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천영문에서 알게 된 것들
45. 천영문에서 알게 된 것들
경사에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로 곳곳에서 탄광이 개발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 하북과 산서의 경계에 있는 광대한 탄광 지대였다.
처음에는 작은 산골 마을 몇 개가 전부였던 곳이었지만, 사람과 돈이 몰리자 탄광 도시 몇 개가 생기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한과 종대보가 도착한 북양은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탄광도시였다.
“생각보다 번성한 곳이군요.”
경사의 번화가 못지않게 흥청거리는 모습을 본 이한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경사보다 천박하고 노골적이기는 했지만, 유흥가에서조차 경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탄광은 돈이 되니까. 이곳에 얼마나 많은 부자가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걸고 있는지 안다면 자네도 놀랄걸세.”
쌍수괘검 종대보는 하북 출신이고, 북양 근처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자랐다고 한다.
평생을 선친처럼 약초나 캐면서 살 줄 알았는데, 우연히 만난 천영문의 고수가 종대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경우다.
지금 종대보가 절정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종대보의 스승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보통이 아닌 사람이었다.
종대보의 사문인 천영문 역시 평범한 삼류 문파가 아니었다.
자그마치 모용세가의 방계다.
변경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요녕의 토착 세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요녕에서는 왕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곳이 바로 모용세가다.
그런 곳의 방계이니 빈손으로 시작하는 곳과는 결이 다른 문파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천영문의 무공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대성하면 한 초식에 천개의 그림자를 남긴다는 천영쾌검을 독문무공으로 한다.
쾌검인 것을 보면 모용세가에서 흘러나온 검법인듯한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대성한 사람이 없다는 정도?
한때는 처음으로 천영쾌검을 대성하나 싶어서 꽤나 기대받았었다는 종대보의 무공 역시 천영쾌검을 근간으로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천영문은 북양에 근거지를 둔 문파다.
그것이 금의위에서 종대보를 파견한 가장 큰 이유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혈연, 학연, 지연이라는 인맥의 삼신기 중 두 개나 장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만약 종씨가 아니라 모용씨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사람이 경사까지 와서 금의위 소속으로 일할 리가 없으니 종대보라면 금의위에서 낼 수 있는 최상의 인물이었다.
“일단 내 사문으로 가지. 미리 전갈을 해놓았으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준비해 놓았을 걸세. 가서 좀 쉬고 기력도 회복해야지.”
사실 쉽지 않은 길이기는 했다.
무공의 고수인 그들이 휴식을 이야기할 정도니,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길을 오가는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이한은 석탄이 경사에서 비싸게 팔리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봤는데, 왜 그렇게 비싼 가격을 받는지 이제는 이해가 갔다.
중간에 파손되는 수레는 그렇다고 해도, 과로로 죽어 나가는 우마를 본 것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 손해를 벌충하고 이익을 챙기고 상납까지 하려니 석탄이 비쌀 수밖에.
게다가 이한과 종대보는 단순히 이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석탄을 경사로 나르는 회영상방의 실제 모습을 알기 위해 중간에 몇 개의 상행을 조사하기도 했다.
회영상방에서 나르는 물품을 확인하고, 행수들과는 따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회영상방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면서 회영상방의 진짜 모습을 조사한 것이다.
회영상방의 행수들은 예친왕이 행방불명되어서 자신들이 잡은 끈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입이 가벼워졌다.
물론 입이 가벼워지지 않은 자도 어쩌다 있기는 했지만, 가볍게 만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종대보 역시 별호를 얻을 정도로 오랫동안 강호에서 구른 덕분인지 과묵한 자의 입을 여는 것이라면 이한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했다.
결론은 구린 것이 진짜 많은 놈들이다 정도.
석탄을 경사로 나르고 난 후의 빈 수레에 얼마나 많은 물자와 인력을 실어서 북쪽으로 보냈는지 어림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실제로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와 장사를 위한 물품을 보낸 것이 대부분이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최근 2년간 움직인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무슨 짓을 해왔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천영문은 북양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북양이 규모를 키워가던 초기부터 터를 닦았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북양 한복판에서 버틴 것을 보면 보통 실력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소위 말하는 지방의 유력자이며, 통치를 위해서는 반드시 포섭해야 하는 지방 세력인 셈이다.
아마 북양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이들의 눈과 귀를 피하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천영문의 문주는 겉보기에도 전형적인 쾌검수의 체형을 가진 남자였다.
종대보도 그렇고, 천영문에 들어오면서 본 사람들의 체형도 비슷한 것을 보면, 천영문의 내공심법은 쾌검에 최적화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이한의 판단에 나노 역시 동의했다.
신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호르몬이 감정을 지배하는 것처럼, 내공도 신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체형을 바꿀 정도로 말이다.
나노는 내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에 대부분의 자원을 할당하고 있었다.
장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들어 가는 천영문의 문주는 종대보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형. 발걸음이 너무 뜸하셨습니다.”
“미안하오. 문주.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더군. 내 마음 같지가 않았다오.”
“그래도 이곳이 사형의 고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함께 오신 분께도 인사드립니다. 천영문에서 문주를 맡고 있는 모용강입니다.”
“어사대부 이한이라고 합니다. 한가지 알아볼 일이 있어서 미리 양해를 구하지도 못하고 급하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별말씀을! 사형과 함께 오셨으니 천영문의 귀한 손님이십니다. 손님 접대가 부족하지나 않을까 걱정할 뿐입니다.”
천영문주는 이한의 신분을 알게 되자 살짝 안색이 변했다.
관직을, 그것도 황제 직속의 감찰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어사대의 관직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천영문주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한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젊지만 느껴지는 기도는 평범하지 않았다.
관직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금의위에 몸을 담고 있는 사형.
어사대의 고수.
천영문주는 그의 사형이 부탁한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예친왕의 이권을 회수해가는 정도가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서로 간에 적당히 겸양하는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묻고 답하며 시간을 끈 후에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뭐 이리 사설이 긴지. 이곳 사람들은 인사를 나누다가 숨이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모용강의 내공 수준이 종대보에 미치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한 님 보다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머릿속은 깨끗합니다. 최근에 팔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아문 흔적이 보입니다.]
나노는 툴툴거리면서도 계속 주변의 정보를 파악하고 전달했다.
이한은 태연한 신색으로 모용강을 다시 한번 흘낏 보았다.
“음······ 일단 사형께서 알아보라고 하신 것을 수소문해보았습니다.”
종대보가 미리 연통해서 알아보라고 한 것은 석탄을 운반하는 회영상방과 그들이 주로 거래한다는 곽가상방의 탄광에 대한 정보였다.
특히, 인원과 물자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 그 부분을 잘 살펴달라고 강조했었다.
“다행히 거래하는 상인 중에 그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있었고, 개방에서도 알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부족하게나마 조사는 가능했습니다.”
역시, 터줏대감의 위력은 대단했다.
조사를 부탁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방 정보를 찾아온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무척이나 어려운 조사였다.
비밀스러운 단체가 숨어서 무엇인가 하고 있는 중이다.
흔적을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회영상방이나 곽가상방 같은 자들로 물품이나 인원의 출납을 숨기고, 우연히 접근하는 외부인도 차단했을 것이다.
계속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아온 자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조차 쉽지 않다.
“곽가상방에서 오래전에 폐광한 곳으로 계속 물자가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수량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미 알게된 것만도 적지 않은 분량이라서 이게 맞나 싶은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근처에서 자꾸 사람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미 약초꾼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난 지 꽤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백초장에서 곽가상방에 항의를 하기도 한 모양입니다.”
“곽가상방에서는 뭐라고 했다고 합니까?”
“자신들은 모른다는 말뿐이었답니다. 이미 폐광을 한 지 오래되어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는 납득할 사람이 없었을 텐데?”
종대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약초꾼이라고 해도 조직을 갖추고 있으면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특히, 북양의 약초꾼들은 백초장이라는 무림의 문파와 엮여서 활동한다.
백초장의 무력은 크게 볼 것이 없지만, 의술과 연관되어 형성한 인맥이 대단했다.
만약 백초장에 문제가 생긴다면 백초장 대신 나서줄 문파가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곽가상방이 예친왕을 뒷배로 두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경사에서의 일이고 이곳은 북양이다.
일개 상방 주제에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렇지 않아도 최근 폐광으로 조사를 나갔던 사람들이 행방불명되어서 몇몇 문파에서 조사를 위해 사람을 모은다는 말이 있습니다.”
“벌써 움직이고 있었군요.”
역시 그렇지.
아무리 북양이 경사에서 멀다고 해도, 한 달 전에 벌어진 일을 아직도 모를 정도는 아니다.
곽가상방의 뒷배가 사라졌으니 그동안 불편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곧장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이한은 종대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종대보 역시 이한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그는 차를 내려놓고 천영문주에게 말했다.
“조사를 위해 몇몇 문파가 모인다고 했는데 혹시 백초장에서 주관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사형. 아무래도 사람을 잃은 자들이 앞장서는 것이 명분상 옳으니까요.”
“그렇다면 천영문은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북양에서 시시비비를 따져야 할 문제가 생겼는데 북양의 무림 문파 중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천영문이 그대로 있다면, 북양 사람들은 천영문이 곽가상방의 편을 든다고 할 거요.”
“그렇습니다. 사형의 말이 옳습니다. 그래서 문의 제자들 중 몇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실력이 영 불안해서 걱정이었는데 마침 사형께서 오셨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사형께서 제자들을 이끌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문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천영문의 제자 된 입장에서 따르지 않을 수 없소. 이 대협도 함께 가도록 합시다.”
“가지 말라고 해도 따라갈 생각이었습니다.”
모두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이한 역시 어디까지 오염되어 있을지 모르는 북양의 지방군을 동원하는 것보다는 무림의 고수들과 함께 조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천영문 사람들은 다음날로 곧장 백초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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