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음공이 필요하다.
37. 음공이 필요하다.
황제는 나이가 어렸다.
16세.
이제 60을 넘은 위지산과 비교한다면 손자뻘이라고 해야 할 나이였다.
어떤 종류의 일이든 주도적으로 나서서 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하물며 황제의 직무라니!
절대로 무리였다.
지금은 학문을 익히고, 경험을 쌓아야 할 때였다.
그리고 황제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것 같았다.
국정의 대부분을 고명대신들에게 맡기고 지켜보기만 했다.
예친왕 같은 사람이 선을 넘어도, 누이가 유폐되어도 고명 대신들의 의견을 구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엇인가 하려고 하지 않았다.
너무 소극적이지 않은가 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위지산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황제의 뒤에 누군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직 어린 황제가 귀에 듣기 좋은 말을 속삭이는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이리라.
16살이면 그럴 만한 나이이기도 했다.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의 나이니까.
소림 방장의 사형이라는 사람이 황제의 옆에서 속닥거리는 것을 들었을 때는 황제를 충동질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서 황제를 바라보는 순간, 위지산의 오랜 경험이 말을 해 주었다.
이것은 황제 스스로의 의지다.
그럴듯한 말로 충동질 당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에서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한 분노도, 경계심도, 불안함도 없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의기양양함도, 알 수 없는 자신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구를 보면서 어디에 쓰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는 장인의 눈빛뿐이었다.
마치 죽은 선황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집부령은 선황의 명령에 따라 고명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왜 나를 위해 일하지 않지? 왜 다른 자를 위해 일하는가?”
“억울하옵니다. 황제 폐하.”
위지산은 다시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이번에는 그냥 머리를 바닥에 댄 정도가 아니었다.
머리를 돌바닥에 그대로 내리박았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소신이 무능하여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자를 위해 일을 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옵니다. 제 가슴을 갈라서 일편단심을 증명하라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상처가 난 이마를 황제에게 과시하듯 보이고, 다시 한번 돌바닥에 머리를 내리찧었다.
좀 더 많은 피가 흘렀다.
돌바닥에도 튄 피가 제법 보일 정도였다.
“역시 집부령은 반응이 빨라. 대세를 보는 눈은 비서령이 더 낫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감각은 도저히 집부령을 따라가지 못할 것 같군.”
“그렇습니다. 비서령은 저 정도로 과감하지 못했지요. 고명을 받은 대신이 저 정도로 과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체면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 의문이군. 내가 그 정도로 약하게 보였던 걸까? 조만간 황제자리에서 쫓겨날 정도로? 집부령. 경은 왜 북면방어사가 경사의 치안에 관여하겠다는 안건에 찬성했나? 북면방어사의 병력을 대놓고 경사에 투입하겠다는 소리인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경이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경은 충성심을 믿어달라고 하지만, 경의 처신을 보면 내가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위지산은 머리가 멈췄다.
심지어 몸까지 굳었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경사의 치안정청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서 민심이 동요한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적이 있었다.
인신매매가 성행하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고발이었다.
치안정감에게 화를 내고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했었다.
거기까지는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은 상서성의 집부령이었으니까.
사실상 황제를 대신해서 관리들을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북면방어사의 병력을 치안 활동에 참여시키자는 의견에 내가 동의를 했지?
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반응도 다르군. 상서성의 우시랑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억지를 썼었지.”
“우시랑의 머릿속에는 고독이 있었습니다. 폐하.”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오. 황사. 우시랑은 심지가 굳건한 사람이오. 죽이겠다고 위협을 해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할 사람이지. 고독? 그런 것은 목숨이 아까운 자들에게나 효과가 있는 거요. 우시랑 같은 종류의 사람에게는 별 소용이 없지. 그런 데다가 우시랑은 예친왕을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매우 싫어하거든. 이상한 일이지 않소?”
위지산은 황제의 말에 동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 역시 우시랑과 별로 다르지 않은 입장이었다.
예친왕은 경사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목을 치면 더 좋고.
그런데 왜 예친왕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일에 자신이 찬성했을까?
왜 그때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을까?
위지산은 평생을 관직에 있던 사람답게 많은 경험을 가진 관리였다.
경사를 거의 떠나지 않는 다른 권문세족 출신의 관리와 달리 외관으로 지방을 전전하며 홀대당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사귀었는데, 그중에는 기묘한 재주를 가진 무림인은 물론이고 관리라면 기겁을 하고 때려잡을 생각부터 해야 할 사교의 중간 간부까지 있었다.
그때 위지산은 사교의 무리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의 훔치고 조종하는지를 목격했다
반복적이고도 단순한 말로 사람의 정신을 한 방향으로만 향하게 하면 끝이었다.
단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전 재산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가져다 바치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위지산은 갑자기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사교가 사람을 말로 농락하던 것.
말에 넘어간 자들이 바보같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자신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왜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위지산의 귀에 황제의 말이 들려왔다.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집부령의 경우는 무당파와 교류가 있다고 알고 있소. 그런데 무당의 도사들 대신 대진국 출신의 도사들이 혼천감과 제단소를 차지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지. 오히려 대진국 출신 도사들을 만난 후로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기까지 했으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였소. 집부령. 경은 당시의 일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대진국 출신의 도사!
위지산의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어둠 속에서 만난 등불이었다.
대진국 출신의 도사를 만난 후였다.
자신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은.
“저 역시 과거의 제 행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에 조종당하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의심이 가는 것은 대진국 출신의 도사들입니다. 그자들을 만난 이후로 제가 이상해진 것이 분명합니다. 혹시 황사께서 어떤 수단이 있으시다면 제게 도움을 주십시오. 제 충성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위 승상은 우시랑과 달리 머릿속이 깨끗합니다. 설령 고독이 머릿속에 있다고 해도 세간의 오해처럼 사람의 의지를 조종하지는 못합니다. 고독은 그냥 독을 품은 벌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시랑의 머릿속에 있는 고독을 몰아내고 우시랑이 계속 고집을 피우는지 확인하면 되지 않습니까? 만약 우시랑도 저와 같다면 세간의 오해가 진실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내공이 있는 자라면 고독을 몰아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위지산의 말에 황사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황사 대신 대답해 준 것은 황제였다.
“우시랑은 죽었다. 고독을 내공으로 위협하여 머릿속에서 몰아내려고 하는 순간 고독이 독을 쏟아냈다. 내공으로 몰아내지 못하는 고독도 있는 모양이다.”
위지산은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한 가닥 기대가 무산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고독이 우연히 머릿속에서 나가는 경우도 있나?
“황사. 혹시 머릿속에서 고독을 몰아낼 때 두통이 심합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머릿속에 있는 벌레를 몰아내는 것인데.”
위지산은 얼마 전부터 자신의 집에 머무르기 시작한 숙부가 떠올랐다.
금 하나 들고 강호를 돌아다니며 온갖 사건을 몰고 다니던 숙부였다.
은원을 무마하기 위해 쏟아부은 가문의 재산이 얼마던가!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뚱땅거리는 그놈의 금.
숙부가 머무르기 시작한 첫날은 두통이 심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기절하듯 잘 수 있었다.
그게 숙부가 타던 금 때문이 아니라 고독 때문이었나?
어쩌면 음광이라고 불리는 숙부의 음률에 해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을 움직일 때도 칼을 목에 들이밀면서 협박하는 것보다 살살 달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지 않던가.
위지산은 자신의 생각을 황제에게 설명했다.
“그런가? 경의 숙부가 강호의 기인임이 분명하니 한마디 말로 부르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경이 직접 가서 숙부를 데려오라.”
그리고 황제는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가서 너무 놀라지는 말라. 상황이 변했으니.”
황제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집의 절반이 불에 탔고, 집에서 부리는 사람도 대부분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약탈을 안 당한 것을 보면 단순한 강도는 아니었다 .
만약 자신까지 집에서 죽었다면?
공포에 질린 어떤 멍청한 놈이 선수를 치겠다고 나섰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예친왕에게 달려가거나.
어떻게 되었든 죽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은 분명했다.
명단의 첫머리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어쩌면 위씨 성을 가진 관리들의 이름이 모조리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숙부를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그의 숙부는 황궁으로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내상을 입어서 못 가. 음공을 시전할 수가 없거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숙부님. 제발! 우리 가문의 명운이 달렸습니다!”
“들어보니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음공이 필요한 것이잖아? 그렇다면 저놈을 데려가. 나보다 낫다.”
위지산의 눈이 이한에게 향했다.
*
이한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위자안을 바라보았다.
이한은 아직 위씨 세가의 저택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위자안이 음공을 미끼로 이한을 잡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한은 다시 한번 노래의 파동으로 위자안의 음공을 상쇄해버렸다.
내상을 입었음에도 운용할 수 있었던 아주 약간의 내공을, 손뼉 소리로 일으킨 파동에 실어서 다시 한번 이한을 압박하던 위자안은 이한의 대응에 다시 한번 피를 토해야 했다.
손뼉소리가 반대되는 파동에 상쇄되어 사라지는 순간 거기에 실린 내공이 흩어지면서 반동이 심하게 온 것이다.
둘 사이의 대결은 그것을 끝이 났다.
그러나 위자안은 이한과의 대결을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위자안은 자신의 음공을 대가로 이한과 음공에 대해 토론하기를 원했다.
음률에 미쳐있다는 사람다운 행동이었다.
이한은 새로운 종류의 비살상 무공이라는 점에서,
나노는 다수를 상대하기 좋은 무공이라는 점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이한과 위자안이 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궁에 가야 한다고?
게다가 황제를 봐야 한다고?
이한은 황제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물론 위지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한은 위씨 세가의 일원이 아니다.
위지산이 이한을 데려가고 싶다면 충분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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