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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거로부터 온 불청객
0. 모든 사건이 시작되기 전.
기관(機關)의 설명에 의하면 [무한]한 숫자의 평행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중의 하나쯤은 무협 소설 속의 세상이 현실인 곳도 있지 않을까?
1. 과거로부터 온 불청객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움직여야 할 일이 있다면 딱 좋은, 그런 밤이었다.
달도 없이 별빛에 기대어 사람의 윤곽이나 구분할 수 있을 뿐.
그러나 이런 밤이기에 소리는 더욱 멀리 간다.
민가와 동떨어져 외로이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집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이한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칼을 뽑았다.
새도 벌레도 울지 않는 한밤의 어색한 고요함이 그의 감각을 건드렸다.
무엇인가가 돌아다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아니나 다를까.
고요함을 깨는 파문이 그의 모옥을 두드렸다.
쿵!
작은 소리였다.
누군가가 담장을 넘어 마당에 들어온 것이다.
아니, 떨어졌다고 할까?
억지로 참아내는 나지막한 신음도 함께였다.
저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이한이 아니었다.
내공을 쓸 수 없다고 해서 귀까지 먹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누군가가 부상을 입고 자신의 집에 숨어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곧장 마당으로 나가지 않았다.
도망자가 있다면 추적자도 있는 법.
다른 사람의 사연에 휩쓸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이한은 불청객을 맞이하기 전에 더 이상의 방문자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방 한쪽에 숨겨져 있던 속이 빈 쇠기둥을 끌어낸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벽에서 튀어나온 속이 빈 쇠막대기 하나였지만, 숨기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면 의례 그렇듯이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속인 빈 쇠막대기는 이한이 농반진반으로 집음기라고 이름 붙인 구조물의 일부다.
본체는 담장과 그 주변까지 뻗어있는 얇은 금속관이었다.
집음(集音).
소리를 모은다.
집음기는 이름 그대로 소리를 모으는 장치다.
집 안에서도 집 밖의 사정을 살피려는 목적으로 이한이 직접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 만든 역작이었다.
지금의 문명 수준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상이고 설계였지만, 이한은 자신의 지식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기와 내공이 존재하고, 무림인이 군림하는 이런 세상에서 그처럼 내공을 쌓을 수 없는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해야 했다.
다행히 집음기의 성능은 나쁘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자가 일부러 기척을 숨기고 천천히 움직인다면 모를까 웬만해서는 주변의 인기척을 모두 잡아낼 수 있었다.
지금처럼 조용한 밤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한은 속이 빈 철기둥의 한쪽에 귀를 대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는지, 아니면 작은 진동이라도 느낄 수 있는지 집중해서 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불규칙적으로 쌕쌕거리며 가쁘게 내쉬는 호흡소리뿐이었다.
담장 밖에서도,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오솔길에서도 주의해야 할 만한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한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즉시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담장을 넘어온 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경험상 이런 식으로 호흡을 하는 사람은 폐를 다친 사람이고, 곧 죽을 사람이었다.
대부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가 본 사람들 중 예외는 없었다.
만약 살리고 싶다면 폐수술을 해야 하는데, 마취도 소독도 없는 이런 세상에서 폐수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담장을 넘어온 사람은 아직 누운 상태 그대로였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꿈틀거리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이한의 예상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원래 이한은 불청객의 사정을 천천히 살핀 후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정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불청객을 본 순간, 이한은 ‘천천히’라는 단어를 잊고 말았다.
불청객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불청객을 다그쳤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왕 선생. 은밀전(隱密殿)의 밀위(密衛)가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겁니까?”
이한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경사, 즉 제국의 수도에서 관복을 입고 황제의 지근거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아니면 경사에서도 알아준다는 객잔의 주인으로 원래의 신분을 숨긴 채 암약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제국의 남쪽 끝, 해변의 한적한 어촌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거의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저 사람의 신분과 직책을 생각하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왕 밀위는 이한을 보자마자 팔뚝을 꽉 잡았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사람답지 않은 악력이었다.
“내 운이 다하지는 않았군. 죽기 전에 자네를 찾았으니. 쿨럭. 은밀전에 말살령이 떨어졌네.”
“누가 그런 짓을! 아니, 그전에 은밀전의 정체가 드러났다고요?”
“그래.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는 것 같아.”
“은밀전주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왕 밀위는 이한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왕 밀위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한은 느슨해지는 왕 밀위의 손을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자네는 이상한 사람이었지. 하지만 나는 자네를 믿네. 내 목에 걸린 주머니를······”
그것으로 끝이었다.
왕 밀위는 그나마도 여력이 부족했는지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축 늘어졌다.
이한은 다급하게 그의 맥을 잡았다.
맥을 느낄 수 없었다.
쌕쌕대던 호흡 역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몇 년 만에 얼굴을 본 과거의 동료가 그의 눈앞에서 죽은 것이다.
이한은 죽은 자의 목에 걸려 있던 주머니를 자신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곧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에는 언제든 이곳을 떠날 것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놓은 꾸러미가 있었다.
이한은 추위와 이슬을 막을 겉옷을 겹쳐서 걸치고, 돈과 무기까지 챙긴 후 만약을 대비해 설치해 놓은 기관의 손잡이를 당겼다.
자신에 대한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기 위해 설치해 놓은 기관이었다.
그때였다.
산새가 시끄럽게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들이 으르렁거렸다.
산에 사는 짐승들이 보기에 조심스럽게 경계해야 할 침입자가 아니라 피하거나 싸워야 할, 그런 종류의 침입자가 나타난 것이다.
덕분에 이한 역시 추적자가 나타났음을 눈치챘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당당하고 거칠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은밀전의 밀위로 오랜 시간 동안 이중 신분으로 암약해온 왕 선생이었다.
그런 사람이 쫓기다가 죽을 정도라면 절대로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무공을 쓰지 못하는 이한의 입장에서는 직접 상대하면 안 된다.
어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들이 오는 방향을 알 수 있다는 정도.
이한은 소란스러워지는 산을 등지고 바닷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
왕 밀위를 추적해 온 자들은 이한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일곱.
모두 복면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 자들이었다.
몸놀림 역시 예사롭지 않아서 담장을 넘는 동작 하나에도 수련 꽤나 한 무림인이라는 것이 드러날 정도였다.
만약, 거대 문파의 무공에 대한 견문이 해박한 자라면 그들의 동작에서 금각보를 연상할 것이다.
경지에 다다르면 절벽을 오르는 것도 평지를 걷는 것처럼 할 수 있다는 금각보는 도교에 속한 문파 중에서도 북천사도의 독문 보법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황실과 연관이 된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담장 밑에 죽어 있는 왕 밀위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옷을 벗기며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 밀위의 몸에서 나온 것들 중에는 그들이 찾는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신분증으로 사용하는 명패와 금전 약간이 전부였다.
당황한 그들이 모옥 안을 뒤지려고 할 때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자는 검은 빛이 도는 관복을 걸친 자였다.
그는 옷이 벗겨진 채 담장 아래에 방치된 시신을 일별한 후 먼저 도착해서 조사 중인 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죽였나?”
“아닙니다. 감찰영주님. 저희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은밀전의 천한 것들은 하나같이 독한 놈들뿐이로군.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고도 일주일을 넘게 도망치다니. 은밀전주가 남긴 문서나 회수하고 돌아가도록 하자.”
“그런데 그게 없습니다.”
“뭐야?
“이 자의 몸에서 발견한 것은 이것뿐입니다.”
복면인이 감찰영주에게 내민 것은 명패가 전부였다.
감찰영주는 일이 복잡해졌음을 깨달았다.
지금 여기서 죽어 있는 자는 은밀전의 밀위 중 마지막으로 남은 자였다.
그런데 이자가 가지고 있었어야 할 문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은밀전주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서였다.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회수해야 했다.
도망치던 중에 나중을 기약하고 어딘가에 숨겼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넘겼을까?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을 텐데?
짧은 생각이 연달아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그의 눈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모옥에 멈췄다.
“이곳, 빈집이었나?”
“예.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확인해 봐.”
감찰영주의 명령에 따라 복면인들이 집 안을 살펴보기 위해 방문을 여는 순간 후끈한 내부의 공기가 밀려 나왔다.
“어!”
그에 대한 복면인들의 감상은 짧았다.
그리고 그 짧은 감탄사가 그들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폭발하듯 솟구치는 화염이 그들을 덮친 것이다.
복면인들은 불길에 휩싸여서 춤을 추다가 하나둘 미지근해진 땅바닥에 쓰러졌다.
불은 모옥을 심지 삼아 하늘 높이 치솟았다.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멀찍이 물러선 나머지 일행은 자신들의 앞에서 벌어진 참극에 말을 잃고 말았다.
한순간에 3명이나 되는 복면인이 불길에 타 죽은 것이다.
아무리 죽음에 익숙하다고 해도 동료가 불에 타 죽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경험은 그들에게도 처음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감찰영주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밀전은 경사에 국한된 조직이 아니었던가? 이곳에도 은밀전의 은신처가 있었다고? ······빈집이 아니었어! 누군가가 이곳에 있었다. 당장 추적이다!”
감찰영주의 중얼거리던 독백은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온 방향이 아닌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바닷가 쪽이었다.
*
이한은 자신의 실력으로는 추적자들을 떨쳐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최소한 예닐곱은 될 무림인을 상대하다니!
그것은 무리가 아니라 불가능이었다.
그리고 모옥에 설치해놓은 기관이 추적자들의 발목을 잡는 것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무림인은 뒤통수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피하는 자들이었다.
기름을 갑자기 뿜어내며 터뜨린다고 해도 몇 명이나 잡아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운이 좋으면 한둘은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설령 한 명도 잡아내지 못해도 남아있을 그의 흔적을 모두 태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가 믿는 것은 만약을 대비해서 오래전부터 미리 준비해놓은 조각배였다.
그것이 바로 그의 구명줄이었다.
이한은 일단 조각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면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해도 자신을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걸어서 물 위를 건넌다는 등평도수를 흉내라도 내려면 최소한 중견 문파의 장로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설마 그런 자가 추적자 노릇을 하고 있을 리가.
그리고 만약 주변 어촌에서 사람을 동원해서 배를 띄운다고 해도, 그럴 정도의 시간이라면 충분히 멀리 도망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이를테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 도시인 복주같은 곳으로 말이다.
언제나 보는 얼굴만 보는 보통의 농촌 마을과 달리 항구도시에서는 토박이보다 낯선 이가 더 많은 법이다.
조각배를 타고 도착한 외지인 하나가 몸을 숨기는 것은 숲에다 나무 조각 하나를 숨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이한이 바다로 배를 띄우고 저어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추적자들이 등장했다.
횃불을 든 자들이 해변에 나타나서 우왕좌왕하다가 일부는 근처에 있는 마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한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니 어서 계획대로 복주로 가야 했다.
아직 밤일 때,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을 때,
최대한 저들과 멀어져야 했다.
그 이후의 일은 복주에서 고민하면 충분했다.
고민의 결과는 목에 걸린 주머니가 좌우하지 않을까?
무엇이 이 안에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은밀전의 밀위가 목숨과 바꾼 것이었다.
절대로 평범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목으로 손이 갔다.
손을 댄 김에 주머니가 목에서 벗겨지지 않게 짧게 고쳐 맨 후에 다시 노를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해변의 횃불이 일제히 꺼졌다.
이한의 머리가 쭈뼛하고 곤두섰다.
그의 육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당장 몸을 숨겨라!
그러나 그의 몸은 경고를 쫓아가지 못했다.
어떻게 할 틈도 없었다.
무엇인가가 날아와서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는 사실만 뒤늦게 깨달았다.
불에 달군 인두가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이한의 눈이 가슴으로 향했다.
가슴에서 피가 번지고 있었다.
옷에 난 구멍은 왕 밀위의 가슴에 난 구멍과 비슷해 보였다.
왕 밀위를 죽인 무기였을까?
이한은 그제서야 저들이 왜 갑자기 횃불을 껐는지 알 수 있었다.
밤중에 멀리 보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 빛이 있으면 안 된다.
특별히 눈이 좋은 누군가가 별빛에 의지해 자신을 저격하려고 주변의 횃불을 모두 꺼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자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그자가 던진 것이 이한의 가슴을 깔끔하게 관통해 버렸으니 말이다.
아마도 작은 비도 같은 것이리라.
그래도 하필 갈비뼈 사이를 관통하다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한은 두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쓰러지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하지만 보고 듣는 것은 아직 정상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눈앞에 다가오는 검은 바다를 보며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이대로 바다에 빠져 죽을 수는 없다!
이한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그의 의지를 배신했다.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가능한 일이 있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 있는 법이다.
가슴을 관통할 정도의 부상이라면 의지만으로 어떻게 하기에는 너무 큰 상처였다.
만약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만 했다면!
이한은 이곳에 온 후로 먹통이 되어버린 그의 조력자가 너무도 아쉬웠다.
이제는 정말 포기해야 하는 걸까?
바다에 빠진 채 둥둥 떠다니던 이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해서 피를 잃어버린 영향을 느끼기 시작했다.
의식이 깜빡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의식을 잃으면 죽음이었다.
이한은 점점 멀어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저항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멀리서 들리는 익숙한 기계음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사용자의 생체신호가 비정상임을 감지했습니다. 사용자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긴급구조 프로토콜 1115에 의거하여 시스템 나노는 사용자의 신체에 대한 제어권을 가져옵니다. 이 조치는 사용자의 생체신호가 안정된 후에 해제할 예정입니다.]
[나노머신의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나노머신의 급속 생산을 위해 신체의 자원을 최대한 사용할 것임을 사용자에게 알립니다. 사용자의 명시적인 반대가 없다면 찬성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나노머신 생산을 위한 자원이 부족합니다. 사용자로부터 1미터 반경 이내에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할 수도 있음을 알립니다.]
[사용자의 호흡을 피부호흡으로 전환합니다.]
[사용자의 손상된 조직을 복구합니다.]
[사용자의 혈액 생산을 가속합니다.]
[사용자의 ······]
기계음은 계속되었다.
기계음은 해류를 따라 바닷속에서 흘러 다니던 이한이 육지에 닿고서야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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