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4.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왕 밀위가 이한에게 남긴 주머니에는 문서 하나가 들어있었다.
물론 은밀전에서 나온 문서답게 평범한 문서는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안부 편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안부 편지의 마지막 문구에 따라 어떻게 문서를 다루어야 하는지 미리 정해진 절차가 있다.
우선 종이에 열을 가하는 방법이 있다.
대개는 촛불을 이용하지만 종이에 열을 가할 수 있다면 수단은 상관이 없다.
다음에는 물에 희석한 특수한 염료를 바르는 방법이 있다.
어떤 염료를 사용하는지는 은밀전에서도 몇 명밖에 알지 못하는 기밀이었다.
마지막으로 흑연 가루를 뿌리고 흔드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볼 수 있어서 실무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나기를 기원한다.’
문서의 마지막 문구였다.
그중에서도 ‘이른 시일’이 바로 약속된 문구다.
이 문구는 문서에 열을 가하라는 의미였다.
이한은 작은 용암 덩어리를 떠와서 주머니에서 꺼낸 문서를 가까이 댔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용암의 온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심지어 촛불보다도 낮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해서 일부를 퍼오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었다.
용암의 열기에 문서가 살짝 그을릴 정도가 되자 노란색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색 글자는 은밀전의 사람 중에서도 따로 읽는 법을 배운 사람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 암호로 일종의 발음기호였다.
의외로 문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은밀전주가 만남을 요청하는 것이 다였다.
만남을 위한 날짜와 장소, 그리고 당사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별도의 비표가 있는 곳도 쓰여 있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무엇 때문에 부르는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문서 자체는 은밀전에 말살령이 떨어지기 전에 작성된 것이 분명했다.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은밀전주가 알아채고 이한을 호출한 모양이다.
너무 늦게.
왕 밀위는 문서를 전달하러 오던 중간에 공격당한 것이 분명했다.
이한은 다 읽은 문서를 용암 덩어리에 던졌다.
불길이 확 솟았다.
은밀전의 밀위들은 대부분 무공을 익히고 있다.
특히 은밀전주의 무공은 쉽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계기만 주어진다면 절정고수의 경지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을 부른 것이다.
이한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 무공도 없는 사람을 불렀을까?
그것도 사실상 은밀전에서 떠난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물리적인 힘이 필요해서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독이든, 암살이든 이한을 대체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면 조언일까?
무엇에 대한?
은밀전주는 이한이 가진 거시적인 통찰력에 대해 높은 평가를 했었다.
돈을 버는 방법은 물론이고 어쩌다 드러나는 생소한 지식과 특이한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흥미를 보이며 캐물기도 했었다.
은밀전주가 구태에 이한을 불러서 의견을 물을 일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본인으로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어떠한 일이 생겨서 이한을 불러들인다고 생각하면 그럴듯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직 이한의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이한은 은밀전주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밀전주가 무사할지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은밀전주가 아니더라도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이유를 설명해줄 사람이 남아 있기는 할까?
은밀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도 못하는 지금, 무공도 없는 사람이 돌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위험했다.
만약 나노머신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한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노. 아직이냐?”
[방금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이한님께서 마을 사람들의 체모를 모두 모아주신 덕분입니다.]
“체모가 아니라 머리카락! 어쨌든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군. 그렇지 않았으면 너를 그냥 다운시켜 버렸을지도 몰라.”
[음음. 그냥 다운시키기에는 제가 좀 유능하지 않습니까? 그럼 기쁜 소식들을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한님과 이곳 사람들과의 차이를 알아냈습니다. 시뮬레이션 결과 이곳 사람들 중 일부에게는 이한님에게 없는 신체기관이 존재합니다. 기를 모으고 펌프질하는 곳이지요. 이한님의 출신 지구에서 비슷한 개념을 찾을 수 있었는데, ‘단전’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래서 이 기관의 이름을 단전으로 명명했습니다. 이한님의 출신 지구에서는 그냥 상상에 지나지 않는 개념이지만 이곳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신체기관입니다.]
단전이 실제로 존재하다니!
이한은 단전을 만든답시고 온갖 고행을 감행하던 지구의 수련자들을 떠올렸다.
심지어 일부는 실제로 단전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모두 사기나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런데 이곳에서는 단전이 심장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신체기관이라고 한다.
기대 이상이었다.
“역시 그랬던 거군. 그래야 말이 되지. 하지만 단전만으로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 기가 흐르는 통로도 있어야 해. 내가 무공서적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동안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꽤 읽었거든. 길거리에서 파는 삼류 무공서적부터 은밀전의 상승심법까지 가리지 않고 말이지. 그런데 대부분의 무공서적에서는 어떻게 기를 쌓을 것인가와 어떻게 몸을 움직일 것인가가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기의 흐름에 대한 장광설이었어. 그만큼 기의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이겠지.”
[제가 기쁜 소식’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기쁜 소식을 하나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이한님은 이미 기가 흐를 수 있는 통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이한도 진심으로 놀랬다.
“설마? 말이 안 되지않나? 이건 심장은 없는데도 혈관이 존재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어.”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한님에게 경락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한님 소속의 지구에서도 아주 오래전 과거에는 사람들 중 일부가 단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표본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정확한 수치를 말씀드리기가 어렵지만, 이곳 사람들도 단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10% 미만인 것 같으니까요.]
“너희 쪽에는 이런 것이 아예 없었던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욱 놀랍고 신기합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다운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많은 정보를 모았을 텐데 아쉽기만 합니다.]
“앞으로 모으면 되겠지.”
이한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나노머신 시스템의 기능을 생각하면 정보 수집은 정말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이한님께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 좋은 소식도 하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몸에 단전을 생성할 수 없다는 소리만 하지 마.”
[그것은 아닙니다. 단전은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현재 방주민 어린이의 머리칼에서 분석한 유전자 구조를 토대로 단전을 설계 중입니다. 문제는 재료죠. 단탈로늄 희토류 복합체가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단백질 역시 그렇습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분량으로는 시도도 하지 못합니다.]
“설마 나보고 용암을 퍼먹으라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농담이었다.
그러나 나노머신 시스템의 인격인 나노는 인공지능답게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쳤다.
어쩌면 그것은 인공지능 나름의 유머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가장 효율이 좋은 방식이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이한님의 육체가 강화된 부분은 골격계뿐이라서 섭씨 1천 도의 온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용암을 물과 섞은 후 걸러낸 물을 마실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대략 2톤 정도 마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류와 상태를 가릴 필요 없이 단백질을 1백kg 정도 섭취할 것도 요청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재료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2톤?”
이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들은 단위가 맞는 것인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2톤에 달하는 물을 마실지 걱정하고 있었다.
나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2톤이라면 2톤인 것이다.
[예. 2톤. 넘치는 것은 상관없지만 부족하면 안 됩니다.]
“나노. 제대로 된 결과가 나와야 할 거다.”
[자신 있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이한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있다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사실 이한은 자신의 몸에 자리 잡고 있는 나노머신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점이 두려울 때도 있지만,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자동차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사용법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이한도 나노머신 시스템을 믿을 수 있는 조언자이자 실무자 정도로 대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말입니다. 재료의 축적이 다 끝나면 한 달 정도 가사 상태로 계셔야 합니다. 단전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러지.”
나노의 기계음에서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하는 기분을 느꼈다면 오해일 것이다.
이한은 일단 물을 마실 나무 그릇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
이한이 나노머신의 요청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때, 방일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거치도의 톱날 같은 칼날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리고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섬뜩한 예기가 목젖을 스쳤다.
방일은 자신이 늙었음을 실감했다.
관절은 굳었고, 감각은 녹슬었다.
단전에 부상을 입은 이후로도 꾸준히 몸을 단련했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낫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림인의 칼날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섭중악의 도법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몸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눈으로 보는 것조차 제대로 쫓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과거의 자신이 봤다면 그냥 나가 죽으라며 엉덩이를 걷어찰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때 장강수로연맹의 총채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던 체면에도 불구하고, 땅바닥을 구르며 발버둥을 쳤기에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직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는 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과연 통할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 했다.
손녀를 홀로 두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방 선배. 그동안 보법을 열심히 익히신 모양이외다. 나려타곤이 정말 볼만하오.”
“건방진 놈이!”
“건방진 놈? 그럼 어디 건방진 놈에게 한번 죽어 봅시다. 먼저 간 해룡방의 형제들이 반겨줄거요.”
거치도가 다시 파공음을 냈다.
해룡방주가 자신의 의형제들에게 전수했다는 용왕오식이 연이어 펼쳐진 것이다.
파도의 기세를 본떠서 만들었다는 용왕오식은 끊이지 않고 휘몰아치는 연환식을 중심으로 하는 도법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무당파의 무공을 연상시키는 도법이라서 해룡방주의 출신이 무당파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게 하는 무공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당파의 태극검법이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하기 그지없는 흐름을 가진 검법이라면, 용왕오식은 단순하면서도 패도적인 기세를 가진 도법이었다.
두 무공의 초식이 모두 연환식 중심이라고 해서 비슷한 계열의 무공이라고 할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용왕일식과 용왕오식이 이어지고 다시 용왕삼식이 따라간다.
다섯 개의 초식은 순서에 상관없이 맞물려 돌아갔다.
옆으로 휘두른 거치도는 그 기세를 타고 다시 위로 올려치고 그대로 다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주변을 쓸어갔다.
거치도의 공격 반경을 피해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던 방일은 허벅지에 불이 지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자 심장이 덜컥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공의 기본은 보법이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공격이든 방어든 가능하지 않다.
이제 끝인 걸까?
방일은 아주 잠깐 멈칫했다.
칼날에 베인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무림인에게는 아니었다.
방일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간 거치도가 그대로 방일의 팔을 찢어버렸다.
만약 방일이 팔을 내밀어서 칼을 막지 않았다면 목이 찢겨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팔이 찢기나 목이 찢기나 상관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다음 순간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이어진 용왕오식의 초식이 방일의 가슴을 꿰뚫고 멈춘 것이다.
방일이 섭중악의 목을 찌르기 바로 직전이었다.
지금까지 숨겨왔던 방일의 비수가 섭중악의 목에 살짝 닿아 있었다.
“방 선배. 잘 가쇼. 가는 김에 장강에 묻은 형제들에게 안부나 전해 주시오.”
“크큭. 주······”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가 찢겨나간 방일은 제대로 된 말도 남기지 못했다.
심지어 눈도 감지 못했다.
섭중악은 이미 명을 다했음에도 아직도 버티고 서 있던 방일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선장.”
“예. 섭 당주님.”
섭중악의 눈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의 피로는 부족한 듯했다.
부선장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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