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나노머신-32화 (32/78)

32. 충분한 대가가 필요합니다.

32. 충분한 대가가 필요합니다.

이한이 황실에 대가를 요구한 방식은 복지부동이었다.

하고는 싶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곤란하다며 드러누운 것이다.

외부의 지원, 특히 무림의 고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급 낭인의 고용도 요청했다.

집부령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을 포섭하기 위한 자금 역시 요청했다.

막대한 금액이었다.

할 수 없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저 어렵다는 말을 반복하기만 했다.

명령이 내려온 계통을 통해 끊임없이 지원을 요청했다.

‘직접’ 무림의 고수를 섭외하겠다는 말도,

‘직접’ 특급 낭인을 고용하겠다는 말도,

‘직접’ 자금을 융통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 지원을 요청하기만 했다.

이것은 단순한 태업이 아니었다.

복지부동을 이용한  정치적인 공격이기도 했다.

반응은 금방 왔다.

환관 하나가 이한을 만나러 명월루에 나타난 것이다.

“사례감에서 상부로 있는 황력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젊은 환관이었다.

내공을 쌓아서 젊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나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

대략 20대 초중반 정도?

이한은 환관의 나이가 적은 것을 보자, 자신의 요구가 무시당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례감은 황제의 최측근이고, 환관 조직의 정점이기도 하다.

젊은 나이에 사례감 소속이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인데, 직책이 상부이기까지 하다.

상부는 사례감에서 서열 5~10위 사이의 어디인가에 있는 직책이다.

개인의 능력이나 황제의 총애에 따라 서열이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고위직임은 분명하다.

젊은 나이, 사례감. 높은 서열.

황력은 아마 미래의 태감으로 키우는 자일 것이다.

나이가 좀 들고 경쟁자들을 이겨낸다면 사례감의 태감으로 환관들의 우두머리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자임이 분명했다.

이한이 협상 상대로 삼기에 적당했다.

“이한이라고 합니다.”

“은밀전의 집법밀위이신 분이군요. 도지감의 태감이셨던 여문기 어르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촉망받는 인재답게 첫 시작부터가 가차 없었다.

황력이 한 말은 단순히 당신에 대해 이만큼 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은밀전 소속이고, 여문기의 후인이니 황궁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여기서 황력이 하는 말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사말이나 나눈다면 공짜로 부림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이한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무엇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은밀전주와 얽힌 인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경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여 전주가 살아있는 모습을 봤으니 됐습니다. 이제는 내 일을 해야지요.”

이한의 말에 황력은 시원하게 웃었다.

충분한 대가만 주어진다면 명령에 기꺼이 따르겠다는 이한의 의도가 너무 투명해서 오히려 기꺼웠다.

그것도 은밀전을 끼우지 않고 직거래를 하자고 제의하고 있으니 흥미롭기까지 했다.

아마 은밀전에 속한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문기가 아끼는 양녀까지 주려고 할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요. 은밀전의 일이 아니라 이한 대협의 일에 대해 의논을 해 봅시다.”

황력은 상당한 수준의 권한을 가지고 온 참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례감의 태감은 물론이고 금의위의 지휘사까지도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예친왕이나 그와 손잡은 세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방 세력과 손잡고 독립을 꾀하는 친왕들의 준동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

어서 경사를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무리한 요구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황궁의 입장에서 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시간이었고, 신뢰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한이 요구하는 것이 좀 많았다.

“내공을 늘릴 수 있는 단약, 상승의 무공심법, 황금, 관직. 이런 말을 대놓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한 가지 일로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제국 관료 조직의 꼭대기에 있는 집부령을 암살하는 일입니다. 수백 년을 내려오는 권문세가의 가주이기도 하지요. 그 여파를 생각하면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것은 아닙니다. 너무 많습니다. 내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에요.”

만약 황력이 황실의 일원이라면 어느 정도 바가지를 써도 허허 웃고 넘어갈 수 있다.

자신의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퍼주는 것도 가능하다.

주인이 자기 것을 주겠다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고 할까?

그러나 황력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고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고용인 중에서는 지위가 좀 높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고용인이다.

거기다 자신의 지위를 노리는 경쟁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함부로 곳간을 열었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직전감 같은 곳으로 밀려나서 평생 청소나 하면서 살 수도 있다.

그래서 황력은 이한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줄 수 없었다.

조금 무리한 요구라면 모를까, 이렇게 많이 무리한 요구는 곤란했다.

들어주려면 자신의 직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이한은 무턱대고 무리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력의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관료조직의 속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한이었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안 된다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 그럴듯한 명분, 법률적 해석, 여론의 지원.

그런 것이 필요했다.

그러면 결정권이 있는 사람에게 안건을 가져가게 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황력에게 쥐여 주었다.

“환관 쪽에도 은밀전과 같은 조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은밀전보다 더 위험한 일을 한다고 하더군요. 황제 폐하를 위해서 말이지요.”

황력은 이한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정치적인 숙청을 위한 조작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암살도 서슴지 않는 자들이 환관 내부에 숨어 있다.

전적으로 황제의 명령만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황력은 말을 아꼈다.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황제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신하를 암살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떠들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세운 공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요. 물론 황제 폐하께서는 그들의 충성심을 기억하시겠지만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공을 세워도 묻혀 있어야 하는 자들의 사기를 북돋울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열심히 몸 아끼지 않고 충성했더니 미끼로 쓰고 버리면 누가 충성을 하겠습니까? 다들 자기보신에나 신경을 쓰겠지요. 그러니까 황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가끔은 공개적으로 포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리면서 포상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저 포상이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구나 하고 알아챌 정도면 충분합니다.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충성스러운 사람이 필요한 법입니다. 충성은 소모품입니다. 보충하지 않고 쓰면 금방 떨어질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과하게 요구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은밀전은 이제 사실상 해체입니다. 남은 사람으로는 상방 하나 꾸리기도 힘들지요. 그런데 사실상 은밀전의 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후하게 대가를 치른다면 천리마를 구하기 위해 천리마의 뼈를 비싸게 사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사이가 좋지 않던 옹치에게 상을 줌으로 불안해하던 신하들을 안심시킨 고사를 본받는다고 생각하시지요.”

“당신을 후하게 대함으로 다른 자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낸다라······ 이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될 것은 또 무엇입니까? 적어도 황 상부가 위에 내 제안을 올려볼 만하지는 않습니까?”

이한의 말에 황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은 된다.

안 될 것은 없지.

위에 제안을 올리고 판단을 기다릴 만한 명분은 있다.

하지만 들어온 제안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환관학교에 갓 들어온 어린 환관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정도 조정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의 위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한 여지도 생긴다.

“한 갑자의 내공을 늘릴 수 있는 단약? 이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단약으로 내공을 급격하게 증진시키면 내외의 균형이 안 맞아서 파탄이 일어나기 쉽다는 것은 알지요? 여러 개의 단약을 복용하는 것은 더욱 위험합니다. 같은 종류의 단약조차 만든 계절과 날씨에 따라 기운이 달라지는데 아예 종류가 다르기까지 하면 주화입마를 겪기 딱 좋습니다.”

“상관없습니다. 다행히 내가 익힌 심공이 삼단삼극공이라서 서로 상극이 되는 기운이라고 해도 별문제 없이 조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오행심법까지 익히면 더 문제가 없어지겠지요.”

“그래서 상승의 무공심법으로 오행심법을 요구한 것이군요. 삼단삼극공이 오행심법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니 분명 얻는 바가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이것은 별문제가 없을 겁니다. 황실에는 무림의 거대 세가들로부터 진상받은 무공서적이 별개의 전각을 가득 채우고 있을 정도니까요. 만약 오행권도 그곳에 있다면 같이 드리지요.”

[그런 곳이 있다면 들어가서 모조리 스캔하고 싶습니다!]

“그런 곳이 있다니 놀랍군요. 며칠 들어가서 지내고 싶은 정도입니다.”

“황제 폐하로부터 직접 허락을 받기 전에는 불가능할 겁니다. 무림의 문파들이 황제 폐하께 충성을 증명한다는 의미로 바친 것이라서요. 한두 권 유출하는 것은 덮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곤랍합니다. 그리고 그런 무공서를 본다고 해서 무공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렇지요. 그냥 욕심이 생겨서 말입니다.”

“내공을 처음 익히게 되면 그렇게 된다고들 하지요. 그리고 황금은 실물이 아니라 전장의 전표로 합시다. 그것이 서로 편하겠지요?”

적당한 명분이 서고 황력이 가진 속사정이 사라지자 협상은 일사천리였다.

이한은 원하는 것을 대부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두 갑자 짜리 영단이 한 갑자 짜리로 줄어든다든가, 황금이 실물 대신 전표로 나온다든가 하는 타협은 있었지만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관직이었다.

“관직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마친 후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실 것입니다.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뿐이에요.”

황력은 실제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만약 이한이 살아남는다면.

과연 이 사람이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글쎄?

황력은 회의적이었다.

무공은 일류와 이류를 오고가는 정도라고 했다.

그래도 대단한 자질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불과 몇 년 만에 쓸만한 고수가 되어서 나타났으니까.

그러나 내공수련에는 타고난 신체와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리 수십 년의 내공을 쌓는다고 해도 불과 몇 년의 내공 수련만으로 날뛰기에는 괴물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3황 5제까지 갈 것도 없다.

5흉 5악을 상대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물며 상대가 상서성의 집부령이라니.

수백 년을 내려온 권문세가에는 식객도 만만치 않다.

이 계획은 애초에 성공을 전제로 한 계획이 아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