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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25화 (25/78)

25. 나노가 독공을 익힘.

25. 나노가 독공을 익힘.

피는 혈관을 통해 흐르고, 내공은 경맥을 따라 움직인다.

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심장의 펌핑에 따라 맥동치며 혈관을 흐르는 피는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물리력이라면 모를까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피의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러나 내공은 다르다.

사람의 의지에 따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움직임의 세기, 방향, 성질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내공이 몸 안에 들어오면 대번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내 의지에 따르지 않는 외부의 내공이 들어와서 내 의지와 충돌하니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공격을 목적으로 들어온 내공이라면 이질감 정도가 아니라 통증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경맥이 질기다고 해도 내공 사이의 충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충돌이 격렬하면 경맥이 찢어질 수도 있다.

아주 심할 때는 단전까지 망가진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한과 산발한 노인, 둘의 의지에 따른 각각의 내공이 상대방을 향해 밀고 들어가려고 했다.

보다 강렬한 의지, 보다 많은 내공을 가진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지는 쪽의 경맥이 찢어지는 것은 이미 확정적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독이 있다.

사람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독 말이다.

이러면 내공이 아니라 내공에 실린 독이 최후의 승리를 결정지을지도 몰랐다.

산발한 노인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힘껏 이한을 잡았다.

이한이 자신을 잡고 있는 것보다 더 강하게 말이다.

피부를 찢고, 근육을 으깰 것처럼 강하게 잡은 손을 통해 내공과 독이 밀고 들어갔다.

동시에 상대방이 밀고 들어오는 내공과 독을 막으려고 했다.

독과 내공을 조합한 공격과 방어.

그것은 산발한 노인이 무척 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계의 어떤 떨거지에게서 새어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양심공을 익혔다는 점이 오히려 좋았다.

같은 무공을 익혔다면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익히고 좀 더 능숙한 자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지금, 당연하다는 듯이 상대방을 몰아치는 중이었다.

특히 독은 일방적이라고 할 정도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산발한 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생물독 3종을 혼합 가공한 독기가 체내로 들어오는 중입니다. 임시명칭 ‘이가삼양심법’에 의해 모두 흡수합니다.]

[단전에 독정(毒精)을 형성합니다. 손톱에 별도로 보관하고 있던 독과 폐광에서 흡수한 미혼독까지 포함해서 모든 독을 투입하겠습니다.]

[독정 형성까지 앞으로 1분. 계속적인 독의 흡수를 요청합니다. 꽉 잡고 놔주지 마십시오.]

내공을 의지에 따라 이끄는 것.

그것은 이한이 지금도 잘하는 것이고, 앞으로는 더 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독을 내공에 실어서 움직이는 것은 아직 이한의 능력 밖이었다.

방금 나노가 훔쳐낸 무공 아닌가 말이다.

아직은 경험도, 이론도 없었다.

그래서 독은 나노가 전담했다.

나노머신이 독분자 하나하나를 직접 잡아서 움직였다.

이것은 어떤 의지나 매개체보다도 강력한 방법이었다.

산발한 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홉 개의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할 놈이 여전히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산발한 노인이 느끼기에 내공 대결은 비등비등했다.

제대로 오행심법을 수련한 놈인지 금기의 강맹한 기세가 실린 내공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였다.

당문의 삼양심법은 독을 다루는 것에 특출난 위력이 있는 내공심법이다.

그래선지 그 이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상승의 내공심법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공대결에서 크게 우위를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승패가 더 명백하다고 생각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삼양심법을 통해 단련하며 축적해온 독기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삼양심법을 익혀온 당문의 직계 자손조차 중독될 정도로 막대한 양을 말이다.

이정도라면 아무리 화기를 북돋우어 독기를 태운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양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독으로 몸이 녹아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멀쩡해?

산발한 노인의 경험과 그에 근거한 상식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피어나는 그 순간,

이한의 눈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온통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던 눈에서 다시 흰자가 나타난 것이다.

노인의 오랜 경험이 경고했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

판을 흔들어야 한다.

산발한 노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세로 내공을 일으켰다.

동시에 손을 떼고 이한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노인의 반응은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내공과 독이 이동하는 통로가 되어버린 손을 통해 무서운 속도로 내공과 독이 쏟아져 나갔다.

마치 열어놓은 수문을 통해 빨려나가는 물줄기 같았다. .

의지가 내공을 움직이듯, 내공도 몸을 움직인 것이다.

“이놈! 설마 흡정대법이냐!”

“무슨 미친 소리야? 노친네가 노망이라도 났나?”

당황한 노인은 고함을 질렀지만 이한은 영혼 없는 대꾸 한 번으로 나이 많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차렸다.

그러나 산발한 노인은 이한의 예의범절을 칭찬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독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한의 눈이 완전히 정상이 된 순간부터였다.

산발한 노인이 오랜 시간 동안 연단하며 키워온 독정이 거침없이 빨려 나가고 있었다.

삼양심법은 독과 내공을 함께 수련하는 심법이었다.

독정을 잃는 것은 내공을 잃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산발한 노인은 지금 두 배의 속도로 내공을 잃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면 몸이 감당하지 못한다.

[독정의 생성에 성공했습니다. 독의 흡수가 빨라집니다. 접촉하지 않아도 주변의 독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남으면 뼈에 저장해두면 되니까 최대한 흡수해 보겠습니다.]

산발한 노인의 독정이 붕괴하고 단전은 큰 충격을 입었다 .

지나치게 격렬했던 독과 내공의 흐름이 경맥 곳곳을 찢고 녹였다.

이한은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노인이 피부가 늙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흰색의 머리카락에 어울리지 않게 탱탱하던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

단전이 망가진 후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던 은밀전주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발한 노인은 이한의 손에 잡힌 채 늘어졌다.

서 있을 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독정도 내공도 모두 잃은 평범한 노인이 되어 버렸다.

[상대에게서 더 이상 흡수할 만한 독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공의 흐름도 측정되지 않습니다. 단전이 손상된 듯합니다.]

나노 역시 이한의 생각에 동의해왔다.

내공을 잃고 무력화된 노인 따위는 낭인들만으로도 잡아놓을 수 있다.

이한의 눈이 광대 가면에게로 돌려졌다.

증인을 하나 확보했으니 하나 더 확보하면 좋을 듯했다.

이한은 광대 가면을 쓴 자를 향해 달려갔다.

광대 가면은 산발한 노인이 이한의 손아래에서 제압당하는 모습을 보자 주저하지 않고 휘파람을 짧게 끊어서 불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청륜의 검 아래에서 고전하던 모습은 위장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광대 가면의 휘파람은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였던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두 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나서 청륜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 가면을 쓴 자들이었다.

앞을 보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을 제외한다면 마치 제강이나 달걀귀신 같은 요괴라도 흉내 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청륜의 검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막으면 죽인다는 기세로 거침없이 찔러갔다.

불꽃이 튀었다.

청륜의 발걸음이 멈췄다.

새로 나타난 둘은 청륜의 검을 몸으로 막아냈다.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하나는 청륜의 검에 몸을 찔리자 손으로 검을 잡기까지 했다.

그 사이에 광대 가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쳤다.

뒤에 남긴 둘은 죽든 살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비겁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도주는 성공적이었다.

청륜이 잠깐 멈칫한 사이에 도망친 거리가 벌써 상당했다.

아무래도 광대 가면을 추적해서 잡는 것은 무리일 듯했다.

그래서 이한은 광대 가면 대신 뒤에 남겨둔 둘을 제압하기로 했다.

청륜 역시 이한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의 검은 잠시의 여유도 두지않고 자신을 막아선 둘을 몰아쳤다.

이한이 도착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세 번이나 상대의 몸통에 구멍을 냈다.

심지어 하나는 왼쪽 손목을 잘라버렸다.

그러나 둘 모두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비록 초식은 투박하고 움직임은 뻣뻣했지만 부상을 입어도 조금의 거리낌 없이 움직인다는 것 때문에 귀찮은 상대였다.

잠깐이나마 절정고수의 발목을 잡고 시간을 끌 정도는 되었다.

이한이 도착하자 청륜이 성난 어조로 말했다.

“이놈들, 사람이 아니오.”

“그렇다면 빨리 끝내도록 하시죠.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이한은 뒤에서 둘의 머리를 깨부술 것처럼 위협했다.

실제로 기회가 생기면 기꺼이 부술 생각이기도 했다.

위험을 느낀 둘의 시선이 돌아간 순간 청륜의 검이 번득였다.

절정 고수 앞에서 한눈을 팔다니 죽여달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는 짓이다.

둘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다.

목이 잘린 시체가 동시에 넘어졌다.

그러나 피는 솟구치지 않았다.

동굴 안에서 목이 잘린 강시처럼 진득한 피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것으로 전투가 끝났다.

“아니, 이 사람은 절충교위가 아닌가! 이미 한참 전에 병사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났다던 사람이 왜?”

호장주였다.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결에 끼어들 틈을 노리고 있었지만, 미처 기회를 잡기도 전에 대결이 끝나 버렸다.

그래서 대신 아직 멀쩡한 낭인들을 부려 장내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굴러다니던 머리통 중에서 안면이 있는 자를 발견한 것이다.

이곳에서 마지막 병사들이 철수한 것은 불과 하루이틀 전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무르는 병단이 철수를 시작한 때는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절충교위는 그때 먼저 떠난 병사들을 인솔하고 떠났었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나서 광대 가면을 돕다가 목이 잘린 것이다.

그것도 요상한 가면을 쓰고 몸도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호장주의 생각과 달리 이자들은 오히려 피해자일 수도 있소.”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이한 대협.”

총관이 큰 부상을 입었고 알고 지내던 낭인들도 여럿 죽어서인지 호장주는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던지 절충교위의 머리를 걷어차기까지 했다.

“진주언가나 모산파의 강시라는 것은 죽은 사람을 움직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들었소. 그러나 강시당이나 사교의 강시는 다르다고 하오. 특히 사교에서 만드는 생강시라면 살아생전의 위력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다고 들었소.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왜 돈과 시간을 들여서 강시를 만들까? 같은 편이면 무엇을 하든지 그냥 시키면 되는 일 아니오?”

“아!”

“아직은 그냥 추측이오.”

추측을 확인할 방법은 여럿이었다.

이한은 반쯤 죽어가는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노인 역시 여러 방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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