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나노머신-56화 (56/78)

56. 나노머신은 소화가 안 된다.

56. 나노머신은 소화가 안 된다.

혼돈의 근원?

그게 뭔데?

이한은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의 등장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들의 진정한 정체에 대한 단서가 나오는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혼돈의 근원에게 선택받은 자라고 스스로를 칭한 남자는 더 이상 정보를 흘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옥구슬에 손을 올렸다.

옥구슬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옥구슬과 남자를 중심으로 전기가 공중으로 방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전기 방전은 일장 넘게 뻗어나갔다.

비릿한 금속 냄새가 풍겼다.

이한과 남자 사이의 거리는 불과 3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이제 초식에 익숙해지려는 3류급의 무림인이라고 하더라도 단칼에 상대를 베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이한 같은 사람에게는 바로 코앞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한은 칼을 뽑아서 겨누고 상대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당장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는 두려움이었다.

이한은 이미 오행권의 묘리를 빌어 증폭시킨 금기의 경력으로 눈앞의 남자를 한 대 때린 후였다.

그러나 이한의 손을 통해 뻗어나간 강맹한 기운은 모래밭에 부어버린 물처럼 사라졌다.

어떤 반탄력도 느낄 수 없었다.

저 남자가 어떤 종류의 흡기공을 사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책으로나 읽었던 마교나 혈교의 심법이라고 해도 이렇지는 못할 것 같았다.

공격에 실린 기운까지 흡수해버리다니!

순식간에 사람의 정혈을 흡수해서 미라처럼 만들어버린 괴물다웠다.

몸으로 경험하고 눈으로도 봤지만 그래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만약 주먹으로 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피부 접촉을 통해 내공과 정혈이 빨려 나갔을까?

이한은 스스로의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이미 삼단삼극권을 대성했고, 오행권도 빠르게 익히고 있는 이한이 구태여 칼까지 뽑아가며 상대를 견제한 이유가 그래서였다.

자신도 순식간에 미라가 되어버린 사람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정보 획득 때문이었다.

불확실함에서 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한은 자신이 눈앞의 남자를 죽이겠다고 작정한다면 못 죽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독을 쓰는 방법도 있고, 음공을 활용해도 된다.

정혈을 빼앗기고 미라가 될까 봐 불안하기는 하지만 나노와 튼튼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몸을 믿고 모험을 하는 방법도 있다.

약간의 틈만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설마 못 죽이랴 싶었다.

아무리 봐도 이한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무공을 익힌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한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차원이동을 했다고 의심되는 자이기도 하다.

황궁에서 충돌했던 가짜 도사들은 죽었거나, 이한의 손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관청을 거치며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리고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었다.

나노가 가짜 도사들의 두뇌를 직접 조사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모았지만, 언어나 문화 같은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가짜 도사들이 온 곳으로 갈 것도 아닌데 그곳의 언어나 문화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여럿이었다.

그중 하나는 차원이동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 아니면 넷.

나머지는 시키는 일이나 하는 일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눈앞의 남자는 그 소수에 속하는 자 같았다.

제대로 조사하려면 죽이는 것은 곤란했다.

하지만 제압하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역시 죽여야 할까?

죽여도 조사는 가능하다.

누락되는 것이 많아서 그렇지.

이한은 아주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이한의 앞에 있는 남자는 그 망설임을 잡아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내게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

“당신은 차원이동을 한 자인가?”

대놓고 직구를 던지는 이한의 질문에 남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흥미롭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

“이곳의 도사들은 자신만의 자그마한 아차원을 만들 줄 알더군. 그곳에서 바둑을 두고, 특별한 복숭아도 키우고, 가끔 친구까지 초대하는 것을 보면 평범한 사람이 정원을 가꾸고 친구를 초대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별로 쓸모있는 기술은 아니었지. 차원의 이면에 공간을 숨기는 조악한 방법이기에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깨뜨릴 수 있었다.”

이한은 이곳에도 차원과 관련된 기술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놀란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아하! 너는 이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구나?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차원이동은 이곳의 도사들처럼 아차원으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차원 사이를 건너뛰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지? 재미있군. 재미있어.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차원이동을 말하는 자는 없었다. 우화등선이라는 것이 비슷한 것 같기는 했는데 실제로 이룬 자를 본 적은 없었지. 그런데 너는 차원이동을 말하는군.”

지금까지 쌓아온 이한의 경험이 경보를 울렸다.

즐겁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이 오히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권력자의 얼굴이 남자에게 겹쳐졌다.

“이곳에 온 후로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잘 됐다. 같이 가자. 네가 말해야 할 것이 많겠다.”

남자는 이한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이한은 자신을 욱죄어오는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손이 움켜쥐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손은 이한을 남자에게 끌어당겼다.

이한은 버티고 섰다.

급하게 끌어올린 내공이 이한을 보호했다.

오행심법이 이한의 단전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단전도 심장도 격렬하게 반응했다.

얼굴이 붉어지고 피부도 붉어졌다.

이한은 손을 들어서 눈앞의 남자를 겨눴다.

들어 올린 손은 간신히 허리를 넘길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손끝은 눈앞의 남자를 향했다.

이한의 의도를 알아챈 나노가 반응했다.

무공 중에는 지법(指法)이라는 것이 있다.

손가락을 무기로 쓰는 기법이다.

손가락을 단련해서 찌르기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손가락을 통해 경력을 쏘아내서 공격하기도 한다.

강력하지만 정밀한 공격이 필요할 경우, 특히 점혈이 필요할 경우 사용하는 무공이다.

그러나 지금 이한이 사용하려는 지법은 일반적인 지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공이었다.

독공을 얻은 후 효과적으로 독을 사용하기 위해 나노가 만들어낸 지법이기 때문이다.

독혈탄지.

손가락을 터뜨려서 피를 뿜어내고 손톱을 암기로 사용한다.

사용할 때마다 손가락 한 마디를 잃어야 하는 무공이지만, 이한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잃어버린 손가락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까.

내공이 손가락 끝으로 모였다.

이한의 상완골에 보관해둔 독 역시 손가락 끝으로 보내졌다.

확실한 효과를 위해 나노머신 하나하나가 독분자에게 달라붙었다.

내기의 압력이 강해지자 남자를 가리킨 새끼손가락의 끝마디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독으로 절여진 손톱이 암기처럼 쏘아졌고, 손끝에 모인 독혈 역시 공기 중에 비산되었다.

이한과 남자 사이의 거리는 불과 일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한의 손끝에서 쏘아진 손톱과 공기 중에 비산된 독혈이 남자의 몸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만약 절정의 고수라면 손톱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암기를 막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하지만 공기 중에 비산된 독혈까지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혈은 소화기가 소화액을 뿜어내는 것처럼 남자를 덮쳤다.

순간 반투명한 검은색의 둥그런 막이 남자를 둘러쌌다.

손톱도 독혈도 검은색의 막에 막혔다.

이것은 분명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이한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한은 자신을 잡고 있는 압력이 살짝 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에게 한 방 정도는 먹일만한 여유가 생겼다.

이한의 단전에 있는 내공이 오행의 원리에 따라 순환했다.

내공에 실린 기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잡아먹으며 급격하게 덩치를 불렸다.

이한의 주먹에 처음으로 화기가 어렸다.

주먹이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강하게 때리는 것만 추구했었지만, 이번에는 상대의 내부를 태워버릴 생각이었다.

흡기공?

그거 불안정한 심법의 대표 아니었던가?

어떤 식으로든지 충격을 주기만 하면 알아서 자멸하기도 하는 폭탄 같은 심법이다.

그래서 이한은 화기를 침투시켜 상대의 내부를 흔들어볼 작정이었다.

이한은 온 힘을 끌어모아 검은색의 막을 후려쳤다.

화기가 적을 향해 뻗어나갔다.

동시에 엄청난 반탄력이 이한에게 되돌려졌다.

이한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검은색의 막도 충격을 버티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검은색의 막은 거품이 터지는 것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남자는 태연한 얼굴로 이한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제법이구나. 독을 쏘아내는 기법도 인상적이었다. 머리 굳은 도사 나부랭이나 언제나 기가 죽어 있는 노예들보다 더 낫다. 내 제자가 되어서 혼돈의 근원을 선택해라. 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흡수하지 않으마.”

“미친놈.”

이한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새끼손가락에서 아직도 독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미세한 먼지처럼 에어로졸화 된 독이 주변에 계속 퍼져 나갔다.

“독을 사용하는 놈이라서 그런지 수단이 음습하기는 하구나. 그렇게 몰래 독액을 뿌려도 내게는 소용이 없다. 나는 원래 포식의 권능을 가진 자였고, 이곳에서는 체접흡정흡기신공을 익혔다. 독은 내게 별미와 같은 것이다. 네가 한 짓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얌전히 내게 와서 머리를 대라. 낙인을 받아라.”

말 한마디한마디에 알 수 없는 힘이 서려 있었다 .

당장이라도 저 앞으로 기어가서 머리를 갖다 대야 할 것 같은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이한을 강제하지는 못했다.

그의 내공과 심법이 그의 정신을 보호했다.

[외부에서 아직 분석이 불가능한 뇌파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파장 간섭을 통해 소멸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나노가 있었다.

나노가 보고하자마자 이한의 마음이 평정을 되찾았다.

더이상 어떤 충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의 앞에 있는 남자는 그러한 이한의 변화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얼굴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왜 독이 흡수되지 않는 거지?”

[흠흠. 저자의 몸속에 있는 나노머신이 독액과 함께 이동중입니다. 중요 신체 장기와 두뇌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저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죽지는 않을 테니 두뇌 검색을 통해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이한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좀 더 뒤로 물러섰다.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한의 모습을 본 남자의 행동은 이한의 기대보다 빨랐다.

옥구슬에서 불꽃이 격렬하게 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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