 엄청난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따스하게 비추던 달은 추락하고.
그 끝없는 바다의 모든 생명은 죽어도 죽지 못하는 자가 되어 버렸다.
‘녹색갈기 부족.’
바로 얼마 전에 들은 얘기에 따르면.
놈들 역시 결국은.
멸망을 피하지 못하고 다른 세계로 도망쳐 온 신세.
그래.
‘중요한 건 저 도망이라는 점.’
서환과 미호.
다스무르의 교황과 어린아이들.
녹색갈기 부족.
그들은.
멸망한 세계를 버리고 도망쳐 올 수 있었다.
그들의 고향은 멸망에 이르렀을지언정.
그들 종족 자체는.
다른 세계에서 두 번째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도망칠 수 있는 건가?’
서환과 미호는 말했다.
그들의 세상이 멸망했음에도 불구.
[천산무관]과 그들 사형제가 우주를 유영하며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신선들과…… 스승님이 무슨 짓을 한 것이겠지요.’
그들의 스승은 신선.
그러니까, 신이나 다름없는 능력자라고 했던가.
그 대단한 양반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저 ‘천산무관’만을 멸망으로부터 대피시킨 거다.
다스무르의 교황과 어린아이들이 도망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짐작이 간다.
[신성이 강립합니다.]
[끝없는 바다의 주인 - 다스무르]
다스무르라는 세계.
그 세계와 이름을 같이하는 신.
그가 모종의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백성들을 탈출시켜 준 것이겠지.
녹색갈기 부족 역시.
-초원신께서…… 한 번 자신을 저버렸던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차원문을 열고 도주하게 되었지.
초원의 신이라고 하는.
대단해 보이는 작자가 그들을 탈출시켰다.
그래.
그렇다면.
‘신이 없는 우리는…….’
도망조차 가지 못한 채.
이 지구에서.
모조리 멸망해야 하는 운명인 게 아닐까.
“그래선 안 돼.”
원준은 감정이 복받쳐 오른 것일까.
으르렁거리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비록 신이 없을지언정…… 신에게 버림받은 종족일지언정!”
괴물들은 멸망한 세계에서 온 존재들.
그걸 깨달은 순간.
이 녀석은 지구 역시 멸망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 거다.
“인류는 그런 식으로 멸망하면 안 된다.”
그리고, 아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됐겠지.
‘세계를 탈출한다 라…….’
초원신은 차원문을 열어 줬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다른 세계로 종족을 탈출시킬 수 있는 기술이었겠지.
각성자들은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마법사들의 경우에는 정말로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일으키기도 한다만.
‘다른 차원으로 도망갈 정도는…… 안 되겠지 아마?’
그런 짓은.
아무리 강력한 각성자라고 한들 불가능하다.
그래, 다른 종족들처럼.
신이라고 부를 만한 절대적인 존재의 조력이 없는 한.
절대로 불가능한 일.
“그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 생각에.
나 역시 뭐라 할 말을 잃고 있었을 때.
“악마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원준이 말을 이었다.
다가오는 멸망.
인류는 도망칠 방법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들을 도망치게 만들어 줄.
그들의 그늘이 되어 줄 신이 인류에게는 없었으니까.
[그늘을 바라는가.]
아니.
딱 하나 있기는 했다.
[원한다면, 되어 준다.]
신이나 다름없는 힘을 가진 존재.
인류의 그늘이 되어 줄 수 있을 만한 절대자가…….
인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겠노라고.
악마는 원준에게 약속했다.
“그분께서는 언젠가 이 세상에 내려올 거라고 하더군.”
언젠가.
자신이 지상에 내려앉았을 때.
악마는 인류라는 종을 거두어 줄 것이다.
그의 그늘 아래에서 드디어.
인류는…….
신이라 할 만한 이의 비호를 받을 수 있게 될 터.
“그때가 올 때까지…… 자신을 섬기라고.”
원준의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허공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을 살폈다.
[…….]
아까 느껴졌던 살벌한 적대감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지독할 정도로 강대한 존재감.
‘악마…… 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실제 이름이 악마는 아니겠지.’
그 개념 자체는.
지구에서 탄생한 것이니까.
시스템이 보았을 때 악마라 부르는 게 가장 적합한 존재일 뿐.
진짜 악마는 아니라고 한다면.
인간을 보호해 주겠다는 제안을 악마가 하는 것도…….
마냥 어색한 일은 아니란 거다.
“그래서 악마를 섬겼다고? 이름부터가 악마인 존재인데?”
“크흐흐…… 조금 안 좋은 이름 따위, 나도 몇 개씩 달아 봤거든.”
살인자의 아들.
고아.
좋지 않은 이름으로 불려 본 것은 원준 역시 마찬가지.
그 덕분일까.
그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는 얽매이지 않았다.
“수녀님의 가르침이 마냥 틀렸다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더군.”
오히려 반대였다.
“신은 없었으나, 악마는 있었다!”
“…….”
“수녀님의 가르침이 절반은 옳았다는 게 증명된 셈이니…… 나로서는 기쁜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름은 무시한다고 쳐도,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해 온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지?”
“정확히 말하면, 악마를 믿은 게 아니다.”
처음 악마가 계약을 제안했을 때.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종이로 된 계약서 따위가 아니었다.
* * *
띠링.
[악마가 계약을 제시합니다!]
[악마는 그 특성상 거짓을 말할 수 없으며, 계약한 내용은 무조건적으로 이행하기로 유명한 종족입니다.]
[단, 계약서는 꼼꼼히 확인해 보시길!]
* * *
청량한 소리와 함께 눈 앞을 가리는.
각성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익숙한 그것.
“시스템의 문구를 믿었지.”
번역에 다소의 의역이 들어갈지언정.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몇 번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신력이라는 힘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었기 때문일 뿐.
시스템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
‘시스템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악마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사실.’
원준과 동료들이 악마를 위해 활동한다면.
악마는 인류라는 종을 보존시켜 주겠노라고.
진심으로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너희는?”
이 녀석들은.
어떻게 그 계약을 수락할 수 있었는가.
“계약의 대가로는…… 너희의 목숨이 바쳐진다고 들었다.”
“……묘하게 자세하게 알고 있군. 역시 다른 곳에 우리와 같은 처지의 인간들이 있었던 건가? 그래서 저 하수인들의 약점도 알고 있었던 거고?”
“그건 알 필요 없고. 저 계약대로라면 너희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건데. 어째서.”
질문을 하면서도.
나는 그 답변을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 정도는 각오했다.”
“…….”
“우리가 희생해서 어딘가에 인류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기 있는 모두가 결의했지.”
“…….”
그 얘기에.
나는 말없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당연히 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언제 또 귀찮은 짓을 저지를지 모를 적.
최대한 빠르게 토벌하려 했을 뿐이다.
제압에 성공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궁금증만 해결한 뒤에는 아리엘라에게 던져 버릴 생각이었다.
구제 불능의 악인들은 모두 그렇게 처리해 왔으니까.
그런데 이건.
‘전혀 그런 쪽의 얘기가 아니잖아.’
나는…… 죽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발버둥 쳐 왔다.
그런 삶을 살아온 나인 만큼.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무언가를 이루려는 녀석들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란 녀석은 원래 이런 놈이니까.’
하지만.
이건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이 녀석들은 달랐다.
스스로를 희생해 인류를 살리고자 한 이들.
그러기 위해서.
자기 목숨조차 스스럼없이 던지고자 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는 분명…….
‘희생이라고 부를 만한 행위.’
그렇다면.
‘내가 살아남는 것만이 가장 중요했던 내가.’
그런 의지를 가진 이들을…….
비판해도 되는 것일까.
* * *
그런 생각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찰나.
“흥. 멍청하긴.”
“……!?”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뭐?’
놀란 나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원준의 얘기를 듣고 있던 병사들이 입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인류가 멸망할 거라니.”
“결국은 해 보지도 않고 포기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이거.”
계약자들을 내려다보는 병사들.
그 눈빛에는 약간의 경멸감까지 섞여 있었다.
“어리석은 녀석들…….”
“섣불리 포기하지만 않으면 충분히 이겨 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희는……!’
병사들이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실제로 우리 부대는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많은 역경을 이겨 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지.
하지만.
나는 병사들에게 공감할 수 없는 처지였다.
까득…….
‘너희는…… 못 봤으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나는 [다스무르 요리사]의 기억을 보았다.
그 넓은 바다를 살고 있던 생명체들.
그들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죽음을 경험하기도 했지.
‘신수는 말도 안 되게 강대한 존재였어.’
인류의 군대가 멸망하기 전이라고 한들.
그 비늘에 잔상처 하나라도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
그 신수에게 유용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핵폭탄이라도 터트려야 되지 않을까.
그런 강대한 존재는 물론.
그 존재의 주인 된 신이 강림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패배로 끝났다.’
그 대단한 신수조차.
결국에는 좀비가 되어 버리는 결말이었지.
‘그런 걸 이겨 낼 수 있을 거라니.’
그런 말에.
어떻게 쉽게 공감할 수 있겠는가.
“큭큭…… 과연 자신감이 넘치시는군.”
원준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우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부대에 나타난 괴물을 어떻게 처치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는 승승장구할 일밖에 없었겠지. 군부대의 강력한 화기와 전차가 있다면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적도 아니었을 테니까. 자신이 넘칠 만도 해.”
“…….”
“하지만 언젠가…… 너희가 가진 그 강력한 화기들도 의미를 잃는 순간이 올 거다. 아니, 이미 그런 괴물들이 도처에 널려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이겨 낼 수 없는 적을 마주하게 된다면, 너희도…….”
“뭔 개소리야?”
우리에 대해 잘 안다는 듯 입을 여는 원준이였지만.
그 말에.
“못 이길 것 같은 싸움은 뭐…….”
“많이 해 보지 않았나?”
병사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어이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뭐. 그렇긴 하지 말입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423대대에서 살아남은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 다른 부대는 모두 전멸했다고 하니.”
“그것만 그런가. 그 산맥에서 내려올 때 겪은 전투만 해도…….”
우리가 겪어 왔던 힘겨운 전투들.
그 이름들이 계속해서 나열된다.
거구의 전사.
전광일 상병은 자신이 언젠가 광기에 지배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그는.
내면의 광기를 지배하에 두고 싸운다.
백발의 병사.
이현진은 평생을 괴물로 살다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었으나, 그녀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령사, 정수아는 평생 눈을 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눈과 정령의 눈으로 주변을 굽어본다.
‘불가능할 것이라고만 여겨진 일들.’
하지만.
결국, 군단은.
그 모든 일을 이루어 냈다.
“불쌍한 사람들…….”
부대원 중 몇몇은.
계약자들을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잘못된 믿음을 선택하다니.”
“제대로 된 믿음의 대상을 찾을 기회조차 받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가여운 이들입니다.”
그 말에.
원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낙관적이군 그래…….”
괴물들이 점차 강해진다는 것.
그리고 괴물들에 의해 이미 한 차례 인류 문명은 붕괴를 겪었다는 것.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거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 불안감이 서려 있는 군단원은 거의 없었다.
“음? 그야……?”
듣고 있는 나 역시.
그 자신감의 원인이 궁금해질 정도였으나.
부대원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
이곳에서 딱 한 명.
그 얼굴에 불안감이 서려 있는 군단원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