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한과 같은 존재가 더 있다
15. 이한과 같은 존재가 더 있다
디멘션이늄.
이한의 기억에도 있는 단어였다.
금이나 은, 드물게는 수은 같은 금속이 차원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변성되어 생기는 금속이다.
본래의 물성보다 더 단단해지고, 초전도성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방사성 물질처럼 수천 년에 달하는 반감기를 가지고 붕괴하면서 본래의 금속으로 돌아가는데 이때 특이한 파장을 뿜어낸다.
나노는 이한과 노랑머리 도사가 충돌하는 순간, 지팡이에서 그 파장을 측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나노의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노랑머리 도사의 공격부터 막아야 했다.
검과 지팡이 사이의 충돌로 생긴 반동을 이용하여 뒤로 훌쩍 몸을 날린 이한은 자신을 향해 연달아 찔러오는 지팡이를 쳐냈다.
노랑머리 도사의 지팡이는 전체가 금속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끝은 뾰족했다.
그 날카로움은 사람의 몸에 구멍을 뚫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한을 향해 내지르는 지팡이의 속도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일반인의 몇 배는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한으로서는 도저히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쾌(快)를 극단적으로 수련한 자일까?
그러나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지팡이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너무너무 정직하고 일직선인 공격뿐이었다 .
만약 지팡이의 움직임에 약간이라도 변초가 섞여 있었다면 이한은 절대로 저 공격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하지만 노랑머리 도사는 빠름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한은 한 가닥 의심이 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무공 초보 같은데?
그리고 연달아 찔러오는 지팡이를 쳐내며 확신하게 되었다.
초보 맞네.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식만 본다면 무공의 입문자나 다름없었다.
변초와 허초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빠르게 찌르는 것이 전부였다.
문제는 그 빠름이 허초가 곧 실초로 변하는 경지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
하지만 제대로 된 실력이 아니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변화를 섞어주면 그만이다.
찔러오는 지팡이를 쳐내는 초식에 변화를 줘서 오히려 잡으려고 시도하는 것도 괜찮고, 역으로 상대에게 공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돌이라도 던질까?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공방의 거리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거리에 변화를 주면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
무공을 자기 나름대로 체화하지 못한 자는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파탄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한은 뒤로 물러서는 것은 선택지에서 지웠다.
충돌의 반동을 이용하여 거리를 벌리려고 할 때도 따라붙었던 노랑머리 도사였다 .
몇 걸음 뒤로 움직인다고 해도 거리를 벌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까이 붙는 것이 나았다.
지팡이가 찌를 수 없는 거리.
그러나 손으로 때리거나 잡을 수는 있는 거리.
거리를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묶고, 반격의 물꼬를 튼다.
보법으로 방어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한은 지팡이가 찔러오는 궤적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단 한 걸음 앞으로 접근하는 동안 세 번의 공격이 이한의 몸을 찔러왔다.
지팡이의 공격이 두 배는 더 빨라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두 번까지는 쳐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공격은 막아내지 못했다.
[경고! 근육손상. 무통증 처치 완료. 지혈 시작합니다. 근육 복구까지 앞으로 10분!]
허벅지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솟았다.
그러나 피는 금방 멈추었고, 통증 역시 약간의 불편함만 남았을 뿐이다.
이한은 부상을 대가로 원하는 만큼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손이 닿는 거리였다.
삼단삼극권은 오행권에서 파생되어 나온 무공이다.
이 말은 삼단삼극권의 진정한 위력이 내공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화(火)로 내공을 키우고, 금(金)으로 발경한다.
기운이 격렬하고 강맹하기만 하니 토(土)로 조화를 추구한다.
삼단삼극권의 오의다.
오행권과는 비교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여러 종류의 삼극권 중에서 공격력 하나로는 단연 발군이라고 할 수 있다.
초식 자체는 오히려 평범해서 안정적이다.
삼극권의 내공을 끌어내는데 특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공방의 균형이 잘 잡혀 있는 편이다.
물론, 평범하다고는 하지만 노랑머리 도사가 지팡이를 쓰는 수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저런 것은 그냥 속도만 빠른 일반인이라니까.
밀어 치고, 내려 치고, 지른다.
맨주먹이지만 바위라도 깰 수 있는 위력이었다.
그리고 공격에 담긴 금의 기운은 어떤 종류의 호신공이라고 해도 쉽게 막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리저리 잘라낸 후 다시 엮어낸 무공이라고 해도 명색이 오행권의 한 갈래다.
그것도 숨겨 놓은 제약을 풀어낸.
그러나 노랑머리 도사는 버텼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 역시 나름대로의 한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치 철판을 치는 것 같았다.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주먹이 상대의 몸을 칠 때 나는 소리조차 사람이 아니라 철판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피부가 나무처럼 변하는 목기호신기라는 호신공은 들어봤지만, 피부가 철로 변하는 호신기공은 금시초문이었다.
철포삼과는 달랐다.
이한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에게 여유를 줄 수는 없었다.
이곳이 외따로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해도 황궁의 일부였다.
더구나 황제의 누이가 유폐되어 있는 곳.
이곳을 지켜보는 눈이 하나둘이 아닐 텐데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우는 것은 정말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놈이 나타날지 모른다.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더 강하게 쳤다.
철판을 치는 것 같은 소리는 작아졌지만, 이한이 느끼는 위력은 오히려 강해졌다.
삼단삼극권의 경력이 노랑머리 도사의 몸내부를 흔들었다.
호신공은 단순히 껍질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 내부까지도 내공의 힘으로 보호해야 비로소 호신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한이 노랑머리 도사의 몸을 쳤을 때 단단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내공끼리 부딪칠 때의 반발력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이한이 더 강하게 친 것은 그래서였다.
노랑머리 도사가 어떤 기이한 호신공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아직 내외가 균형을 이루지 못해서 껍질만 단단한 것이라면 두꺼운 갑옷을 입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한의 삼단삼극권 역시 완성과는 아직 거리가 멀지만 조화신단을 먹은 후로는 침투경을 흉내 내는 수준까지는 되었다.
갑옷을 격하고 몸 안의 장기를 때리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연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Esti humiligita tiel de sovagulo!”
노랑머리 도사는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흉할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 지금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려주었다.
지팡이조차 놓칠 정도였다.
이한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한의 결정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던 위사들이 개입했다.
퉁! 퉁!
쇠뇌살이 날아왔다.
한두 발이야 무공을 익힌 자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고, 달려가서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상대는 여럿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위험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도 않았다.
이한은 마지막 한 수를 더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한님! 지팡이, 지팡이를! 제발!]
다급하게 나노가 외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팡이는 노랑머리 도사의 손에서 떨어진 곳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한은 지팡이를 확보하자마자 즉시 현장을 떠났다.
추적해 오는 위사는 없었다.
*
황궁 지역을 벗어나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긴 이한은 비로소 지팡이에 관심을 돌릴 만한 여유가 생겼다.
길이는 성인키의 절반 정도.
손잡이 쪽에는 완벽한 구로 가공된 주먹만 한 크기의 청옥이 달려 있다.
전체가 금속으로 되어 있어서 보통 사람은 들고 다니기도 힘든 무게였다.
그런데 여기서 디멘션이늄의 파장이 나왔다고?
“나노. 다시 확인해 봐라.”
[이동하는 동안 계속 확인했습니다. 금이 대량으로 포함된 철합금으로 만든 지팡이입니다. 철합금에 포함되어 있던 금의 일부가 차원이동 중 변성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 세상에 이한과 같은 존재가 더 있는 것이다.
“이거야 원. 피라미드까지 만들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왜 이곳에 피라미드를 만들려고 하신 것입니까?]
“일종의 구조신호로 만들려고 했지. 무인도에 난파한 사람이 해변에 돌로 SOS를 만들거나 연기를 피워 올릴 봉수대를 만드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예상하지 못한 곳에 떨어졌지만,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한은 기관의 탐사자이지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차원 이동을 위한 수단을 직접 만들 능력이 없다.
게다가 이곳에서 정신을 차렸을 당시에는 나노 역시 잃었다고 생각했다.
설사 나노가 정상적으로 작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곳의 문명 수준상 차원이동과 관련된 것을 만들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반도체는 만들 수 있어야 시도라도 할 수 있다.
당시의 이한은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부딪쳤다.
자신이 그 사람을 찾아내던, 아니면 그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던 해야 하는데 방법이 문제였다.
그때 이한이 찾은 해결책이 바로 피라미드였다.
피라미드를 구조신호로 건설하자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피라미드 같이 유명하고 엄청난 규모의 거석기념물이 있을 수 없는 장소에 있다면 조사하러 올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피라미드 건설은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래. 누군지도,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차원을 넘어온 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 나처럼 사고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이동할 방법도 있겠지.”
일단은 노랑머리의 도사가 어떤 경로로 저 지팡이를 가지고 있게 된 것인지부터 조사를 해야 했다.
노랑머리 도사.
대진국 출신이라면서 사기를 치고 있는 가짜 도사 일당과 관련이 있는 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 조사하기에는 걸리는 점이 적지 않다.
그들 일당은 현재 무당파의 도사들을 밀어내고 황실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은밀전주와의 인연은 계속 되어야 할 듯했다.
[이한님. 그렇다면 은밀전주가 준다는 대가를 변경할 필요가 있습니다. 파라미드 건설이 필요 없어졌는데 제국 남부 지역과 관련된 인맥을 소개해 준다는 것이 필요 하겠습니까?]
“일리가 있군. 그래서 나노는 내게 무엇을 권하고 싶은데?”
[제국 남부 지역과 관련된 인맥보다는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필요한 인맥을 소개받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뭐든지 후불로 받는 것은 별로 좋은 습관이 아니야.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공수표를 날리거든.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은 이용해 먹겠다고 달려들지.”
[그렇다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래. 하나가 떠오르는군.”
이한은 은밀전주에게 일의 전말을 보고하기 위해 돌아갔다.
겸사겸사 받아야 할 대가도 변경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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