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지하에 있는 사람들
49. 지하에 있는 사람들
*
“종주님. 6관이 돌파당했습니다.”
그렇게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7년 넘게 고생하면서 건설해온 구궁연환금쇄진(九宮連環禁鎖陣)의 9개 관문 중 남은 것이 3개에 불과하다는 소리니까.
베르티오는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치솟아 올라오는 분노를 느꼈다.
세상은 왜 자신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가?
저곳에서 이곳에서나 쓸데없이 참견해 오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분노가 이성을 잠식하자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이 그를 지배하러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죽음과 파괴에 대한 충동.
흡혈과 식인에 대한 욕구.
당장이라도 본능대로 날뛰며 분노를 해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 정도의 자각은 아직 가지고 있었다.
베르티오는 장식품처럼 주변에 세워둔 노예들 중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의지가 노예를 지배했다.
노예는 자신이 몸이 멋대로 베르티오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노예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공포를 눈에 담는 것뿐이었다.
베르티오에게 가까이 다가간 노예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말라비틀어졌다.
하지만 베르티오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꼈다.
한 명 더 가까이 오게 해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앞으로 내밀도록 했다.
손을 내밀면 머리를 잡기 딱 좋은 자세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피와 정기를 흡수했다.
말라비틀어진 미라가 하나가 더 생겨났다.
황홀감이 베르티오의 영혼을 휩쓸고 지나갔다.
충동과 욕구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몇 명 더 흡수할 수 있다면 이 분노 역시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았다.
베르티오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려고 하자, 보고를 위해 들어왔던 제자가 그를 제지했다.
“종주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지금까지 왔던 자들과 다른 수준의 적들입니다. 도사들은 물론이고 중들도 보였습니다. 4관도 5관도 너무 빨리 무너졌습니다. 이제 곧 7관입니다.”
너무 빨리 무너졌다고?
이제 곧 7관이라고?
베르티오의 이성이 완전히 돌아왔다.
그는 손을 내리고, 중얼거렸다.
“혈교 놈들이 좋은 무공을 바쳤어. 너무 좋은 것을 바쳐서 곤란할 정도군. 혼돈과의 연결이 끊어져서 폭식의 권능을 잃었지만, 차라지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피와 정기가 이렇게 맛이 있다니. 말론. 너는 체접흡정흡기신공을 익히지 않았지?”
“제 영혼에 새긴 계열은 현혹이고 설득입니다. 그런 무공은 제게 맞지 않습니다. 종주님.”
“아쉽군. 여러 가지로 아쉬워. 너 같은 인재를 다른 계열에서 먼저 주워간 것도 아쉽고, 우리 중 불과 4개의 계열만이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아쉬워. 가장 아쉬운 것은 이곳을 완성하기에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겠지.”
말론은 즉시 이마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종주의 행동에 제동을 걸다니!
무리한 짓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종주로부터 자신이 폭주하거든 멈추게 하라고 명령을 받았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행동에 제동을 걸고 직언을 하는 것에 대해 종주가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까?
문제는 지금 종주의 말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길어진다는 것은 고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민의 결과가 제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드물지 않았다.
그의 스승인 에클린의 경우도 그랬다.
에클린의 말이 길어질 때마다 제자가 하나씩 죽어 나갔으니까.
다들 자신보다 오랜 시간 동안 스승을 섬겨온 자들이었다.
그가 지금 버티고 선 자리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았기에 굴러떨어진 것이지, 자신의 능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말론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그의 스승인 에클린이나 그의 종주인 베르트오처럼 혼돈의 신에게서 선택받은 자들은 그 자체로 질문과 답변이 완결된 자들이다.
존재 자체가 귀하다.
하지만 자신 같이 혼돈의 신을 선택한 자들은 비 온 뒤의 버섯처럼 끊임없이 생겨난다.
선택된 자들이 선택한 자들을 소모품처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소모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선택당하는 것이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클린으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나?”
“예.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너의 영혼에 새겨진 에클린의 지배는 아직 그대로 존재하나?”
“예. 그대로입니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군. 어느 쪽이냐?”
“제국의 서부 방향입니다. 그쪽 방향에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정말 부지런하고 수단도 좋은 녀석이야. 제국 서부에는 언제 손을 뻗어둔 거지? 토끼도 아닌 것이 굴을 세 개나 파두었었군 그래.”
베르티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까지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에클린은 도망쳤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의 탑은 공격당하는 중이다.
베르티오는 에클린의 속이 음흉해서 그렇지 능력만큼은 인정할만하다고 생각해왔다.
언제나 쫓겨 다니던 때조차 단 한 번도 자신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에클린이 앞으로 3년 정도는 인력과 물자를 보내는 것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 아침에 황실에 뿌리내렸던 조직이 말살당하고, 홀로 도망칠 정도로 궁지에 몰린 것이다.
에클린답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그만큼 적들이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베르티오는 자신들이 이 땅에 떨어진 후, 이 세상에 대해 파악한 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편견 때문에 오해를 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들을 추격하던 광신적인 교단이 없다는 것만으로 너무 마음을 놓았던 것일까?
이곳에는 자신들의 손이 닿은 자를 판별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에클린의 조직이 뿌리째 뽑혀 나간 것을 보면 말이다.
만약 베르티오가 따로 운영하던 상방이 없었다면 장님에 귀머거리인 상태로 날벼락을 맞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벌써 6번째 관문이 무너졌다면 기관진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인가? 우리는 무궁연환로의 법칙에 따라 미로까지 건설하지 않았던가?”
“아닙니다. 적들이 기관진식의 중간을 부수고 구궁연환금쇄진에 난입했습니다. 4번째 관문부터 부수면서 들어오는 중입니다. 아무래도 기관진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의 난입은 안 돼. 막아야 한다. 천문망혼진을 이용해 천지인의 기운을 중심에 모아놓았는데 충격이라도 가면 큰일이다. 자칫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5년의 시간을 날리는 셈이다. 지금 즉시 구궁연환금쇄진(九宮連環禁鎖陣)의 금제를 풀고 활성화해라. 그동안 모아놓은 천지인의 기운이 아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알겠습니다. 종주님.”
“나는 탑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겠다.”
베르티오가 자신의 거처에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말론에게도 여러 명의 마법사가 따라붙었다.
모두 그의 스승인 에클린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얼마 후 구궁연환금쇄진의 금제가 풀렸다.
거대한 건축물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는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이한의 일행이 들어간 곳은 구궁연환금쇄진의 이면에 있는 통로였다.
언가의 소녀가 말한 톱니바퀴와 수차가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사람 한둘이 간신히 지나다닐 만한 통로가 길게 이어져 있고, 중간중간 함정을 움직이기 위한 기관장치도 설치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구조물이 있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대규모의 지하 건축물이라면 환기구도 필요하고, 유지보수를 위한 통로나 창고 같은 것도 있어야 할 것이고, 겸사겸사 천문망혼진이 모아들인 기운이 흘러갈 통로도 필요할 테니 말이다.
“이런 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기관진식을 수리하는 사람들이 따로 다니는 통로까지 있다니!”
언가의 소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이런 대규모의 기관진식은 이야기로나 들어본 것이라면서 황홀해했다.
“위험하지는 않겠습니까?”
“천만에요! 이곳에서 가장 안전한 곳일 거예요. 물론, 만약을 대비한 함정이 있기는 하겠죠. 하지만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월등하게 안전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기관진식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두 무공을 익혔을 리가 없잖아요? 여기는 그런 사람들이 다녀야 할 길이에요. 그리고 이곳에는 저런 것들이 없지요.”
언가의 소녀가 가리킨 것은 안쪽 통로 곳곳에 기대어 있는 강시였다.
아니, 강시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죽은 시체 같았지만, 이한은 그들의 심장이 아주 느리게나마 뛰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가사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야 할까?
분명 시체는 아니었다.
이면 통로 중간중간에 안쪽 통로를 살펴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내놓은 덕분에 일행은 안전하게 안쪽 통로를 살펴볼 수 있었다.
물론 직접 뚫어놓은 것은 아니고, 수정이나 유리를 구멍에 박아서 공간을 분리하고, 잠망경처럼 만든 구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안쪽 통로의 상태를 살피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강시일까?”
종대보의 질문에 언가의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하지만 이상하군요. 강시를 움직이려면 술사가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저렇게 방치하다니. 무엇인가 다른 것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저런 것을 상대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으면 다행이지. 모두 서두릅시다.”
종대보의 말에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로로 만들어진 곳이었지만, 이면 통로까지 미로는 아니었다.
덕분에 일행은 빠르게 전진할 수 있었다.
단지 중간중간 예상외의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 설치해 놓은 함정이 거슬리기는 했다.
[10보 앞의 벽에 있는 구멍을 조심하십시오. 철로 된 상자가 벽에 매립되어 있습니다. 암기발사장치로 추측됩니다.]
[10보 앞에 인계선으로 추측되는 철선이 있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하지만 모든 함정은 나노가 미리 탐지해 냈다.
암기를 발사하기 위한 구멍은 물론이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함정까지 나노의 시야를 피할 수 없었다.
“이 대협은 눈이 정말 좋군요. 그런 미세한 흔적까지 다 잡아내다니!”
물론 찬사는 이한의 몫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이동하던 중간에 갑자기 통로 전체에 진동이 발생했다.
마치 멀리서 통로의 일부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통로 전체가 흔들렸다.
먼지가 떨어지고, 가끔은 큰 돌조각도 떨어졌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질렸다.
어쨌든 이곳은 지하였다.
이면 통로든 안쪽 통로든 무너지면 죽는 것이다.
설사 지금 내 머리 위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면 통로가 막히면 지하에 갇혀서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무너진 걸까요?”
“글쎄. 하지만 진동에 비해 소음은 그리 크지 않았네.”
종대보의 의견에 이한 역시 동의했다.
통로가 무너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방금까지도 맹렬하게 안쪽으로 흘러가던 기운의 흐름이 멈췄다.
그리고 시체처럼 기대어 있던 자들의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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