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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16화 (16/78)

16. 무공 사부 황보상

16. 무공 사부 황보상

“관리들과의 인맥 대신 무공 사부를 소개해 달라고?”

“예. 최소한 일류급의 무림인이어야 합니다. 절정급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아니 왜?”

“부족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림에서는 부족하면 죽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한은 자신이 무공의 초보자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장공주의 유모로부터 한 방 맞았을 때였다.

진정한 고수를 앞에 둔 순간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단전이 생겨서 내공을 익힐 수 있게 된 후로 마치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노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에 무공서를 분석하고 삼단삼극권의 숨겨진 비기를 찾아내면서 허파에 바람도 들어갔다.

한순간에 무공이 급상승하는 짜릿함은 자신이 천재라는 느낌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문제일 뿐,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흑도 문파의 방도와 자신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상단의 주인을 상대하면서 그런 생각은 이유 없는 확신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황궁에 들어가서 진짜 고수를 만나보니,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이한은 자신의 시선이 은밀전의 밀위들에게 맞춰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밀전은 첩보를 수집하고, 황실에 위험이 되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 주된 임무인 곳이다.

첩보 수집을 위해서 평범한 이들과 자연스럽게 섞여서 지내야 하는 자들에게 무공의 고수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늑대가 양털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서 양들이 늑대를 진짜 양으로 보겠느냐는 말이다.

약한 자들일수록 자기 주변에 더 예민한 법이다.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을 눈치채는 것은 금방이다.

훌륭한 은밀전의 밀위일수록 늑대일 수는 없다.

조금 특별한 양이라면 모를까.

황실에 위험한 자를 제거하는 것도 그렇다.

암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은밀할수록 좋다.

암살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것이 최고다.

정면으로 일대일 대결하는 상황이 된다면 설사 목표를 죽였을 지라도 성공이라고 하기 어렵다.

상대에게 명분을 쥐어주는 상황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간에서 말하기를 암살을 업으로 삼는 자 중에는 진정한 고수가 없다고 한다.

그저 일격필살의 암습만 있을 뿐.

은밀전의 밀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한이 익힌 것은 결국 암살자를 위한 무공이었다.

그것을 보완할 만한 방법도 알 수 없었다.

이한이 가진 무공 내력이 일천했기 때문이다.

은밀전에서 익힌 삼단삼극공도 사실 따지고 보면 제대로 익힌 것이 아니다.

내공이 없었던 시절이라서 형은 올바르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내공의 수발에 대한 것은 이론으로 들은 것이 다였다.

지금처럼 제법 완성된 형태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노의 보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잡다하게 읽어온 무공서적 역시 문제가 있었다.

수준이 낮은 것은 둘째 치고 나노의 분석에 의하면 틀린 내용이 제법 있다고 한다.

특히, 초식과 내공의 어울림에 있어서 더욱 그랬다.

나노가 분석을 통해 수정하고 있지만 나노 역시 기준이 될 만한 자료가 부족해서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본래 익히고 있었던 각종 격투기였다.

내공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발달한 지구의 격투기는 이곳의 무공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것이라서 오히려 위험했다.

상대방이 아니라 시전하는 사람 쪽에게 말이다.

특히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반사적으로 반응할 정도로 이한에게 체화되어 있는 LINE 같은 근접격투술은 내공을 익힌 자들을 상대로는 가끔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했다.

이한은 제대로 된 무공 고수로부터 교육을 받을 필요성을 느꼈다.

부족함을 채워야 했다.

그래서 은밀전주에게 무공 사부를 대가로 요청한 것이다.

이한의 요청에 은밀전주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네. 사부의 은원이 곧 제자의 은원이 되는 것이지. 자네는 은밀전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 같으면서도 알고보면 이곳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 것에 소극적인 면이 있었지. 괜찮겠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내공을 기반으로 하는 무공에 대한 상식과 실전 같은 비무입니다. 새로운 무공에 대한 가르침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차근차근 내공을 익혀온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해서 언급도 하지 않을 만한 기초를 점검하고 싶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전 같은 비무 역시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던 기본적인 실수 때문에 어이없게 죽고 싶지 않아서지, 무슨 비전 같은 것을 전수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내공을 홀로 깨우쳐서 익혔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군. 나는 자네가 삼단삼극권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무공을 익히고 싶다는 의미인 줄 알았네. 그렇다면 한 명 소개해 줄 만한 사람이 있지. 그 전에 일단 명월루에 대한 일부터 처리하도록 하세. 자네 것이 되었으니 말이야.”

은밀전주는 자신의 옆에 있는 줄을 당겼다.

옆 방과 연결되어 있는 신호줄이었다.

[옆 방에서 방울소리가 들립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움직입니다. 움직임의 소리가 작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여자, 그것도 훈련받은 여자입니다.]

나노의 말대로 나타난 사람은 젊은 여인이었다.

상당한 미모를 가졌지만, 이성을 유혹하는 느낌의 미모라기보다는 예술품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자네는 본 적이 없을 걸세. 작년부터 명월루의 운영을 전담하고 있는 총관일세. 그리고 이쪽은 명월루의 새로운 주인이 된 사람이네. 서로 간에 인사라도 하시게.”

이미 명월루의 주인이 바뀌리라는 사실을 들었던 모양인지 여인의 태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설향이라고 합니다.”

“이한이라고 합니다.”

“설향은 내가 딸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일세. 능력이 아주 뛰어나지. 이 아이가 명월루를 맡은 후로 내가 명월루를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을 정도였네.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 걸세.”

“황궁에서 나온 분입니까?”

이한의 말에 은밀전주는 물론 설향 역시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특히, 설향의 태도변화가 인상적이었다 .

잠깐의 놀람이 지나자 지금까지 잔잔한 호수같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당장 칼을 들이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알았나? 장공주 전하의 보모상궁밖에 모르는 사실인데. 이런 것까지 궁에서 샌 것이라면 심각한 일일세.”

“그냥 보니까 알겠더군요. 보모상궁 옆에 있었던 이 전식이라는 궁녀와 풍기는 기세가 흡사하달까? 게다가 은밀전주께서 따로 챙기는 젊은 여인이니 혹시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제 예상이 맞았군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시던가요?”

설향의 말이었다.

“생각보다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기운들이 넘쳐서 제 뼈가 부러질 뻔하기도 했으니까요. 이 전식이라는 궁녀분도 호통소리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설향의 날카롭던 기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다시 본래의 잔잔하고 고요한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이 전식이 장공주 전하를 잘 모시기는 하지만, 손님맞이는 서투르지요. 역시 제가 있었어야 했는데.”

“설향께서는 전찬으로 계시던 분이군요.”

전식은 미용 담당, 전찬은 비서 담당의 궁녀라고 생각하면 된다.

설향이라는 여인은 이 전식과 함께 장공주의 측근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과거야 어쨌든 지금은 궁에서 나왔네. 자네도 알지 모르겠는데 궁녀는 너무 이쁘면 안 돼. 황실 남자들이 황음에 빠지게 한다고 해서 미색이 뛰어난 궁녀는 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원칙일세. 설향 역시 그래서 궁을 나온 경우라네. 보모상궁이 내게 부탁했지. 나는 지금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이고.”

“기루의 운영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앞으로도 제가 관여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왜? 주인이 되었으면 관여를 해야지. 이곳을 거처로 삼고, 설향에게도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도록 하게. 모르는 것은 설향에게 배우면 되겠군. 그리고 자네의 무공 사부 말인데.”

은밀전주의 의도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금방 화제를 전환해 버려서 미처 뭐라고 말을 하지도 못했다.

이한은 쓴웃음을 삼키며 은밀전주의 말에 집중했다.

“소개할만한 절정고수가 있네.”

절정고수.

내공을 자신의 무공에 담아 밖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이 수준이 되면 검을 사용하는 자는 검기를 쓸 수 있고, 권을 쓰는 자는 주먹에 권기를 담을 수 있게 된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수장에 달하는 절벽을 뛰어오르기도 하고, 경신법을 익힌 자는 몸을 가볍게 해서 나뭇잎을 밟으며 강을 건너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개를 할 수는 있지만 가르침을 받는 것은 자네가 알아서 해야 해. 그 사람이 평소에는 사람이 좋은 편인데, 가끔 이상한 것에서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거든.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지.”

“소개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가르침을 얻는 것은 제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내가 소개장을 하나 써 주지. 그리고 보름 후에 약속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한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기 위해서는 은밀전주와의 인연이 중요했다.

황실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다 보면 가짜 도사들을 손에 넣을 기회도 생길 것이다.

*

은밀전주가 소개해 준 절정고수가 사는 곳은 경사 외곽의 빈민가 근처였다.

환경은 빈민가다웠다.

가난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서 코가 마비될 정도였다.

거름 냄새, 오물 냄새, 무엇인가 썩는 냄새.

뭐, 지구에서도 빈민가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었다.

쓰레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쓰레기조차 귀중한 자원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빈민가를 지나 좀 더 외곽으로 가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해가 밝을 때였다.

“여문기가 보내서 왔다고?”

“그렇습니다. 어르신. 여기 소개장이 있습니다.”

은밀전주가 소개해 준 사람은 마르고 꼿꼿한 느낌의 늙은 문사였다.

이름은 황보상.

젊었을 때 황궁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집전각의 말단 학사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소개장을 읽은 후 내던지듯 탁자에 내려놓았다.

“흥. 이 고자 놈이 이제는 내 무공까지 빼먹겠다고 수작을 부리는군.”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는 듯했다.

태도가 우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를 받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적대적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 문화에서 소개장을 써준다는 것은 빚보증을 서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태도라니.

“저는 어르신의 무공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제 무공을 보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너는 은밀전의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때 은밀전의 일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만, 밀위는 아니었습니다. 대주로 있으면서 은밀전의 살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어르신에 대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함자를 들은 것도 어제가 처음이었습니다. ······아!”

이한은 그제서야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문사의 이름은 황보상.

황보세가의 인물이었다.

삼단삼극권의 원류가 되는 오행권이 있는 가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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