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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55화 (55/78)

55. 혼돈의 근원에게 선택된 자

55. 혼돈의 근원에게 선택된 자

물이라니!

이한은 지하 통로를 가득 채우며 쏟아져 들어오는 물줄기를 보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물론 땅을 파고 들어가면 지하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이렇게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런 경우는 지하에 있는 거대한 수맥이나 근처의 강 같은 수원지를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이한은 이 물이 어디서 왔는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중간에 잠시 밖으로 나갔을 때 보았던 호수에서 끌어온 물이 분명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진법의 중간을 부수고 들어온 쪽에서 보였던 호수 말이다.

거리가 제법 있는 편이었지만, 호수물을 끌어들이겠다고 작정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거리였다.

이곳은 원래 탄광이었고, 수많은 광부들을 부리고 있었다.

수백 장의 거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쩌면 죽은 자들을 광부로 부렸을지도 모른다.

이한은 호수를 떠올린 순간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호수의 크기가 떠올라서였다.

호수 건너편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어선도 몇 척 떠 있던 것이 기억났다.

정확한 크기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지하 통로를 완전히 침수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이한과 같은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런 미친 놈들이! 자살이라도 할 생각인가!”

“호수에서 끌어온 물이 분명하오! 물에 빠져 죽기 싫으면 어서 나가야 해!”

“저놈들은 다른 통로로 도망칠 것이 분명합니다. 어서 밖으로 나가서 추격해야 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로는 부족해요.”

사람들은 제각기 떠들어 댔지만, 물이 쏟아져 나오며 울리는 굉음이 그들의 목소리를 삼켰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서둘러서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한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통로의 벽을 파내서 몸을 숨길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흙벽치고는 단단했지만 그래봐야 흙벽은 흙벽이라서 이한이 파내는 대로 푹푹 파였다.

사람 몸 하나 피할 만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이 허리를 지나 목까지 차오르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은 지하통로를 완전히 채워버렸다.

[피부 호흡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물이 나오는 곳이 이곳 하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지하 통로의 공간 면적을 최대치로 감안해보아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물이 차오를 수가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면 곤란한데. 사람들이 제대로 도망을 칠 수 있을까?’

[거리로 보면 아슬아슬합니다. 하지만 내공이 일류급만 되어도 일각 정도 숨을 참고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절정급이나 그 이상이라면 더 오래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두 시진씩 숨을 참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니 되도록 빨리 나가기는 해야 할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만약 나가는 길목을 막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재료를 보러 왔다고 한 말이 계속 걸리는데. 그거 너희들을 강시 재료로 만들겠다고 위협한 거잖아?’

[단순한 위협이었다면 별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나가는 길을 무너뜨려서 막아놓기만 해도 지금 도망치는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습니다. 현재로는 별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이한은 아무래도 별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약의 경우 이 지하 전체를 물로 채워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막 나가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이곳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설사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손을 쓸 방법은 여럿이었다.

‘별일 없기를 바래야지. 그리고 가짜 도사들, 아무래도 도망친 거겠지?’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곳을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렇게 물로 채울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무엇인가를 숨기려고 물로 채워버렸을 수도 있지. 물로 채워버리면 이곳을 조사할 수 없잖아.’

이한이 밖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따라서 나가지 않고 이곳에 남은 이유가 그래서였다.

가짜 도사들이 무엇인가 이곳에 남겨놓았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가짜 도사들은 이한처럼 차원이동을 해서 이곳에 온 것이 분명한 자들이었다.

그들로부터 차원이동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이곳은 그들이 자리잡고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니 쓸만한 정보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한은 손으로 글을 쓰며 나노와 소통을 이어 나가다가 물의 흐름이 약해진 것을 느꼈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였다.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며 불길한 느낌을 뿜어내던 공간은 평범한 공간으로 변한 후였다.

공간을 비틀어서 거리를 계속 벌리던 이상한 통로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물살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이곳에 펼쳐져 있던 진법까지 같이 휩쓸어간 모양이었다.

진법을 깰 수 없다고 하던 가짜 도사가 틀렸다.

팽호도의 말대로 주변을 박살 내다보면 결국 진법도 깨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가짜 도사는 허세를 부린 것 같았다.

이한은 부유하는 잡동사니를 헤치며 앞으로 전진했다.

흙탕물로 인해 가시거리가 일장도 되지 않았지만, 이한에게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나노 덕분에 맑은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한은 얼마 가지 않아서 호수와 연결된 수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수로와 병행해서 나란히 뚫린 통로도 함께 있었다.

지금은 물로 차 버렸지만, 수로에서 처음 물이 쏟아져 나왔을 때는 멀쩡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세나 떨면서 무게잡던 가짜 도사들은 이곳을 통해 도망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한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잘해 주기를 바랐다.

안에 들어왔던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무림인이다.

가짜 도사 몇 명 정도는 사로잡을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한은 조사를 위해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크게 부서진 것 없이 물만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물조차 없는 공간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에어포켓인가 했다.

물이 갑자기 들어차면 빠져나가지 못하는 공기가 구석에 몰려서 공간을 형성하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러나 에어포켓이 물 아래에 형성될 리가 없으니 이것은 가짜 도사들이 부린 수작임이 분명했다.

이한은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물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고 머리 위에서 찰랑거렸다.

계단 위의 천장이 물로 되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것은 진법 같은 것이 아니다.

이한은 무공에 대해서는 제법 많은 책을 읽었다.

대부분 삼류 무공이고 근본없는 소리나 늘어놓는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법 괜찮은 책도 있기는 있었다 .

그중의 하나가 진법에 대한 책이었다.

그래서 이한은 진법에 대해 기본적인 상식은 갖추고 있었다.

무림에서 말하는 진법의 대부분은 미혼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같은 상식 말이다.

거기에 사람의 감각을 속이고, 살상력을 덧붙이는 정도가 한계다.

그러나 이곳은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있었다.

가짜 도사들은 공간을 다룰 줄 아는 것이 분명했다.

공간 이동, 반중력.

이한이 직접 목격한 것만 해도 벌써 두 가지였다.

“나노.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탑에 그려져 있던 문양과 관련된 장식이 몇 군데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반도체 회로도를 본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계도 가능합니다.]

“비유다. 비유. 그래도 기록은 철저히 해줘.”

[물론입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저의 기쁨입니다.]

이한은 옷의 물기를 탁탁 털어낸 후 무엇인가 쓸만한 자료가 남아있기를 바라며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너무 말라서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부서지기도 했다.

오래된 시체는 아니었다.

오래된 시체가 습기많은 지하에서 이렇게 마른 상태로 보존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에 죽임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대부분 여자였지만, 종종 남자도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아무래도 단순한 희생자는 아닌 것 같았다.

검은색의 옷을 입고, 붉은색의 로브를 걸쳤다.

로브에는 탑에서 보았던 문양과 비슷한 문양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고, 피부에도 비슷한 문신을 하고 있는 자 역시 적지 않았다.

뺨과 눈가장자리, 팔 등에 새겨진 문신은 상당히 공들인 작품이었다.

적어도 몇 달에 걸쳐서 숙련된 문신사가 작업을 해야 나올 법한 예술적인 문양이었다.

노예처럼 함부로 굴려지던 자들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죽어 있는 자들 중에 가짜 도사의 복장을 한 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한은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곳곳에 새겨져 있는 다양한 문양을 계속 수집했다.

그리고 통로의 끝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하나 발견했다.

그 사람의 곁에는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던 옥과 비슷한 것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그의 손에 아직 죽어가는 사람 하나가 잡혀 있었다.

검은 옷에 붉은 로브, 그리고 문신.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는 말라비틀어져서 죽어 있던 그의 동료들처럼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이한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곧장 내공을 끌어올렸다.

오행의 원리에 따라 내공의 힘을 급격하게 증폭시켰다.

단 한방으로 거대한 바위라도 산산조각을 낼 만한 위력이 손에 모이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는 했다.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는 사람들을 보고 기와 생기를 빨아들여서 내공으로 삼는 사이한 심법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무림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상식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흡정공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하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근육이 마르고 피부가 마른 가죽처럼 변했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죽은 자의 몸도 쓰러졌다.

마른 나무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불에 넣으면 장작처럼 활활 타오를 것 같았다.

이한은 지체하지 않고 적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 안에 담겨있는 경력은 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쉽게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위를 부수고, 인간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이 그 주먹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그 주먹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고 멍하기까지 했다.

주먹은 상대를 강타했다.

주먹에 실린 경력 정도라면 엄청한 충격음과 기파가 주변을 휩쓸어야 했다.

그러나 퍽 하는 나지막한 소음이 전부였다.

마치 주먹으로 모래를 친 것 같은 소리였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이한은 자신이 주먹에 싣고 발산한 경력이 모래 속으로 흡수되는 물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한은 그 즉시, 뒤로 물러나며 등에서 칼을 뽑았다.

“사교도냐?”

“사교도라니. 그런 잡스러운 것을.”

탁하지만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혼돈의 근원에게 선택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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