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폐광 안에서
21. 폐광 안에서
성채 내부는 조용했다.
분명 병사들이 몇 명이라도 남아있어야 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몰려오는 횃불을 보고 겁을 먹은 병사들이 도망을 쳤다면 그 흔적이라도 남아있어야 했다.
그러나 성채는 원래 비어있었던 것처럼 생활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열화상 시야로 전환합니다.]
30년 내공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 밤을 낮처럼 보게된 이한의 시야에 새로운 정보가 덧씌워졌다.
열을 발산하는 물체의 주변에 옅은 빛이 둘러싼 것처럼 보였다.
열을 발산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덩어리져 보이던 이전보다 훨씬 더 발전한 형태의 시야였다.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군.”
[이한님의 위임에 근거하여 전반적인 신체개선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기능상의 필요에 따라 우선권을 부여한 시각 분야를 제외한다면, 현재 자원의 대부분은 단전과 경맥의 기능강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노는 이한의 시신경에 내공을 익혔더라도 쉽게 얻을 수 없는 특별한 기능을 덧붙였다.
그러나 신체개선, 특히 단전과 경맥의 기능강화는 내공을 익힌 사람에게는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심법을 익힌 자가 오랜 시간 동안 내공을 쌓으며 수련을 하게 되면 신체가 서서히 개선된다.
대부분의 경우 노화가 느려지고, 눈이 맑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정력이 강해지고 피부까지 깨끗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내공과 체질의 궁합이 잘 맞는 자는 노화를 역행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한은 지금 나노를 통해 오랜 시간이라는 필요 조건을 건너뛰고 있는 중이었다.
몇 달도 되지 않는 기간동안 조화신단을 흡수하여 30년 남짓한 내공을 쌓았지만, 이한에게는 급하게 내공을 불린 사람 특유의 불안정함이 없었다.
어쩌면 30년을 하루같이 수련해온 사람보다 더 나은 상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한은 열화상 시야와 다른 이들보다 예민한 청력을 통해 주변을 살폈다.
낭인들 역시 횃불을 들고 주변을 수색하며 병사들이 거주하던 곳을 뒤졌다.
그러나 남아 있어야 할 병사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숙소에는 잠을 잔 흔적이 없고, 조리를 하는 곳에도 불이 꺼져 있지 않은가.”
“어제까지만 해도 병사들이 남아있었던 것은 분명해. 내가 어제 직접 봤다네. 멀리서 본 것이기는 하지만 병사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봤다고!”
“몰려오는 횃불을 보고 도망쳤다는 것은 말이 안되네. 급하게 도망친 흔적이 없어. 혹시 우리가 온다는 것을 누군가가 전해줘서 미리 몸을 피한 것이 아니었을까?”
당혹스러워하는 낭인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곳, 돌산의 지리에 익숙한 서명 출신의 낭인들은 병사들의 도피 가능성이 제기되자 그들이 몸을 숨겼을 만한 곳을 꼽아보기 시작했다.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과거 광산이었던 곳이 나오네. 그곳이라면 임시로 몸을 피할 만하지.”
“아니면 폐쇄된 채석장은 어떤가. 탁 트인 곳이니 만약의 경우 도망치기에도 광산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이한은 그들의 대화에서 이곳 돌산이 평범한 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문을 닫은 광산이라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이한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금문상방이 공급하던 계약노동자의 일부는 이곳에 남겨졌다.
아무래도 계약노동자들 중 일부는 이곳에서 소모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문을 닫은 광산에서 말이다.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폐광이라······”
이한의 혼잣말을 들은 거봉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는 병사들의 숙소에서 칼 한자루를 슬쩍한 후라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마음을 가지게 된 참이었다.
“자네는 외지인이라서 몰랐던 모양이군. 여기는 원래 구리를 캐던 곳이었어. 광맥이 마르면서 쇠퇴하다가 몇 년 전에 병사들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완전히 문을 닫았다고 해. 양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채굴이 되어서 수십 년동안 파고든 광산의 깊이가 수천 장이라는 말까지 있었지.”
“그렇다면 병사들이 그곳으로 숨어들었을 수도 있겠군.”
“글쎄? 그곳에서 일했던 어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사람이 머물러 있을 만한 곳은 아닐 거야.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이 자꾸 죽어나가서 결국 이곳 사람들은 더이상 광산에서 일하지 않게 됐거든. 대신 외부에서 인부를 데려왔지.”
거봉은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 있는지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조금 흉흉한 소문이 기억나네. 들어간 사람은 있는데 나온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심지어 무덤도 없었다고 해.”
이한은 거봉의 말을 들으며 무엇인가 거슬리는 것을 느꼈다.
전부터 머릿속 한구석이 간질간질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을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계속 자신의 알 수 없는 의문에 집중하고 있을 수 없었다.
호장주가 낭인들을 불러모아 광산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 선두에는 무당의 도사 청륜을 비롯한 무림인들이 있었다.
청륜은 무당산에 자리잡고 있는 도교의 여러 선맥들 중 검을 수련의 방편으로 삼은 갈래에 속하는 자였다.
그는 평생을 검과 함께 정진하며 검선이 되기를 소원했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무당산을 떠난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청륜이 선인을 추구하며 속세와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지만 무당산의 도사들을 대표하는 무당 장문인의 요청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연단파에 속하는 자들이 추구하는 바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그들 역시 무당의 도사들임은 분명했고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가짜 도사들에게 밀려서 황궁에서 쫓겨나듯 나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주에 들었다.
그래서 청륜은 사형제들과 함께 무당산에서 내려왔다.
일의 시비를 가리고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속세의 일은 복잡하기만 했다.
하산한지 일년이 되어가도록 해결된 일은 거의 없었다.
평생을 산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특히, 가짜 도사들의 목을 베는 일이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가짜 도사들을 징치하리라고 기대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심지어 무당에 속한 자들까지 명분이 필요하다며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
그의 사형제들 역시 명분이라는 것을 위해 광남산으로, 경사로 향한 후였다.
“광산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흔적이 있습니다.”
“폐광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까지도 광산에 드나들던 흔적이 있습니다.”
추적에 경험이 있다는 낭인들이 저마다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던 호장주는 이마를 짚었다.
호장주는 서명의 유력자들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관여하지 않은 일이 서명에서 벌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된다.
나중에라도 일의 전말이 그의 귀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호장주는 이 광산에 대해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오래 일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사람들이 아니라 계약노동자를 끌어다가 쓰도록 압력을 가했고, 나중에는 병사들의 주둔을 핑계삼아 아예 폐광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광산이 다시 열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이곳을 거쳐서 북쪽으로 향했다던 계약노동자들 중 일부가 이곳에 남겨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뻔했다.
죽은 자들은 광산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도대체 북면방어사의 병사들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청륜 도방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곳을 조사하러 왔으니 당연히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야겠소. 그리고 채석장도 신경이 쓰이니 호대인께서는 그곳을 살펴주셨으면 하오.”
“알겠습니다.”
호장주는 두말하지 않고 즉시 청륜의 요청에 따랐다.
광산에서 잠시 머무르는 것 정도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찜찜했던 것이다.
그는 낭인들 중 일부를 데리고 성채 밖에 있는 채석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한은 호장주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광산을 보며 나노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방사능이 검출됩니다. 인체에 유해한 수준입니다. 방사능 차폐를 위한 호르몬을 생산합니다. 파괴된 세포는 즉시 제거하겠습니다.]
나노는 광산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부터 요란하게 떠들고 있었다.
구리광산이라고 하더니 구리 뿐 아니라 방사성 물질도 포함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니 광부들이 죽어나갔지.
“괜찮을까?”
[단기간은 괜찮습니다. 방사성 물질에 의한 영향이 남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한의 말에 거봉이 끼어들었다.
“자네 겁을 집어 먹었구만. 나만 따라오라고. 내가 밤눈이 밝아.”
거봉은 여전히 이한의 옆에 붙어있었다.
큰소리를 치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불안감에서 나오는 허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손을 가볍게 떨고 있었다.
실소를 지은 이한은 지금까지 들고 있던 횃불을 그의 손에 횃불을 들려주었다.
그제야 그의 떨림이 조금 줄어드는듯 했다.
청륜 도사를 필두로 하는 무림인들이 폐광으로 들어가자 그 뒤를 따라 일단의 낭인들이 따라들어갔다.
이한은 낭인들 중 가장 선두에 있었다.
사람 두 명 정도가 나란히 서서 걸어다닐만한 크기의 폐광이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자 폐광의 통로가 갑자기 확 커졌다.
거의 세 배에서 네 배까지 너비가 늘어나며 높이도 약간 더 높아졌다.
그때 그것이 나타났다.
“앞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 남아 있었다는 병사 같군. 북면방어사의 병사들이 입는 옷과 같은 것을 입고 있네.”
절정급의 고수는 밤도 낮이나 다름없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절정급의 고수가 아니더라도 내공을 꾸준히 수련한 자 역시 어느 정도는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무림인이 뒤에 따라오는 자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것을 알리자, 청륜은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이한은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었다.
움직이는 병사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의 열화상 시야에는 표시된 것이 없었다.
열기가 있다면 당연히 빛이 나는 테두리로 표시가 되었을텐데 그냥 움직이는 병사만 보이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노의 의견에 이한 역시 동의했다.
그것이 논리적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움직일 수 있나?
이한의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에 있던 병사가 갑자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사람들이 접근하자 도망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별로 다르지 않아서 그를 향해 달려간 이가 여럿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도망치던 병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병사를 잡아챈 순간, 예상 외의 반격을 당했다.
“아악! 이놈이 문다.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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