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그들이 준비한 것
54. 그들이 준비한 것
경사의 외진 골목?
이한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 하나 지나다니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좁은 골목골목.
낡고 망가진 채 방치된 건물들.
길가의 잡초처럼 그곳에 그냥 존재하다 사라지는 사람들.
오래전 계획도시의 일부로 만들어져서 원래의 모습은 서로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모양새였었지만, 지금은 제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쇠락해가고 있는 곳.
경사의 빈민가에 있는 뒷골목이었다.
이곳은 이한이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처음으로 깨어난 장소였다.
그리고 저들.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막 나가는 자들.
사악한 자들이 활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거 뼈와 가죽뿐이라서 고기로는 영 별로겠는데.”
“까다롭기는. 그냥 육수라도 내면 되는 것 아니오? 가벼워서 들고 가기도 좋겠구먼.”
이한을 앞에 둔 남자들이 수군거렸다.
기억에 있는 얼굴들이었다.
골목에 쓰러져 있던 이한을 흑점에 팔아넘긴 자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만두 속재료로 팔렸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만약 여문기가 그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한은 육수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당시의 그는 차원이동의 여파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이런 장면을 보는 거지?
이한은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환상을 현실로 착각할 정도로 맛이 가지는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들이마신 성분 미상의 기체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정신도 명료했다.
그 기체는 이한의 기억 중에서 충격적이거나 인상적인 것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떨어져서 저런 말이나 듣는 것이 그렇게 내게 충격적인 경험이었나?
당시에는 이곳 말을 몰라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이한이 겪은 경험 중에는 저런 것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들도 있었다.
그가 군인으로서 겪은 전투, 나중에는 기관의 전투원으로서 겪은 경험 중에는 놀랍다 못해 끔찍한 것도 여럿이었다.
그런데도 저런 일을 먼저 떠올린다고?
사람의 정신은 그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법이다.
이한은 차원이동 중에 벌어진 사고가 그만큼 자신에게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라고 납득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납득을 하고 환상을 무시하려고 하자 갑자기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 같았던 환상이 달라졌다 .
분명 자신을 둘러메고 흑점으로 가야 할 자들의 품에서 단검이 나온 것이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의례 짓는 표정으로 육질에 대해 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단검을 꺼내 들고 이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한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단검으로 가슴을 찔렸다.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고 연달아 찔러오는 단검을 몇 번이나 느껴야 했다.
그때마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과 온몸을 덮치는 탈력감이 이한을 사로잡았다.
환상이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야!
이한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확신을 갖고 다시 여러 번 중얼거렸다.
생각은 사람을 지배한다.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다.
실제로 생각만으로도 사람의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짜 약을 먹어도 진짜 약을 먹은 것처럼 병에서 낫고,
냉동실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고장난 냉동실 안에서도 얼어 죽는 것이 인간이다
그만큼이나 인간은 암시에 약하다.
칼에 찔렸다고 생각하면 진짜로 찔린 것처럼 몸이 반응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한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이며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강조했다.
하지만 그래도 통증이 너무 심했다.
진짜 칼로 가슴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설마 진짜 찔렸나?
의심을 억지로 떼어놓으려고 노력할 때, 멀리서 나노의 시끄러운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노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한님! 몸을 낮추십시오. 엎드려요! 뭐합니까! 정신 차려! 엎드리라고! 경고! 경고! 가슴에 화살이 박혔습니다! 폐와 혈관 일부가 손상되었습니다. 긴급 복구에 들어갑니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보았다.
짧은 길이의 화살이 가슴에 박혀있었다.
쇠뇌에 사용하는 볼트였다.
손으로 볼트를 만졌다.
만질 수 있었다.
통증도 함께였다.
단검은 환상이었지만, 화살은 환상이 아니었다.
가슴의 통증은 환상통이 아니라 진짜 통증이었던 것이다.
“씨X?”
저절로 욕이 나왔다.
이한은 그대로 무너지듯 몸을 바닥으로 낮췄다.
다시 한 발의 볼트가 그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주변의 무림인들 중 여러 명은 이미 바닥에 누운 채 신음하고 있었다.
심지어 죽은 자도 있었다.
아직 멀쩡하게 서서 멍한 눈을 하고 있는 자도 여럿이었다.
이들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쇠뇌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사냥당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한의 눈에는 경사의 뒷골목도 여전히 겹쳐서 보였다.
죽어가는 무림인들이 경사의 뒷골목에서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노!”
[예. 이한님.]
“내가 보고 있는 경사의 뒷골목을 너도 보고 있는 거냐?”
[아닙니다. 이한님의 시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이곳의 모습뿐입니다. 지금 이한님이 경사의 뒷골목을 보고 있다면 아마 이한님의 뇌에서 자체적으로 생성하는 정보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종의 자각몽이나 환각?”
[그렇습니다. 이한님의 뇌파 중에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발산 되는 뇌파가 있습니다.]
“없앨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이미 대처 중입니다. 각성 호르몬의 생산을 막 시작했습니다. 공기 필터링도 강화했습니다. 해독제 역시 생산 중입니다. 2분 이내에 신체를 정상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한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볼트를 가슴에서 뽑아버렸다.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강한 통증이 이한을 덮쳤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한이 더 빨리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가슴에서 흐르던 피는 금방 멈췄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죽을 만한 부상이지만, 이한에게는 별것 아닌 상처였다.
나노가 이한의 몸 속에서 버티고 있는 한, 목이라도 잘리기 전에는 어떤 부상을 입더라도 작은 상처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린 이한은 곧장 앞으로 달려갔다.
아직 이곳에서 헤매고 있는 자들도 있었지만, 벌써 저 앞으로 가서 칼질을 하고 있는 자들도 여럿이었다.
하나 같이 절정 그 이상의 무림인들이었다.
개울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쇠뇌수의 머리 위를 뛰어다니는 도사가 하나 보였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쇠뇌수의 머리가 몸통에 박혔다.
염주알을 암기삼아 쏘아대는 승려도 있었다.
염주알에 맞는 부위마다 주먹만한 살덩어리가 떨어져 나갔다.
아무리 멀리 있는 쇠뇌수라도 단 한 발에 무력화되어 버렸다.
그렇게 날뛰는 사람들 중에는 팽호도도 있었다.
그가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내뻗을 때마다 멀리 있는 쇠뇌수가 뒤로 날아갔다.
10장 밖의 사람을 일격에 쓰러뜨리다니!
소림의 백보신권과 비슷한 종류의 무공이었다.
쓰러진 자들은 신체 내부가 박살이 났는지 코와 귀는 물론이고 입과 눈까지 피를 흘렸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한이 쇠뇌수가 있는 곳까지 달려가는 동안 대부분의 쇠뇌사수가 정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저 멀리 보이던 어둡고 불길해 보이던 공간에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한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쇠뇌수를 죽이면서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는데도 저 공간은 여전히 50여 장 밖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오히려 조금 더 멀어졌을지도?
그렇게 느끼는 것은 이한만이 아니었다.
“거리감이 이상한데?”
모산파의 도사 석뢰가 가장 앞으로 가서 부적을 던졌다.
부적은 앞으로 쭉 날아가다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예의 그 공간은 더 멀리 이동한 것 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구궁연환금쇄진(九宮連環禁鎖陣)을 중심에 두고 여러 종류의 미혼진을 덧붙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상하군. 구궁연환금쇄진으로는 이렇게 공간을 왜곡하지 못해. 무슨 짓을 한 거요?”
석뢰의 곁으로 무림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 중 이한의 아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자신의 힘으로 미혼진을 돌파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진법에 대해서는 석뢰를 뛰어넘는 사람이 없었다.
멀리 보이는 자들은 도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한은 그들의 복장이 황궁에서 토벌한 가짜 도사들과 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사람과 자연에 대한 지식이 많더군요. 하지만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원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요. 그저 자연을 숭배하며 신선이 되기를 꿈꿀 뿐입니다.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어린아이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특히 공간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이곳까지 오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팽호도가 그자의 말에 냉소했다.
말투에서 경멸이 묻어나왔다.
“옷을 보니 대진국에서 왔다는 도사들이로군. 떨거지 황족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탑과 함께 도망쳤다는 자들.”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 먼저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는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황제에게 이용당한 쪽이지요. 형제들까지 잃어서 제 상심이 무척 큽니다. 그리고 탑과 함께 도망친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탑은 가야 할 곳으로 갔을 뿐입니다. 계속 그곳에 두면 분명 파괴당할 테니까 다른 곳으로 옮겼을 뿐이지요.”
태연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말을 하는 자의 주변에 있는 자들의 태도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무림인들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신감도 궤변도 지나치군. 우리가 당신이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없다고? 이곳에 어떤 진법을 펼쳐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수면 그만이지 않을까? 무궁연환로(無窮連環路)를 부수고 통과한 것처럼 이곳도 주변을 부수다 보면 그곳에 닿을 수 있겠지. 도망치는 것은 쉽지 않을 거요. 우리 중에는 한 줌의 진기만으로 천리를 내달리는 자도 적지 않으니까.”
팽호도의 위협에도 그자는 태연했다.
마음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무엇인가 준비해놓았음이 분명했다.
“여러분들과 더 이상 다툴 생각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그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쓸만한 재료가 될 수 있을지 확인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만하지요. 그리고 진법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온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이 사라진 곳으로 물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구멍을 통해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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