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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26화 (26/78)

26. 당도군의 증언

26. 당도군의 증언

이한은 산발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얼마 없었지만, 노인의 내부는 정상이 아니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신색으로 앉아 있었다.

마치 차를 앞에 두고 흠향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보시오. 노인장. 내가 무공에 욕심이 있어서 돈으로 살 수 있는 무공서는 제법 읽어보았는데 대부분 쓰레기였소.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예외는 있었지.  그 중 하나가 태극권이었소. 비전을 몇 가지 감추어 놓기는 했지만, 재능있는 자가 평생을 바쳐 수련한다면 능히 경지에 다다를 만하더이다. 아마 무당의 누군가가 재능과 열의는 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한 후학을 위해 자신의 심득을 저잣거리에 풀어놓은 것이 아닐까 싶었소.”

이한의 말에 노인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무공을 모두 잃고 죽을 상황에 처했는데, 뜬금없이 태극권이 어떻고 후학이 어떻고 하니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도 그 무당파의 고인을 흉내 내어볼까 했는데 내가 아는 것이 삼양심법뿐이라서.”

노인이 반응했다.

혼잣말처럼 나지막한, 그러나 살기가 어린 반응이었다.

“오행권을 익힌 놈이 뭐? 당문은 문외로 나간 무공을 반드시 회수한다.”

무공이 밖으로 유출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데릴사위를 들인다고 할 정도로 폐쇄적인 곳이 당문이다.

노인의 반응은 당문 사람다운 태도였다.

“많이 뿌리면 되지 않겠소? 아주 많이. 무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많이. 삼양심법의 비전도 포함하고, 혼자서도 수련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한 주석을 곁들이면 독공에 관심이 없는 자라고 해도 일단 구해서 읽어보려고 하겠지. 무공을 익히는 자들 중 상승의 심법을 견식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자는 없으니까.”

그제서야 노인은 고개를 들어서 이한을 노려보았다.

그가 아무리 독선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살아온 연륜이 있고, 경험이 있다.

덕분에 사람을 대하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대충 보인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눈앞의 어린놈은 미친놈이었다.

눈빛이 맑고, 투명했지만 말하는 내용은 상식을 깨부수는 것들뿐이었다.

고문을 하거나 목숨을 위협하는 식으로 협박했다면 코웃음치며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식의 협박은 그냥 무시하기 어려웠다.

협박을 해도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다니.

이런 방식의 협박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 분명했다.

상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였다.

저런 종류의 인간은 사고를 쳐도 평범하게 치지 않는다.

진짜로 삼양심공이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꼴을 보는 것은 사양이었다.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인가?”

“물으면 제대로 대답해 줄 거요?”

“대답을 안 해 주면 삼양심법을 진짜로 풀어버릴 생각 아니었나?”

“설마.”

입으로는 방금 한 말을 눙치며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지만, 눈빛은 그대로였다.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진짜 일을 저지를 놈이었다.

삼양심법을 익힌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당문과도 연관이 있는 자인데 당문에 대한 존중도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산발한 노인은 일단 어린놈의 의향대로 따라주기로 했다.

“물어보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해 주지.”

[진실입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하려는 의도는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답하기 쉬운 것부터 합시다. 노인장의 이름은 뭐요?”

“당도군이라고 한다.”

“독심흑수 당도군!”

호장주가 놀라서 외쳤다.

이한이 당문의 노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어느새 호장주와 청륜 도장이 다가와 있었다.

“별호까지 있는 것을 보니 제법 널리 알려진 사람인 모양입니다?”

“당문의 장로들 중 하나요. 당가주의 사촌이던가? 아니면 육촌이었나? 어쨌든 가까운 친척이라고 들었소. 사천 지방이 풍요롭기는 하지만 호리병처럼 닫힌 지형이라서 자기들끼리 지내는 편이오. 사천 지방 밖으로 나와서 활동하는 사람도 몇 명 없을 정도지. 그 몇 명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당도군이오. 당도군은 표국의 상행을 약탈하고 양민을 괴롭히던 진수산의 산적들을 혼자서 몰살시키며 유명해졌지. 손이 검은색으로 변했을 때 정체를 눈치챘어야 했는데.”

호장주의 말에 이한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명성 높은 정파의 후기지수였던 자였다.

그런데 다 늙어서는 강시를 만지작거리는 수상쩍은 자와 한패를 먹는다고?

원래 문제가 있는 자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숨겨진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를테면 가문에서 내린 결정에 따른 것이라든가.

이한은 질문을 이어갔다.

“웃기지도 않은 광대 가면을 썼던 놈은 누구요?”

“혈교에서 나온 자다. 강시를 만들지. 그자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그게 전부다.”

“혈교? 그건 또 뭐 하는 놈들인데?”

“몇 년 전에 마교에서 갈라져 나온 놈들이라고 들었다.”

“그럼 사천당문씩이나 되는 무림의 명문세가에서 사교도와 손을 잡았다는 거요?”

이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호장주와 청륜 도사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당도군의 태도는 별로 변함이 없었다.

간혹 눈빛이 번득이기는 했지만 차를 흠향하듯 고요한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나. 예친왕부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갔더니 나타난 자가 자신을 혈교에 속한 자라고 소개했을 뿐이다. 미리 알았다면 당연히 거부했겠지.”

[거짓과 진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좀 더 명확히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형세가 조금 불리해지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면 쓴 놈이 도망쳐 버린 것을 생각하면 아예 거짓말은 또 아닌 것 같고 말이지. 그러니까 다시 물읍시다.”

순간 이한의 말에 살기가 실렸다.

당신이 하는 말은 일단 다 들어준다는 식의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말투조자 변했다.

“예친왕부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은 맞지?”

“그렇다.”

[진실입니다.]

“혈교에 속한 자를 도와야 한다는 것도 미리 알았지?”

“그것은 아니다.”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았어도 거부했을까?”

“당연하지 않은가?”

[거짓입니다.]

이한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예친왕은 사교도를 끌어 들였고, 당문은 생각보다 밀접하게 예친왕과 붙어먹고 있었다.

사교도가 끼어도 같이 일을 할 정도로.

“이거 참. 예친왕은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무림의 세가나 권문세족을 끌어들이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사교도까지 끌어들이다니. 미친 것 아닌가?”

이한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천년 넘게 황실이 유지되는 동안 가장 위협이 되었던 자들은 사교도였다.

심지어 푸른 하늘의 시대는 끝났고, 누런 하늘의 시대가 시작된다면서 일어난 사교도의 반란으로 제국의 황실은 끝장이 날 뻔했다.

황실이 그나마 명을 부지하고 결국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무림의 명문대파 덕분이었다.

명문대파에서 나온 고수들이 사교도 우두머리의 목을 베었고, 기회를 틈타 준동하던 야심가들의 목까지 다 날려버린 것이다.

특히, 화산파에서 나온 전대의 고수는 썩은 놈들의 목은 모조리 베어야 한다면서 환관을 거의 다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들의 일가까지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살아남은 환관은 아직 어린 환관 몇 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지방관을 포함한 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란이 지나고 보니 살아남은 관리가 열에 셋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사교도를 대하는 것은 더 심해서 조금이라도 교리를 알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이끌었던 자는 모두 죽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지금도 무림의 세가들이 자기 지역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것은 그때의 영향이 컸다.

그런데 사교도와 손을 잡아?

그때의 사건은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예친왕을 지지할 세력이 있기는 할까?

경사에 자리잡고 대대로 출사해온 귀족 가문은 물론이고, 지방을 지배하는 무림문파 역시 적대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심지어 예친왕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친다고 하는 북면방어사 역시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

이한은 당도군의 증언이 가지는 파괴력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릴 수 있다면 예친왕을 아무 짓도 못하게 꽁꽁 묶어놓고 말려죽일 수 있다.

당장이라도 당도군을 경사로 끌고 가서 황실에 넘겨야 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당도군의 말이 이한의 발목을 잡았다.

“예친왕부에서 나왔다며 내게 도움을 요청한 자들은 대진국에서 온 도사들이었다.”

“황궁에 있어야 할 도사들이 예친왕부까지?”

도대체 경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중인가?

설마 가짜 도사들이 제국을 넘보는 것은 아니겠지?

청륜 도사는 당도군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당도군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수집한 증거까지 모두 가지고 가겠다고 선언했다.

가짜 도사들을 견제하고 있는 연단파의 도사들에게 넘기는 것이 가장 낫다는 의견이었다.

이한은 청륜의 주장에 동의했다.

이 시대의 정치 투쟁이라는 것은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었다.

황족이나 고위 관리, 장군, 아니면 황궁에서 오랜 시간동안 지낸 무당의 도사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한이나 청륜처럼 일선에서 실무를 뛰는 자가 할 일이 아니었다.

이한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대진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가짜 도사들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차원이동의 실마리를 잡기 위한 자신의 목적과도 부합하는 일이었다.

이한은 즉시 경사로 돌아갔다.

*

넓디넓은 황궁 지역의 한쪽에 이곳 사람들에게는 낯선 모양의 탑이 있다.

나무나 돌로 전각을 겹쳐 세우듯 올린 탑이 아니라 철로 뼈대를 삼고 구리판으로 겉을 둘러싼 탑이었다.

구리판도 그냥 밋밋한 모양이 아니었다.

금과 은으로 된 가는 실선으로 기묘한 문양을 새겨 넣었고, 중간중간 각종 보석까지 박아 넣었다.

특히 탑의 꼭대기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흰색 옥이 박혀 있기까지 했다.

얼마 전에 드디어 완성된 12층의 탑은 오직 대진국에서 왔다는 도사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의 11층에서 두 명의 도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말론.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

“물론입니다. 스승님. 종주님께서는 앞으로 3년을 예상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스승님의 공입니다.”

“앞으로 3년이라······”

말꼬리를 늘이는 스승의 모습에 엎드리고 있던 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스승의 이런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음이 분명했다.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있는지요?”

“아니다. 인력과 재료를 보내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서 잠깐 고민했을 뿐이다. 그래도 앞으로 3년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지. 너는 걱정할 것 없다.”

“무엇이든 어려운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이래봬도 종주님께 제법 신뢰받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네가 종주님의 곁에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럴 때 잘 배워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3년. 그래. 3년 후면 돌아갈 수 있다는 거지?”

말론은 스승의 혼잣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거짓을 말한 것은 없었지만 사실을 모두 말한 것도 아니었다.

3년.

3년이 필요한 것은 맞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말론의 입장에서는 과연 돌아가야 하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에게 이곳은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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