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는 이한이라고 하오
19. 나는 이한이라고 하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금문상방은 원래 해결사 노릇을 하던 낭인들이 모여서 만든 곳입니다.”
“특이하군요. 낭인들이 흑도 문파를 만들어서 이권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뜬금없이 상단이라니.”
“그것에 대해서는 상인들 사이에서 돌아다녔던 소문이 하나 있습니다. 집법밀위께서도 아시겠지만 예친왕이 골동품같이 희귀하거나 오래된 물건에 그렇게 환장을 한답니다. 심지어 도자기 하나에 기와집 한 채 값을 치른 적도 있을 정도지요.”
집법밀위는 은밀전에서 이한이 새롭게 받은 직책이었다.
은밀전 서열 2위.
은밀전주가 심한 부상을 입은 후 반은퇴 상태라서 사실상 서열 1위다.
“기억납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뒷이야기는 잘 모르실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도자기를 판 사람의 집에 도둑이 들어서 도자기 판 돈은 물론 그 사람이 가진 원래의 재산까지 모조리 다 털어갔다지요.”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마 대주가 말을 하지 않아도 도둑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족이라는 체면도 생각해야지.
이게 무슨.
어이가 없었다.
“금문상방이 원래 하는 일이 그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예친왕뿐 아니라 비슷한 취미를 가진 분들을 위해 희귀하고 오래된 물건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해왔다고 합니다. 물건값이 너무 비싸면 일단 지불한 후 나중에 회수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아마 상단이라는 간판을 단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흑도문파보다는 상단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 골동품을 거래하기에는 더 나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계약노동자를 모집하고, 약재까지 거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대략 10년 전부터 갑자기 제대로 된 상단처럼 굴더군요. 얼마 전에 죽은 윤등구가 금문상방의 대방이 된 것도 그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윤등구를 죽인 것은 이한이었다.
이한은 인연이 묘하게 얽힌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윤등구는 원래 예친왕의 사람입니다. 금문상방에 들어가기 전 북면방어사에서 대정(隊正)으로 50명의 병사를 거느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 금문상방을 예친왕의 뜻대로 이용하기 위해 대방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금문상방은 조만간 조용해지겠군요. 다시 예친왕이 대방을 내리꽂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내분이 심해져서 벌써 시체가 여럿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음?
이한에게 몇 가지 가정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일은 금문상방에 손을 대기 좋은 기회라는 점이었다.
쓰레기가 흩어져 있는 곳에 쓰레기 한두 개를 더 놓아둔다고 해서 알아챌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그렇다면 몇 명 더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오해로 인해 분쟁이 더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예친왕이 배후에 있으니 금문상방의 간판을 내리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겠지만 일부가 금문상방을 떠날 수도 있겠지요.”
이한의 말에 마 대주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긍정했다.
오히려 어떤 자를 잡아다가 물어보는 것이 더 좋을지 나름의 생각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물론 나름의 생각을 실행에 옮겨야 할 사람은 이한이었다.
*
백철우는 금문상방의 행수들 중 하나로 원래는 무덤의 부장품을 털어먹고 사는 도굴꾼 출신이었다.
그러나 사람 따라 인연 따라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어느 순간 금문상방에서 행수까지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하던 일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금문상방에 속한 뒤로는 부장품을 거래해도 뒤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히 황족을 배경으로 둔 상단에 시비를 걸만한 자들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10년 전 윤등구가 대방이 된 이후부터 상단이 슬슬 맛이 가더니, 이번에는 어느 순간 길 위에서 먹고 자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계약노동자를 인솔하고, 상품의 포장을 검사하고, 거래의 시작과 끝을 확인해야 하는 행수로서 말이다
성실한 상인이라면 모를까 도굴꾼 출신의 낭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윤등구 대방이 비명횡사한 이후로 다시 예친왕부에서 사람을 내려보낸다는 말이 돌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차하면 그냥 금문상방을 뜰 생각도 있습지요. 아무래도 이제는 나이도 들고 해서 길 위에서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더군요.”
[진실입니다.]
“백 행수는 정직한 사람인 것 같군. 말에 거짓이 없어.”
“물론입니다. 제가 이래 봬도 명색이 상인입니다. 상인의 기본은 신용 아니겠습니까. 제가 다 말씀드린다고 했으니 거짓없이 다 말씀드리는 것입니다요.”
어둠 속에서 꽁꽁 묶인 채, 의자에 홀로 앉아 있다면 묻는 말에 거짓을 말하기 어려운 법이다.
눈앞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단도가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고분고분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백철우는 훌륭한 도굴꾼이자 괜찮은 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강심장 같은 것은 지금까지 가져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가질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백 행수를 추천하더군. 금문상방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백 행수가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그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백철우는 자신을 추천했다는 사람을 향해 마음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인간백정 같은 자에게 자신을 들이밀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보표를 겸해서 같이 다니던 후배 도굴꾼들에게 다짜고짜 칼부터 찔러대다니!
일을 벌이기 전에 자신의 족보부터 밝히는 흑도의 예의는 어디로 갖다 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의 분노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경험상 저런 놈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백철우는 금문상방에서 지내는 동안 많이 자라났던 자존심을 아주 깊은 곳에 도로 묻어 버렸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는 금문상방의 행수 백철우가 아니라 도굴꾼 백가였다.
“왜 그렇게 약재를 많이 사들였지?”
“북면방어사에 납품을 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거짓입니다.]
“나는 자네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 계약노동자들을 빼돌린 곳과 같은 곳으로 약재가 갔다고 들었는데 그곳이 북면방어사였다고? 그렇다면 그 친구가 거짓말을 한 걸까?”
어둠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스산해졌다.
백철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도 읽은 적이 있어. 사서에 훌륭한 이름을 남겼고, 사람들은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들 말하지. 만약 자네가 그런 사람을 본받고 싶다면 구태여 말릴 생각은 없네. 금문상방에 있는 입은 하나가 아니니까. 나는 다른 자에게 가서 물어보면 그만이야. 그런데 혹시 자네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다리를 잘랐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아마 없을 거야. 왜 그럴까? 한번 생각해 보자고.”
정말 왜 그렇지?
백철우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갔다.
“목숨을 버리면 깔끔하게 끝이 나.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뒷이야기 같은 것이 남을 수가 없거든. 하지만 두 다리를 자르는 것은 깔끔하지가 않지. 생각해 봐. 의리를 지키겠다고 멋지게 두 다리까지 잘렸는데 시장바닥에서 구걸로 연명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보기에도 좀 그렇지 않을까?”
시퍼렇게 날이 선 단도가 바로 눈앞을 지나갔다.
백철우는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왜 하필 지금 눈앞에 단도가 지나가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장님이 되면서까지 금문상방에 지킬 의리 같은 것은 없었다 .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경사 북쪽에서 하룻길을 더 가면 돌산이 있고, 그곳에는 버려진 성채가 존재합니다.”
“계속해 봐.”
“그곳에 북면방어사의 절충교위가 거느리고 있는 병단이 있는데 저희는 그곳까지 갑니다. 계약노동자도 약재도 거기까지만 운반합니다. 그 이후는 회영상방에서 담당하기 때문에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회영상방? 석탄 나르는 곳?”
“예. 그렇습니다.”
석탄을 다루는 두 상단 중 한 곳도 수상한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니!
이러면 나머지 한 곳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역시 황궁에서 직통으로 내려온 첩보다웠다.
이한은 그들을 무시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숨을 쉬었다.
심지어 그는 마 대주에게 매일매일 반복되는 뻔한 일이나 하는 상단이니 조사할 것도 없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이래서 함부로 선입견을 따위를 갖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철저한 사람이 된 이한은 백철우가 기억하는 모든 것을 끄집어냈다.
도굴꾼 시절부터 현재까지 아주 작정하고 탈탈 털었다.
그 대가로 백철우의 등판에 길게 상처를 내주고 길바닥에 던져 놓았다. 집에서 몸조리나 하면서 살겁을 피하라는 충고도 함께였다.
*
경사에서 하룻길 정도 떨어진 곳에도 도시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화려함은 경사에 미치지 못하고, 어두움도 경사에 미치지 못하는 그런 도시였다.
그곳의 어둠 속을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목적지는 이 도시의 유력자 중의 하나인 호대인의 저택이었다.
이미 어두워진 후라서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남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두드렸다 .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얼굴에 큰 흉터가 난 험상궃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오셨소?”
“낭인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소만.”
흉터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침을 바닥에 뱉으며 거칠게 을렀다.
“고생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어 보이는 양반이 낭인은 무슨. 목숨을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냥 가시오.”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흉터의 말에 남자는 대꾸도 없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은 곧장 흉터의 어깨를 향했다.
흉터는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움찔거리며 손을 털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은 느리지만 몇 개의 변초를 숨긴 손길이었다.
순식간에 방해를 뚫고 흉터의 어깨를 잡았다.
흉터의 진천십삼수 따위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런 말은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요.”
“으윽.”
어깨를 잡혔음에도 흉터가 굴복하지 않자 남자의 손아귀힘이 더욱 강해졌다.
외공깨나 단련했음직한 흉터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그제서야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을 안으로 모셔라.”
흉터는 소리를 듣자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남자는 그 움직임에 맞추어 흉터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풀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에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거칠고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눈길이 가는 사람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문사복을 입고 있는 장년인이었다.
그가 바로 이한을 안으로 들인 사람이었다.
그는 명단을 기록한 문서를 펼치더니 남자에게 물었다.
“낭인방의 방주가 보낸 인명록을 보니 아직 오지 않은 자가 몇 명 있기는 하군. 당신은 누구요?”
문사의 질문에 남자의 대답은 간명했다.
“나는 이한이라고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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