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시 금문상방
18. 다시 금문상방
“예친왕에게 유감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자는 대가도 치르지 않고 내 무공을 집어삼켰네.”
황보상의 어조에는 사기 거래를 당한 무공 덕후의 원한이 엿보였다.
“내 반드시 그 소인배의 머리통을 잡고 비틀어서 이자까지 잔뜩 받아내고 말걸세.”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숙부가 되는 사람인데 가능하겠습니까?”
예친왕은 전대 황제의 동생으로 경사에 머무르고 있는 유력한 황족 중의 하나다.
북면방어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지분이 상당하다.
원래는 그다지 두드러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자질이 떨어지고 탐욕이 강하다는 평판이었다.
그래도 황족은 황족.
아무리 절정 고수라고 하더라도 후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러니까 기회가 있겠지. 눈치없이 경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는데 언제까지 저럴 수 있을 것 같은가? 황제가 되었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되었든 경사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에 적당한 제물이 아닌가? 그때가 되면 나 역시 기꺼이 한 손 거들 생각일세.”
“그렇게 되면 실로 통쾌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자네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네. 석탄 상인들의 목을 여럿 매달아버린 사람답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벌벌 떨며 자리를 피하려는 자가 대부분이지. 간담이 콩알만 한 자들이 고수는 무슨 놈의 고수야.”
이한은 황보상의 오해를 정정했다.
“제가 아니라 밀위에서 몇 명 나서서 한 일입니다. 은밀전의 돈벌이를 방해했으니 당연한 일이 벌어졌을 뿐입니다. 그 당시의 저는 일개 대주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그래. 자네가 아니라 밀위가 했다고 해두지.”
사람이 행동하는 이유를 따져 들어가 보면 본질은 이익이다.
대의명분을 논하고 예의와 염치를 따지는 것은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포장을 치워버리고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낸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 넣어주겠다는 뜻이다.
이한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비로소 절정고수를 무공사부로 모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날 황보상은 이한에게 나무판자 하나를 들고 있도록 했다.
그리고 나무판자에 주먹을 갖다 댄 후 말했다.
“어제 자네와 손을 섞으면서 심각한 문제를 하나 발견했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빠르고 강하게 타격하는 것은 삼류 무림인에게나 해당하는 일일세. 내공을 익힌 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다음 순간 나무판자가 박살 나서 조각조각 흩어졌다.
내공으로만 보일 수 있는 재주였다
주먹을 나무판자에 갖다 댄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내공의 발경만으로 나무판자를 부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수련을 한 사람들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자네처럼 오랫동안 내공을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완력에 기대어 무공을 사용하던 자들은 치명적인 허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아.”
황보상은 나무판자를 하나 더 가져왔다.
그리고 나무판자에 다시 주먹을 댔다.
이번에는 나무판자와 주먹 사이에 일촌의 거리를 둔 상태였다.
“움직임이 뻔히 보여. 어느 것이 실초이고 어느 것이 허초인지 몇 번만 부딪쳐보면 금방 구분할 수 있을 정도야. 실초를 사용하려고 하면 몸에 힘부터 들어가니 눈에 안 뜨일 수가 없지. 그것부터 고쳐야 해. 그렇게 못하면 비슷한 수준의 무림인에게라면 반드시 패할 것이고, 체계적으로 수련을 한 명문의 제자에게는 수준에 상관없이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
이번에는 나무판에 주먹만하게 그을린 흔적이 생겨났다.
다음에는 숯이 되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두 오행권의 화기를 발경한 흔적이었다.
“오행권의 화기를 발경하면 이렇게 되지. 세 번 겹쳐서 내지를 수 있으면 나무가 숯이 되고, 아홉 번을 겹쳐서 내지를 수 있으면 재로 만들 수 있지. 나무가 아니라 사람의 몸이라고 생각해 보게. 두렵지 않은가? 내공은 이렇게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네. 내공을 익힌 이상 육체 그 자체의 강함과 빠름은 보조적인 위치로 격하될 수밖에 없어. 근육에 의존하여 강하게 움직일 필요도, 빠르게 움직일 필요도 없네. 그런 것은 내공을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삼류 무림인들의 박투술에나 필요한 것이야. 강함도 빠름도 결국은 내공을 따라오게 되네. 중요한 것은 내공과 초식의 연계를 익히는 것이지. 다행히 자네는 내공이 없던 시절에 몸에 밴 나쁜 버릇들만 고치면 될 것 같아.”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한은 고개를 숙이며 가르침을 구했다.
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몸에 밴 나쁜 습관은 몸으로 고치면 되네. 올바른 교훈을 몸에 때려 박다 보면 나쁜 습관이 다 빠져나갈 걸세. 시간이 얼마 없으니 좀 강하게 하도록 하세나.”
“예? 때려 박다니요?”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지만, 이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황보상의 대단히 과격하고 폭력적인 교육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효과적이었다.
어이없게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보름 만에 받을 정도였다.
*
이한이 두들겨 맞으면서 30년 넘게 몸에 밴 나쁜 버릇을 탈탈 털어내고 있을 때, 황궁의 은밀한 곳에서는 무거운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가짜 도사들의 패악질이 도를 넘고 있네. 장공주 전하께서 계신 전각까지 와서 사람을 해치고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굴고 있어!”
“보모상궁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는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오. 금의위는 지금 조용히 엎드려 있어야 할 때요. 타초경사를 저지를 수는 없지 않겠소?”
“하지만 황실의 위엄도 생각해야지. 근본도 없는 자들까지 끼어들어서 황실 가족을 위협하는 것은 곤란해. 황족끼리의 다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라네.”
두 사람이었다.
그중 한 명은 이한도 본 적이 있는 혜목장공주의 보모상궁이었고, 금의위를 언급한 다른 한 명은 중년의 건장한 남자였다.
문관복을 입고는 있지만 겉모습만 본다면 무관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풍기는 기도가 강렬한 사람이었다.
“이럴 때는 은밀전이 아쉽소이다. 경사 내에서라면 제법 쓸만한 칼이었는데.”
“이미 지난 일인 것을.”
“그렇기는 하지만, 은밀전이 남아 있었다면 경고 정도는 전할 수 있었을 거요. 북면방어사에 있는 세작이 전하기로는 은밀전주는 놓쳤지만 은밀전의 밀위는 모두 죽거나 잡혔음이 분명하다고 하니 아쉽기만 하오.”
“생각보다 희생이 크기는 했지. 그들의 손이 은밀전에까지 닿아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밀위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으니까.”
“북면방어사가 아주 허당은 아니었던 모양이외다.”
그러나 보모상궁은 남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 침묵을 지켰다.
금의위의 중년인은 뒤늦게 그 의미를 눈치채고 반색했다.
“설마? 아직 은밀전이 남아 있는 것이오?”
“한 번 정도는 쓸 만할 걸세.”
“그렇다면 제대로 한 번 써보는 것은 어떻겠소? 가짜 도사들도 징치할 겸 해서 말이오. 잘 만하면 눈치만 보고 있는 자들을 다 끌어낼 수도 있을 거요.”
“한 번 들어보지.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하지 말게. 은밀전에서 밀위를 모두 잃은 것은 사실이니까.”
둘의 대화는 좀 더 은밀해졌다.
*
보름의 시일이 다 되어서 은밀전주에게 돌아가게 된 이한은 은밀전의 일에 관여하기로 결정했다.
황궁에 자리잡고 있는 도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황궁과 연결된 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혜목장공주가 보름 후에 보내겠다고 한 연락책과의 만남 역시 이한의 일이 되어 버렸다.
만남의 장소는 천하제일객잔이었다.
경사의 중심부에 있는 천하제일객잔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름에 걸맞을 정도로 거대한 음식점 겸 객잔이었다.
경사에 사는 서민들은 이곳에서 한번 식사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은밀전은 이곳의 별실에서 정기적으로 황궁에서 나온 사람과 회합을 가져왔다.
미리 약속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역시 황궁에서 나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젊은 남자였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서신을 하나 건네주고 떠났다.
벙어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묵한 남자였다.
서신은 은밀전의 방식에 따라 만들어진 비밀 문서였다.
이한은 차려진 음식상의 위에 있는 식초를 물에 희석해서 문서에 뿌렸다.
잠시 후 글자가 나타났다.
내용을 읽은 이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웃고 말았다.
인연도 이런 인연이라니!
문서는 몇 개의 상단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곳의 이름이 금문상방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금문상방과는 전생에 얽힌 악연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곳의 대방은 이한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고, 이번에는 문을 닫을 지도 모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은밀전주는 이한이 가져온 문서를 살핀 후 이름이 거론된 상단이 모두 예친왕이 뒷배로 있는 상단임을 알려주었다.
어쩌면 단순한 뒷배가 아니라 실제 주인이 예친왕일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금문상방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한이 죽인 뚱땡이는 바지사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이한은 이들 상단에 대한 조사가 단순한 조사가 아님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도발이었고 동시에 협박이었다.
혹시 조사 과정에서 충돌이라도 벌어진다면 무엇인가 꼬투리로 잡을 만한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하는 것이리라.
물론 황실과 예친왕이라는 두 고래 사이에 끼어든 새우의 등이 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말이다.
“어떻게 할 텐가?”
“금문상방을 제외한 다른 두 곳은 모두 석탄을 파는 상단입니다. 돈은 많이 벌겠지만 내부 사정은 뻔할 겁니다. 상단의 일도 매일매일 반복되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이런 곳은 들쑤셔봐야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금문상방을 먼저 조사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금문상방은 흥미로운 점이 많더군요. 제국 남부에서 데려온 계약노동자가 어디로 갔는지도 궁금하고, 왜 그렇게 많은 약재를 사서 나르는지도 궁금합니다. 심지어 해결사 노릇도 하는 것 같던데, 상단치고는 어딘가 이상한 점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금문상방은 제국 남부까지 이어진 상행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정도가 아니라 수적과도 교류를 할 정도니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분명 아니었다.
금문상방이 깔고 앉은 방석을 들추면 분명 지저분한 쓰레기가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중에는 황실에서 원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이왕이면 가짜 도사들에게까지 도달하는 쓰레기도 있었으면 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가짜 도사들과 예친왕이 한 패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적어도 혜목장공주와는 둘 다 적대적이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붙여주지. 무공은 없지만 상단에 대해서는 잘 알 만한 사람이야. 자네도 알 걸?”
과연 은밀전주가 소개해 준 사람은 이한 역시 안면이 있는 자였다.
이한이 기둥화로를 만들어서 한창 팔아치울때 도왔던 사람이었다.
현재는 은밀전에 남은 몇 안되는 대주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이한이 모르는 금문상방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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