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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3화 (3/78)

3. 어촌에서 경각심을 느낌

3. 어촌에서 경각심을 느낌.

이한은 촌장을 흑도에 속한 사람을 상대하듯 대하기로 했다.

하층민에게 하듯 명령하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입에는 이득을 물려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몸 상태가 괜찮다면 다른 방법을 고려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제 몸이 이 모양이라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경사에 사는 이한이라고 합니다. 바다에 빠져서 곤란을 겪던 사람을 구해주시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은혜는 무슨. 그리고 객을 발견한 사람은 내 손주이니 은혜를 갚고 싶다면 내 손주에게나 하시게.”

“물론입니다. 잊지 않고 보은하겠습니다.”

“그런데 멀리 경사에 사는 사람이 어쩐 일로 이런 촌구석까지 와서 변고를 당한 거요?”

“가문의 일로 복주에 왔다가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운이 없었지요. 사실 지금도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촌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허허허. 그러면 어서 가문에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겠소? 가문의 어른들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경사에 사람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제국의 수도에 가문이 있고, 재산도 제법 있다는 티를 낸 것이다.

촌장은 이한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금방 알아들었다.

그의 얼굴색이 밝아지면서 태도까지 한결 부드러워졌다.

“육지로 가는 배가 없어서 지금 당장은 안 되겠고, 두 달은 기다려야 할 거요. 그때쯤이면 육지에서 상인이 오거든. 아 참. 민아야. 이 대협의 물건을 가져오너라.”

촌장의 뒤에 숨어있던 아이가 뛰어나가더니 잠시 후 이한의 옷과 소지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옷 같은 것은 다시 가져올 수 있겠지만, 무기는 물론이고 돈이 들어있는 전낭까지 그대로 다시 가져오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이런 촌구석에서는 구경도 못 할 액수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전낭을 돌려준다고 해서 그냥 받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이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전낭을 통째로 촌장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지금 당장 내가 가진 것은 이것뿐이니 약소하게나마 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나를 구해준 것에 대한 사례는 경사에서 온 사람들이 해 줄 겁니다.”

“이 대협은 사람 사이의 도리를 아는구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을에서 푹 쉬게나. 배가 오면 알려주도록 하겠네. 그때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그 뒤로는 마을의 손님 대접이었다.

해산물 뿐이었지만, 질릴 정도로 먹을 수 있었다.

이한은 푹 쉬고 잘 먹으며 몸의 회복에 집중했다.

뼈와 가죽만 남았던 사람이 불과 이틀 만에 사람 꼴을 하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한이 문밖으로 나온 날,

이한은 지금까지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행운이라는 녀석이 이제부터는 친하게 지내자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저것은 화산 같은데.”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에서 검은 연기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것은 화산이었다.

그것도 지금 활동 중인 활화산.

“맞아요. 이 대협. 제가 어렸을 때 저 산이 크게 화를 내서 마을까지 불똥이 떨어졌다고 해요. 그때 산에 살던 차오족 마을이 모두 없어져서 지금도 산 주위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 원혼이 나온다는 말도 있고, 아직 산의 분기가 안 풀려서 가까이 오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도 있어요.”

이한의 혼잣말에 옆에서 시중을 들던 촌장의 손자가 종알거렸다.

이름은 방주민.

나이는 이제 10살을 약간 넘긴 정도?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쁘게 생긴 아이였다.

이한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농을 건넸다.

“내가 화산을 구경해본 적이 없어서 우리 민아의 안내를 받아 구경을 갈까 했었는데, 그렇게 무서운 곳이라니! 아쉽구나. 단검을 구경값으로 줄까 했었는데.”

“아앗! 머리카락이 뽑혔어요.”

“미안하구나. 머리카락이 엉킨 모양인데.”

“흥. 단검은 탐이 나지만 할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실 거에요. 마을 밖에 나가는 것도 뭐라고 하시는 분이니까.”

“그러면 단검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서 부탁을 해봐야겠구나.”

이한의 말에 아이는 살짝 토라져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

단검을 보니 탐이 났던 모양이었다.

이한은 근처에 주저앉아서 햇볕을 쬐기 시작했다.

돈 많은 마을의 손님에게 보이던 관심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수그러들었다.

이한은 자신을 살피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손에 쥐고 있던 아이의 머리카락을 입에 넣고 삼켰다.

“이봐. 나노. 너는 진짜 이상한 짓을 시킨 거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거 완전 변태로 보일 거다. 남자애의 머리카락을 몰래 훔쳐서 먹다니. 웩.”

[이곳 사람들에 대한 유전자 데이터 확보 차원에서 하는 일이니까 협조해주십시오. 제가 열심히 연구해서 이곳 사람들과 이한님의 신체적 차이를 확실히 알아내겠습니다. 이한님도 무공이라는 것을 익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립니다만, 남자애가 아니라 여자애입니다.]

“......촌장이 뭔가 수상스럽기는 했지. 그래도 여자애를 남자애로 속여서 키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직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겁니다.]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긴장이 풀렸던 모양이군.”

아무리 아이라도 겉모습에 속아넘어가다니.

이한은 나노머신이 되살아난 후 자신이 안일해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력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인공지능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만으로 긴장이 풀린 것이다.

조만간 무림인이라는 규격 외의 존재들이 활보하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런 식의 마음가짐으로는 곤란했다.

스스로를 다그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등산이었다.

목적지는 멀리 보이는 활화산.

목적은 나노머신의 재료확보.

한 달이면 왕복하고, 재료를 확보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혹시 모를 추적도 감안해야 했다.

황실의 숨어있는 손들 중 하나인 은밀전을 말살하고 살아남은 밀위를 쫓아온 자들이었다.

그것도 경사에서 제국 남부까지.

과연 그들은 누굴까?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바다에서 행방불명된 자를 찾아서 주변 바다를 수색하는 것?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돈과 인맥만 있다면 일개 상인조차 가능한 일이니까.

그런데 수색 중에 바다에서 떠밀려 온 자가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끌고 가면 다행이다.

어쩌면 일단 죽이고 볼지도 모른다.

역시 당분간은 마을을 떠나서 지내는 것이 맞았다.

며칠 후 몸을 완전히 회복한 이한은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이한의 잠적은 촌장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마을을 떠나? 왜?”

얼마 동안 주변의 풍광을 즐긴 후 돌아오겠다는 짧은 글을 남겼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몸도 아직 성하지 못한 사람이 식량만 조금 챙겨서 마을을 떠나다니.

심지어 전낭을 통째로 넘기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말이다.

도망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면 왜? 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촌장은 그 이유를 상상할수록 불안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촌장의 불안은 불안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

“여기는 또 어디야?”

“복주 남쪽으로 며칠 거리에 있는 섬입니다. 백사도라고 하는데, 십여 년 전에 화산이 크게 터져서 살던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보시는 것처럼 화산에서 연기가 솟고 있지요.”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곳이로군.”

“그래도 마을이 몇 개 있기는 합니다. 철마다 장사하러 가는 상인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철마다 갈 정도라면 쓸만한 것도 없겠군. 기껏해야 말린 생선 아니면 젓갈이나 쌓아둔 곳이겠어.”

“이런 곳의 어촌이 다 그렇지요. 섭 당주님. 그래도 명색이 마을이라고 오두막이나마 저렇게 10채가 넘게 모여 있는데, 설마 모아놓은 것이 없겠습니까?”

해룡방에 있는 다섯 척의 용두대선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독두룡(禿頭龍) 섭중악은 부선장의 설명에 짜증을 내며 툴툴거렸다.

사실 그는 지금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한 것 때문에 불만이 하나 가득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 상선 하나를 약탈하고 돌아와 기루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다로 나가라는 명령이 해룡방주로부터 떨어진 것이다.

바다로 도망친 놈이 있다나?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복주 인근의 바다와 근처의 섬들을 수색하라는 명령이었다.

처음 명령을 들었을 때는 자신이 해룡방주에게 무엇인가 실수한 것이 있나 싶었다.

약탈한 재물을 빼돌린 것?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를 묶어서 바다에 집어 던진 것?

그것도 아니면 여기 기루에 해룡방주가 마음을 둔 기녀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사람을 바다에서 수색하라니 말도 되지 않은 명령이었다.

저 넓은 바다에서 사람 하나를 어떻게 찾으란 말인가!

모래 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슬쩍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니 해룡방과 관련이 있는 경사의 상인을 통해 청탁이 들어왔던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경사의 배불뚝이가 헛소리를 했고, 해룡방주는 맞장구를 쳐준 것뿐이었다.

자신 역시 적당히 바다를 돌아다니다가 돌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혹시 모르니까 시체 몇 개를 들고 가면 뭐라고 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겸사겸사 어촌에 들러서 수금까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독두룡 섭중악은 용두대선에서 나룻배를 내려 몇 명의 부하와 함께 마을로 들어섰다.

말을 잘 들으면 수금으로 끝나는 것이고, 반항하면 시체까지 이곳에서 구할 요량이었다.

그럴 요량이었는데.

하! 이런.

섭중악은 기대하지 않았던 과거의 인연을 만나고 말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장강의 방 선배가 이런 곳에서 어부가 되어 있다니!”

“대머리 섭가로구나.”

“하하하. 방 선배. 입심은 여전하시구랴. 이렇게까지 몰락했어도 거침없이 내지르는 모습을 보니 방 선배가 장강에서 날뛰던 과거가 기억나는구만. 내 거치도에 당한 부상은 다 나으셨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쓸데가 없지는 않지. 방 선배는 부상을 입고 끝났지만 그때 죽은 해룡방의 형제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어떻소? 지금도 그때처럼 날뛸만한 기력이 있으시오?”

“나는 장강수로연맹에서 이미 떠난 사람이다. 해룡방과의 은원 역시 과거에 묻었다.”

“은원이라는 것이 묻고 싶다고 해서 묻을 수 있는 것이던가? 방 선배. 약해지셨소이다.”

이죽거리며 거치도를 뽑아드는 섭중악을 보며 방일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한 때, 장강수로연맹의 말석에 이름을 올려놓았던 적이 있었다.

섭중악은 그때의 악연이었다.

방일은 집에 놓고 온 작살이 아쉬웠다.

하지만 작살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작살을 놓고 그물을 잡은 기간이 너무 길었다.

장강수로연맹의 방일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후였다.

그리고 오늘, 촌장 방일도 죽을 모양이었다.

*

장강수로연맹의 방일이 해룡방의 섭중악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이한은 촌장으로부터 돌려받은 주머니를 열어보고 있었다.

은밀전의 왕 밀위가 그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아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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