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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8화 (8/78)

8. 지나가던 모산파의 횡재

8. 지나가던 모산파의 횡재

“이게 무슨 짓이냐!”

“보고도 모르겠소? 장 행수.”

“언제부터 마령채가 이렇게 무도한 자들이 되었나? 녹림도가 통행세를 받고도 기습하다니 보복이 두렵지 않나?”

금문상방의 행수이자 이번 운송의 책임자인 장형표의 외침은 피를 토하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녹림의 무리가 상행을 습격하는 것?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통행세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행을 직접 털어먹기로 작정한 자들은 매년 끊이지 않고 나온다.

그러나 통행세를 받아먹고도 습격을 해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산적 따위의 선의나 양심을 믿는 것이 아니다.

상인과 녹림도 간의 암묵적인 합의를 어기게 되면 우연히 지나가던 무림고수의 방문이 아니라 분노한 상인들, 특히 표국이 연합하여 직접 토벌에 나서기 때문이다.

아무리 녹림의 산채라고 해도 연합된 표국의 힘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녹림 총채라도 나서서 중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지워지고 만다.

그런데 산채의 역사도 제법 되고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지 않는 마령채에서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낮에 통행세를 받고 인사까지 나누었던 자는 비웃음을 던질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 마령채가 무도한 자들이 되었냐고 묻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그자의 커다란 칼이 장형표를 겨누었다.

달빛을 반사한 칼날이 차갑게 번득였다.

“이미 다 죽어버린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나? 마령채주가 지옥에서도 꽤나 억울해할 것 같은데?”

장형표의 안색이 더 이상 하얗게 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근처의 녹림도까지 미리 다 지워버린 후에 습격해 오다니!

이것은 단순한 산적질이 아니었다.

목적을 가진 기습이었다.

아무래도 내일 해를 보기는 힘들 모양이었다.

살짝 비웃는 기색으로 말을 하던 자는 예고도 없이 칼을 들이밀었다.

“헛!”

가볍게 찔러오는 칼의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만약 장형표가 안법을 따로 익힌 적이 없었다면 어이없게 목을 찔렸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무리 밤에는 칼이 더 빠르게 보인다고 해도, 이 정도의 속도라면 장형표의 수준은 훌쩍 뛰어넘는다.

그러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칼끝을 피한 장형표를 향해 난도질하듯 연달아 후려치는 칼날이 쏟아졌다.

반원을 그리듯 휘어진 달빛이 집요하게 장형표를 따라붙었다.

간신히 막아내고는 있지만 너무도 일방적이었다.

장형표는 단 한수도 상대방을 향해 내밀 수 없었다.

오로지 방어만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나마도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억!”

아니나 다를까.

얼굴 앞에서 흔들거리는 칼끝을 간신히 쳐 내며 뒤로 물러설 때,

화끈하는 통증이 허벅지를 때렸다.

허초로 눈을 속이고, 장형표의 칼을 유인한 후 빈틈이 생긴 하체를 찌른 것이다.

발을 묶으면 손을 묶는 것과 같다.

장형표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무림의 속설이었다.

그것은 장형표가 무공을 배울 때 무공 교두로부터 들은 무림의 속설들 중 하나였다.

들을 때는 당연히 그렇지 하고 넘어갔는데 이렇게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칼 앞에 서니 그 말은 더 이상 속설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지금까지는 상대의 공격을 막고 있었는데, 다리에 부상을 입은 순간부터는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힘도 속도도 부상 전과 달라졌다.

상대는 움직이고 있는데 자신은 쩔뚝거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상대의 칼끝이 다시 장형표의 가슴으로 찔러 들어왔다.

보기에는 일직선이지만, 단순히 일직선으로 찔러오는 것이 아니다.

몇 개나 될지 모르는 변초가 그 일직선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대응하기에는 지금 장형표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지금까지처럼 상대의 칼을 쳐내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힘이 부족했다.

칼과 칼이 얽히자마자 회전하듯 움직이는 상대의 칼에 휘말려버린 것이다.

조금만 더 여력이 있었어도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쳐내면서 물러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길게 뻗었던 칼은 현란한 변초를 구사하며 집요하게 장형표의 손을 노렸다.

한순간이었다.

장형표의 손가락이 날아가고, 곧이어 칼을 쥔 손목이 떨어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허망한 표정이 된 장형표의 가슴에 상대의 칼이 박혔다.

“상방의 일개 행수 주제에 광풍십팔도 아래서 그처럼 오래 버티다니! 돈으로 무공을 익힌 사람치고는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내세에는 좋은 곳에서 태어나길.”

장형표는 자신의 가슴에 칼을 박아넣은 사람의 말에 눈을 치켜떴다.

믿을 수 없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광풍십팔도라니!

상관세가가 왜?

그러나 장형표의 의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장형표의 귀에는 답변 대신 비명만이 들려왔다.

죽어가는 표사들의 단말마였다.

그마저도 점점 사그러들었다.

화톳불 사이로 얼핏 보이는 음영은 모두 야행복을 입은 자들뿐이었다.

금문상방에서 직접 고용한 표사들이라면 어디 가서도 꿇리지 않는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몇 명 남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상관세가같은 무림의 명문세가가 죽이겠다고 달려든 일이다.

그들과 같은 일개 상단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끝장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장형표는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

금문상방이 복주에서 경사로 나르던 상품은 크게 두 가지 종류였다.

한 종류는 잘 포장된 채 수레에 실려 가는 약재였다.

대부분은 약재로 사용되는 광물이었고 일부는 곤충과 식물에서 채취한 마약성 진액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종류는 사람이었다.

사람?

사람이 상품이라고?

10년짜리 계약의 임금노동자를 향해 상품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 들리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명목상의 계약노동자일 뿐 실상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노예는 상품이 맞다.

10년짜리 계약을 하면서 받아야 할 선금은 소개비와 식비 등으로 공제되어 만져보지도 못한다.

물론 절반 정도 남은 잔금은 그들의 손으로 들어갈 것이다.

10년 동안 먹지 않고, 옷은 훔쳐 입고, 길거리에서 잠을 잔다면 말이다.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10년 동안 먹고 입고 방을 빌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서 다시 빚을 져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10년 계약의 선금이 된다.

늙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그것을 노예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를까.

그래서 이들의 계약을 알선하는 복주의 상인들은 종종 노예상인라고 불렸다.

선금과 고리대로 꽁꽁 묶어서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 임금노동자가 노예나 다름없다면 그런 계약을 주선하는 상인들을 노예상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 정도로 악독한 계약임에도 불구하고 계약 노예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그 계약에서 보장하는 조건이 더 나은 환경인 사람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굶어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노예처럼 행동했다.

묶어놓지 않아도 제 발로 상단의 이동을 순순히 따라오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들끼리 이탈자를 단속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 금문상방의 행렬은 달랐다. .

눈치를 보면서 명령을 기다려야 할 상품들이 기회를 틈타 허겁지겁 도망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 사이에 돌던 소문 때문이었다 .

가면 죽는다.

깊고 깊은 동굴 속에서 땅을 파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다.

길어야 일 년이나 살 뿐이다.

심지어 죽은 자들까지 부려 먹는다더라.

누구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멋모르고 죽을 장소로 가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품은 누군가가 슬쩍 흘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누구에게서 시작된 소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금문상방에서는 당연히 헛소문이니 신경도 쓰지 말라고 단속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불안감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게다가 제국 남부의 섬이나 해안이 아니라 경사가 있는 북쪽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다.

사탕수수를 재배하거나, 염전에서 일하는 것은 그들에게 친숙한 일이었다.

돌을 캐거나 생선을 잡는 것도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경사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평생을 좁은 세계에서 갇혀 살아온 하층민의 머리로는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런 칼부림이라니!

그래서 그들은 기회가 오자 도망을 쳤다.

그것은 방주민도 마찬가지였다.

방주민은 싸움이 시작되자 조용하게 몸을 숨겼다.

다들 싸우느라고 또는 도망치느라고 바빠서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싸움이 벌어진 장소에서 조금 멀어진 후에는 정신없이 달렸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목덜미를 잡아챌 것 같은 두려움에 쫓겨 좌우가 보이지도 않았다.

한밤의 산속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할아버지를 죽인 자들로부터 멀리 도망을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산속에 홀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손발은 상처투성이였고 옷은 흙과 풀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어느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을 알 수가 없었다.

날이 밝아오기는 했지만, 불과 몇 걸음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짙은 새벽안개가 그녀의 앞을 막고 있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하지만 되도록 멀리 도망쳐야 했기에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마실 물도, 먹을 과일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든 이곳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한참을 안개 속에서 헤매던 방주민은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이는 느낌과 함께 공터에 발을 들였다.

주변은 짙은 안개로 휩싸여 일장 앞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 공터에는 안개가 없었다.

“세상에나! 은천둔형진을 뚫고 들어온 아이가 있다니.”

여자 목소리였다.

방주민은 그제서야 모닥불과 그 주변에 앉아있던 네 명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옆에는 노새 한 마리가 한가롭게 하품을 하고 있었고, 모닥불 위에는 무엇인가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작은 솥이 하나 걸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던 방주민은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서 있는 방주민을 보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눈매가 선하게 생긴 중년의 여자 도사였다.

“이런. 옷이 엉망이구나.”

그녀는 엉망이 되어 있는 방주민의 옷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옷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는 발을 보고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어디선가 신발을 잃어버렸는지 맨발이었다.

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구나.”

여도사는 방주민을 그대로 안아 들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안전한 냄새가 났다.

방주민은 까무룩 의식을 잃고 말았다.

키가 큰 여도사는 방주민을 모닥불 옆의 잠자리에 뉘었다.

그러자 살짝 후덕하게 생긴 여도사가 방주민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오호. 미모가 상당한 아이로군요. 이렇게 어린아이가 새벽까지 산속을 헤매다니. 아마도 산 아래에서 무슨 소란이라도 생긴 모양입니다.”

“이곳은 마령채의 영역인데 이상한 일이로군. 아무래도 확인할 필요가 있겠네.”

키가 큰 여도사는 다른 두 명의 여도사에게 주변을 수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들이 떠나자 지금까지 그녀와 대화하고 있었던 후덕한 여도사가 안색을 달리하며 말을 했다.

“그런데 사저께서는 이 아이가 탐이 나시는 모양입니다.”

“역시 사매의 눈은 피할 수가 없네.”

“아이를 안으면서 맥문을 잡고 신체를 살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은천둔형진을 뚫고 들어온 아이였거든. 특별히 위험할 것도 없고 진법을 좀 익힌 사람이라면 드나듦에 문제가 없는 진이라지만, 이처럼 어린아이가 우연히 통과할 만한 것은 아니지. 기감이 뛰어나리라는 것은 당연했고, 혹시 영문(靈門)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닐까 기대했다네.”

“어떻습니까?”

“역시 예상이 맞았네. 나중에 기경팔맥에 체질까지 제대로 살펴보아야겠지만 무공을 익히기에도 극상의 신체인 듯 해. 부적술과 무공을 모두 익혀야 하는 우리 모산파에게 딱 어울리는 인재인 것이지.”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관 사저께서 제자를 들이게 되는군요.”

“관상을 보니 부모는 진작에 잃었을 것이고, 지금은 의지할 만한 사람조차 없는듯 하네. 그러니 모산파가 이 아이의 둥지가 되어주고 이 아이는 모산파의 기둥이 되어주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겠지.”

“영문이 열려있다니 강신(降神)법 또한 가르칠 만하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아직 제자로 들인 것도 아닌데 너무 빨라.”

중년의 여도사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뛰어난 제자를 들이는 것은 문파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처럼 속세를 떠나 도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재질을 가진 제자 후보가 스스로 걸어들어오다니 그들에게는 횡재나 다름없었다.

주변을 수색하라고 내보낸 여도사들이 돌아온 것은 두 시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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