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진법을 부수다.
52. 진법을 부수다.
“아니, 쌍수쾌검 아닌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5년 전이었던가? 정말 오랜만이로군.”
쌍수쾌검 종대보는 관부 소속의 무림인치고는 무림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다.
원래 출신도 천영문이라는 제법 이름있는 문파였고, 강호에서 활동한 기간도 길었다.
게다가 금의위에 들어간 이후에도 몇 차례나 무림의 일에 끼어들었다.
덕분에 이곳저곳에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지금도 금방 종대보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반갑습니다. 팽 대협. 여전하시군요. 이곳으로 오면서 미로진을 부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누군지 정말 대단한 실력이라고 감탄했는데, 지금 팽대협을 보니 당연한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한 걸세. 한두 군데도 아니고 여러 곳의 벽을 나 혼자서 부술 수는 없지. 게다가 진법에 의해 보호받는 벽이어서 모산파의 도사께서 미로진의 약점을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그나마도 불가능했을 걸세.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
팽가의 사람은 이한에게 관심을 보였다.
어투는 친근했지만, 눈빛에는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쌍수쾌검처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곳에서 갑자기 만나면 조심하는 것이 정상이다.
과거에 친분이 있었다고 해서 지금도 같은 편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나?
그런데 그 옆에 처음 보는 사람이 붙어있다면?
이한은 상대방의 눈에 서린 경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신분을 밝혔다.
“이한이라고 합니다. 어사대부의 관직에 있습니다.”
경계심이 약간 떨어졌다.
방금까지 10점이었다면 지금은 7점도?
적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너는 뭣 하러 이런 곳까지 왔냐는 의문이 서린 눈빛이었다.
“어사대에서 일하는 분이셨군. 육선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끔 보았지만, 어사대에 있는 분이 경사를 떠나 이렇게까지 멀리 발걸음하는 것은 처음 보았소. 나는 하북 팽가의 팽호도라고 하오. 강호에서는 나를 벽력일수라고 부르지. 혹시 이 대협의 사문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되겠소?”
하북 팽가는 제국 북부의 중요 도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북경에 위치한 가문이다.
가문의 구성원들 대부분이 상남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덩치 크고, 주먹 잘 쓰고, 칼은 더 잘 쓰고, 호쾌하고 거침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평판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의리를 부르짖다가 손해도 종종 보지만, 나중에 결과를 따져보면 실리도 챙길 만큼은 챙겨가는 곳이라고 할까.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 의심을 사는 것은 곤란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한에게 사문에 대한 질문을 한 것 같지만, 진짜 질문은 어사대에서 왜 경사를 벗어나 이렇게 멀리까지 왔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금의위 사람과 함께.
그래서 이한은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관리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무공을 익혔기에 따로 사문이랄 만한 것은 없습니다. 어사대에 속했음에도 경사를 떠나 이렇게 멀리 온 것은 도망친 반역자를 추격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한은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저곳에 그들의 근거지 중 하나가 있다고 하더군요. 경사에서 잡은 반역자들을 고신해서 얻어낸 내용이라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미 근거지를 비우고 도망을 쳤겠지만 그래도 혹시 도망친 반역자들에 대해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한은 저 앞쪽에서 진형을 이루고 모여 있는 해골 무리를 바라보았다.
칼과 방패를 가진 것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창을 가진 것들이 서 있었다.
심지어 활을 가진 것조차 있었다.
군데군데 유달리 뼈가 희거나, 왕관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이 무리를 지휘하는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저것은 군대였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오니 반역자를 추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더군요. 이런 끔찍한 곳은 처음 봤습니다.”
“과연 그렇소. 몇 차례 사교도의 소굴을 소탕한 적이 있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문다면 이런 곳이 될까? 절대로 그냥 두어서는 안 되는 곳이오.”
중간에 끼어든 사람은 도사였다.
백발이 성성하고 길게 흰 수염까지 드리운 것이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신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선답지 않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특히, 승려와 도사들은 모두 그의 분노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무림인들은 모두 이한 못지않은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일부는 절정을 뛰어넘은 것이 아닐까 싶은 사람조차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한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다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겁니까? 미로진을 지나서 여기까지 오면서 보니, 급하게 서둘러서 돌파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따로 사람을 보내서 이곳을 보호하는 진법을 부수고 있는 중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길이 열릴 테니까 기다리면 됩니다.”
이한의 의문을 풀어준 사람은 젊은 도사였다.
그는 오랫동안 고행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팔이나 얼굴은 뼈만 남아 있었고, 피부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형형한 것이, 어둠 속에서 두 개의 횃불을 켜놓은 것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도사는 아니라는 티가 팍팍 나는 사람이었다.
“도사께서는 누구신지요?”
“모산파의 석뢰라고 합니다.”
모산파.
이한은 모산파에 대한 속설을 떠올렸다.
부적과 술법.
당연히 진법에 대한 조예도 있을 것이다.
“언가의 소저가 근처의 산에 천문망혼진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던데 그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진법에 기운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파괴해야 합니다. 그래야 저것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석뢰가 말하는 저것들은 해골 병사들을 의미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이미 해골 병사들을 공격했던 모양이다.
하기는 미로진을 부수면서 통과할 정도로 과격한 자들이 처음 본다고 해서 해골 병사들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기는 하다.
그러나 해골 병사들은 부수는 대로 계속 땅에서 솟아 나왔다고 한다.
뼈가 부러져서 쓰러진 것들도 금방 다시 복구되면서 일어서서 덤벼왔다고.
처음에는 백여 개에 불과했던 해골 병사들이 싸우는 동안 어느새 삼백 개가 넘어버렸으니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무림인들이라고 해도 곤란해진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고 지나갈 수도 없었다.
저 앞으로 얼마나 많은 해골 병사들이 있을 것인지, 아니 그보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라도 있으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일단 물러선 것이다.
“아시겠지만 땅속에는 지기가 흐릅니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일부는 강물이 되어 흐르고, 일부는 지하로 스며들어 지하수가 되고 우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은 땅속으로 수렴되어 흐르게 됩니다. 그것이 흐르는 길은 산맥을 따라가기 마련인데 그것을 용맥이라고 부릅니다.”
석뢰는 이한을 향해 설명을 계속했다.
“용맥을 통해 흐르는 지기는 엄청난 위력을 가집니다. 감히 인간이 감당할 수 없지요. 만약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지진을 일으키고, 화산을 터뜨릴 수 있습니다. 강이 흐르는 물길을 비틀 수 있고, 땅을 풍요롭게도 메마르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지형을 살피니 산을 타고 흐르는 기운을 비틀어서 모아들이더군요. 그리고 그 기운을 이용해서 이곳에 설치한 거대한 진법의 동력으로 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천문망혼진을 부수도록 이미 사람을 보내놓은 참입니다. 천문망혼진을 통해 공급하는 자연의 기가 없으면 저 해골들도 더 이상 되살아나지 못할 겁니다.”
이한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한의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나는 볼 수 있으니까요.”
석뢰는 대열을 이루고 서 있는 해골 병사들의 앞을 가리켰다
“저 앞을 지나가면 이곳으로 끌어들인 자연이 기운이 땅으로 흡수됩니다. 그리고 저것들이 땅속에서 기어 나오지요. 아니면 저것들을 부수어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저것을 부수면 이곳에 흐르는 자연의 기운이 부서진 뼈를 향해 몰려듭니다. 그러면 다시 일어서지요. 도우께서는 보이지 않겠지만, 저 해골들 하나하나에 모두 연결된 선이 있습니다. 선을 끊거나 선을 통해 공급되는 기운을 끊어야 합니다.”
나노는 즉시 이한의 시야를 키를리안 시야로 바꿨다.
이한은 나노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해골의 머리에서 땅으로 연결되는 가는 선 같은 것이 보였다.
저것이 바로 석뢰가 말하는 선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기를 볼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상단전을 연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열린 사람이 아니라면 화경에는 들어야 비로소 상단전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열린 사람은 일찍 죽습니다. 선천지기가 열려있는 상단전을 통해 흩어지지만, 보충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요.”
이한은 무당의 풍천이 떠올랐다.
부적을 사용하던 무당 좌도 진선류의 도사였다.
아마 모산파에도 그것과 비슷한 공부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좀 더 강력하고, 좀 더 위험한 종류임이 분명했다.
피골이 상접한 석뢰의 모습을 보니 익히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한은 손가락으로 허벅지쪽에 글을 썼다.
나노에게 석뢰를 지켜보도록 명령했다.
키를리안 시야가 아니라 좀 더 나은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석뢰의 말이 끝나자 팽호도는 이한과 종대보를 몇몇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반겨준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중간에 끼어든 관부의 고수들에게 보일 법한 예의와 경계, 딱 그 정도의 반응뿐이었다.
다행히도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갑자기 어떤 낯선 느낌이 이한을 휩쓸고 지나갔다.
무겁고 답답하던 공기가 갑자기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끈이 사라졌군.”
“그렇군요. 끈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림인들 중에서도 실력을 어림잡기 어려웠던 자들의 반응이었다.
이한은 키를리안 시야를 통해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해골 병사들의 머리에서 땅으로 연결된 가는 실 같은 것이 사라진 것이다.
아직 연결되어 있는 것도 몇 개 있었지만, 그것들조차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늘어졌다.
드디어 기다림이 끝난 것이다.
천문망혼진을 부수러 갔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할 일을 한 모양이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 해골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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