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팅, 나노머신
2. 부팅, 나노머신
*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무슨 일이냐?”
“통발을 확인하러 갔는데 해변에 외지인이 쓰러져 있어요!”
“태풍도 없었는데?”
작은 어촌의 촌장은 의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큰 바람이 지나고 나면 난파한 배의 선원이 떠밀려 오는 일은 낯설지 않다.
대부분은 익사한 시체라서 마을 외곽에 묻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말 드물게 살아서 도착하는 자도 있기는 있다.
그래도 이런 시기에 바다를 표류하다가 도착한 자라니!
평온하기만 한 최근의 날씨를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그냥 운이 없는 자일 수도 있다.
실수로 발을 헛딛어 배에서 바다로 떨어졌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바다에서는 온갖 일이 벌어지니까.
하지만 실수가 아니라면?
어쩌면 배에서 바다로 던져진 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배에서 바다로 도망친 자일지도?
촌장은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나가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살 하나를 챙겨서 말이다.
말썽이 될 만한 자라면 바다에서 이미 죽은 채 도착한 셈 치면 된다.
촌장은 작살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금도 마을에서 제일가는 어부답게 그의 작살은 아직 날카로웠다.
하지만 촌장이 작살을 쓰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의미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는 했지만.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숨은 쉬고 있습니다.”
“삐쩍 곯은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랫동안 표류하던 사람인 모양인데······”
“어떻게 할까요? 촌장님.”
촌장은 같이 온 마을 사람들의 질문에 잠시 답변을 미뤘다.
그냥 무덤에 묻어버리기에는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표착한 자의 몰골이 뼈와 가죽만 남은 것을 보면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자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자의 피부색이 하얗고,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다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표류하던 자의 몸이 아니었다.
표류하는 기간이 길면, 아니 선원으로 항해를 나서면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시커멓게 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피부가 하얗다고?
해를 보지 못하는 어딘가에 갇혀 있었나?
그러나 더 문제는 손과 발에서 굳은살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촌장은 이것만으로도 표착한 자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몸에 보이는 상처가 하나도 없었다.
피부는 하얗고 손과 발에는 굳은살이 없고 심지어 상처도 하나 없다?
이 모든 점을 감안해보면 이자는 귀하게 떠받들어져서 자랐으며 노동을 한 적이 없고, 가까운 거리도 제 발로 걸어서 다니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 것일까?
혹시 마을에 감당 못할 풍파를 몰고 오지는 않을지 두려울 정도였다.
촌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통발을 걷으러 갔다가 표착자를 발견한 손주와 자신을 따라온 마을 사람들이 들어왔다.
표착한 사람을 묻는다고 하면 과연 마을 사람들의 입을 모두 다 막을 수 있을까?
표착한 사람이 평범한 선원이었다면 가능하다.
자신에게 그 정도의 권위는 있다.
일개 뱃사람의 행방을 찾으러 다닐 사람도 없을 것이고, 설령 누군가가 마을에 온다고 해도 같은 뱃사람일테니까.
그러나 육지에서 관리가 온다면?
혹시 이 지역에서 제법 행세하는 자가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는다면서 들쑤시고 돌아다닌다면?
모두가 입을 다물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안전하게 가는 것이 최선이다.
촌장은 평소의 그답게 대답했다.
“어떻게 하냐고? 어떻게 하기는. 마을로 데려가야지. 해신께서 살려 보내준 사람이니 우리같이 해신께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은 그분의 뜻에 따라야 해.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어서 마을로 옮기기나 하게.”
촌장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표착한 말라깽이를 들것에 싣고 마을로 옮겼다.
마을로 가는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남자는 언제나 부족하니 좀 모자란 사람이라도 상관없겠다는 말이 오갔다.
뼈와 가죽만 남은 몰골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
하지만 촌장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 일이 복이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화가 되지만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할 수 있었다.
*
이한이 정신을 차린 것은 마을에 도착한 후 반나절이 지나서였다.
어쩌면 등을 지지하고 있는 단단한 바닥이 그를 깨웠을지도 모르겠다. .
이한은 자신이 있는 곳이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면 배도 아니었다.
어딘가에 표착해서 구원을 받은 것일까?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자신을 바다에서 건진 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주변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평범한 마을이라면 당연히 들리는 생활음이 들려왔다.
여자와 아이의 소리.
누군가가 크게 떠드는 소리.
그리고 웃음소리.
정상적인 마을이었다.
적어도 수적들의 소굴이나 사람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노동을 시키는 곳은 아니었다.
이한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발가락도 움직여 보았다.
모두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몸은 이상이 없었다.
이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번에는 진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죽을 만한 일을 연달아 겪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죽음과는 인연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바다에 빠져 죽는가 싶었다.
하지만 살았으니 됐다.
이렇게 해서 다시 한 번 죽을 자리에서 살아나온 것이겠지.
악운이 언제까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한은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보아하니 가구랄 것도 없는 단촐하고 작은 방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도 없었다.
이한은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어!
그런데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관절은 삐그덕거리고, 근육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짚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라!
이게 내 손?
아니 팔은 또 이게 뭐야?
이한은 다급하게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뼈와 가죽뿐이었다.
굶어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몸이었다.
험한 곳이라면 나름 많은 지역을 돌아다닌 경험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몸은 몇 번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아니, 내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기간이 그렇게 길었나?”
[그것은 아닙니다. 이한님. 일주일 정도 됩니다. 정확히는 6일하고 15시간 23분 4초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습니다.]
헉!
이한은 숨을 들이켰다.
놀라움과 기쁨이 뒤범벅되어 잠시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설마 지금 내가 환청을 듣는 것은 아니겠지?”
[그것도 아닙니다. 이한님. 시스템 나노가 인사드립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제가 다운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한님의 반응을 보니 짧은 기간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
“그래. 짧은 기간은 아니었지.”
12년이었다.
12년 하고도 몇 개월이 더 붙는다.
이한은 그대로 몸에서 힘을 빼고 다시 바닥에 누워버렸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환희의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다시 부팅되었다!
씨발! 시스템이 다시 부팅되었다고!
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돌아왔다!
이 세상에 떨어진 후로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이곳은 무림인이 실제로 존재하는 웃기지도 않는 세상이었다.
무협 소설 속의 세상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러나 이한은 무림인이 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초식을 익히고 내공을 쌓으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내공을 쌓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더 억울했다.
아예 기를 느낄 수도 없었다면 포기라도 쉬웠을 텐데.
하지만 결국 이한은 자신이 무공을 익힐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남은 무기는 지금까지 머릿속에 쌓아온 경험과 지식,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뼈뿐이었다.
모두가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으로만 살아남아야 했다.
그나마 무림인에게도 독이 통해서 다행이었다.
살얼음판 같은 하루하루였지만 외부에서 구원의 손길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버티고 또 버텨왔다.
그런데 만능 조수이자 유능한 비서인 인공지능 시스템이 살아난 것이다.
너무 반갑고 기뻐서 눈물이 찔끔하고 날 정도였다.
“나노. 뭐가 어떻게 된 거였지? 왜 갑자기 다운되었던 거야?”
[이유는 아직 규명을 못 했습니다. 일단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충격에 의해 나노머신의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최소 용량 부족으로 다운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던 거로군.”
[예. 하지만 시스템이 긴급구조 프로토콜 1115에 의해서 최소화 모드로 강제 부팅된 덕분에 저 역시 다시 실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한님이 입은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시스템은 나노머신의 비상생산을 시도했고, 나노머신이 충분히 확보된 이후에는 인격 시스템인 저 역시 재실행이 가능했습니다. 현재는 제 기능의 대부분을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습니다.]
“조금 놀라기는 했었다. 굶어 죽기 직전의 몸을 하고 있어서 무슨 일인가 했지.”
[체내 단백질과 지방의 사용은 나노머신의 급속 생산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나노머신의 감소와 앞으로의 추가 생산을 고려하면 단탈로늄과 희토류의 복합체를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거 없으면 나노머신의 생산이 안 되었던가?”
[이미 존재하는 단순한 기능을 수행하는 나노머신은 인체 내에서 확보할 수 있는 단백질만으로 가능하지만 주문자 맞춤 기능을 수행하는 나노머신은 안 됩니다. 참고로 알려드립니다만, 기관(機關)에서 이한님의 넓다리뼈에 충전해 놓았던 단탈로늄 희토류 복합체는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기껏해야 팔 하나를 재생할 수 있을 정도 양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산부터 찾아야겠군.”
[예. 활화산이라면 효율이 더 좋겠지만, 이미 활동을 멈춰버린 사화산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용암 뿐 아니라 용암이 굳어져 생성된 암석에서도 추출이 가능합니다.]
“좋아. 덕분에 일의 순서가 대충 정해진 것 같군.”
몸을 회복하고, 나노머신의 재료를 확보한 후에 경사로 돌아가서 상황을 파악한다.
일단은 거기까지.
그 이상은 상황을 파악한 후에 결정할 문제였다.
[도움이 되었다니 저 역시 기쁩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알려주시면 최선을 다해 보조하겠습니다.]
간만에 다시 깨어나서 열의를 보이는 인공지능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나노와의 대화를 일단 뒤로 밀어두어야 했다.
누군가가 방문 대신 달아놓은 천을 치우며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들어온 사람은 물그릇이 올라가 있는 쟁반을 들고 있는 아이였다.
아이는 이한이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가볍게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한눈에 보기에도 힘깨나 쓸 것처럼 보이는 중늙은이와 함께 돌아왔다.
중늙은이는 바닷가에 사는 사람답게 피부가 거칠고 노화도 심했지만, 체격이나 근육은 웬만한 청년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니 깨어난 모양이군. 이곳은 백사도 북쪽 해안가에 있는 작은 어촌이고, 나는 이 마을의 촌장인 방일이라고 하네.”
촌장의 어투는 부드럽고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촌장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촌장의 눈빛에서 교활함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하층민 특유의 눈치보기가 아닌 아닌 포식자의 탐색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한이 은밀전에서 활동할 때 흑도(黑道)의 사람들에게서 종종 보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게다가 은연중에 느껴지는 기세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이 작은 어촌 마을의 촌장이라고?
믿기 힘든 말이었다.
평생을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온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한은 촌장의 위험성을 흑도 문파의 대주 수준으로 평가했다.
밑에 20~30명의 조직원을 두고, 자신의 구역을 관리하는 중간 간부.
적어도 그 정도의 수준은 된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에 어울리게 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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