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공간이동은 가능, 차원이동은 아직 아님.
57. 공간이동은 가능, 차원이동은 아직 아님.
옥으로 된 구슬은 혼천감으로 사용되던 탑의 꼭대기에도 있었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에 있던 옥구슬에서도, 지금 이한이 보고 있는 옥구슬처럼 불꽃이 튀었었다.
번개를 맞은 후로는 더욱 강한 불꽃이 튀었었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번개가 탑으로 내리꽂힐 때도, 탑에서 번개가 하늘로 솟아오를 때도 모두 옥으로 된 구슬을 통해서였다.
옥구슬은 절대로 장식품 따위가 아니었다.
이한은 옥구슬이 에너지 저장 장치 즉, 일종의 배터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노 역시 이한의 추측에 동의하며 옥구슬이 증폭기의 역할도 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모두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그런데 저 옥구슬이 배터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무엇을 에너지로 저장하고 있는 걸까?
번개를 맞아서 얻은 전기?
아니면, 진법으로 끌어모은 자연의 기운?
어쩌면 사람의 정혈까지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지금 당장 중요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한의 눈앞에 있는 옥구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옥구슬에서 튀는 불꽃이 더욱 격렬해졌다.
마치 전기 불꽃이 연달아 뻗어 나오는 것 같았다.
옥구슬에 손을 올린 남자 역시 번개에 휩싸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남자의 내부로 들어간 나노머신과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전기 충격에 의한 기능 상실로 보입니다.]
“독이 너무 쓰군. 맛이 없는 독이야.”
조금 전과는 다른 감정이 실린 목소리였다
살짝 분노가 서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검게 변색되었던 남자의 얼굴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노가 남자의 몸속에 들어간 나노머신에 대한 통제를 잃은 순간, 독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한은 눈앞의 남자를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옥구슬 위에 올라간 남자의 손에 시선이 갔다.
옥구슬에서 발산되는 불꽃은 작은 번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한의 공격에 중독까지 당하면서도 구슬에서 손을 떼지 않았었다.
무엇인가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이유 말이다.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약점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그래서 이한은 남자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기습적으로 일권을 내질렀다.
그리고 연달아 격공장을 날렸다.
화기가 실린 경력이 옥구슬을 향해 날아갔다.
일격에 바위를 부술만한 경력과 생고기를 숯으로 만들만한 화기가 동시에 옥구슬을 향해 쏟아졌다.
그렇다.
이번에는 남자가 아니라 옥구슬을 노린 공격이었다.
옥이 보석을 분류되기는 하지만 사실 그렇게 강한 물질은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돌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맨주먹으로도 돌을 깨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내공에 실린 경력으로 타격하면 옥구슬이 어떻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박살 난다.
그것을 이한의 앞에 있는 남자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예상외의 사태에 놀라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이한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던 시선이 달라졌다.
남자는 격렬한 분노를 드러냈다.
“백 년도 살지 못할 놈이 감히!”
아까와 같은 보호막이 다시 나타났지만, 충격을 받고 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순식간이었다.
남자는 연달아 날아오는 격공장에서 옥구슬을 보호하기 위해 연달아 보호막을 쳐야했다.
그사이에 이한은 칼을 앞세우고 돌진해 들어갔다.
체접흡정흡기신공이 두렵기는 했지만, 지금은 적을 공격해야 할 때였다.
적이 공간이동으로 도망치는 꼴을 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놈을 잡아서 두뇌를 스캔해야 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런 지하에서 고생하는 이유가 뭔데!
이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한의 돌격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대신 옥구슬을 향한 공격은 성과를 거두었다.
절반의 실패, 그리고 절반의 성공이었다.
쇠뇌살이 쏘아지는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돌격해 들어간 이한은, 자신의 접근을 거부하는 강력한 반발력에 멈추고 말았다.
자신을 움켜쥐고, 끌어당기던 그 힘이 이번에는 자신을 밀어낸 것이다.
같은 극을 밀어내는 자석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칼은 결국 남자에게 닿지 못했다.
그래도 칼에 서린 기파가 뻗어 나가서 남자에게 닿았다.
칼에 찔린 혈관이 잘려서 피를 흘리는 것처럼, 기파에 닿은 남자의 기운이 흔들렸다.
남자의 기운이 흔들리자 옥구슬과 남자를 보호하던 보호막 역시 흔들렸다.
벽공장의 기파가 일부일망정 옥구슬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말이다.
“어엇!”
남자의 다급한 경악성이 들려왔다.
옥구슬을 중심으로 번개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던 불꽃이 확연하게 약해졌다.
이한은 옥구슬에 미세한 실금이 났고, 그 실금이 점점 퍼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옥구슬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남자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다급하게 두 손을 모두 옥구슬 위에 올렸다.
그 순간 공간이 찢어졌다.
옥구슬 뒤쪽으로 사람이 지나갈만한 타원형의 포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포탈의 가장자리에는 바깥으로 불꽃이 튀고 있었다.
찢어진 공간을 통해 탑이 하나 보였다.
혼천감의 건물로 쓰던 탑과 비슷하게 생긴 탑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좀 더 규모가 크고 탑의 꼭대기에 있는 옥구슬도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훨씬 크다는 정도?
그리고 주변이 온통 모래였다.
사막일까?
찢어진 공간을 통해 보는 저쪽의 풍경은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아지랑이를 사이에 두고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찢어진 공간 주변의 불꽃 역시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하며 불안하게 일렁였다.
전기 공급이 불안정한 전구의 밝기가 변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찢어진 공간 저 너머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눈앞의 남자를 우선적으로 집중했다.
이 남자만 잡으면 이런 포탈은 또 만들 수 있다!
이한은 남자의 다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강력한 반발력이 여전히 이한의 접근을 막았지만, 이한의 칼이 남자를 베어버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이한의 칼은 단숨에 남자의 오른쪽 허벅지를 베어버렸다.
그러나 남자 역시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반쯤 잘려 덜렁거리는 다리를 끌고 쓰러지듯 찢어진 공간으로 굴러 들어갔다.
이한 역시 곧장 남자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툭 하고 떨어지는 팔을 보고 다급하게 멈춰 섰다.
팔꿈치 바로 아래부터 잘린 남자의 팔이었다.
찢어진 공간은 남자가 넘어가자마자 사라졌고, 미처 반대편으로 넘어가지 못한 남자의 팔은 찢어진 공간이 닫히면서 같이 잘려 버린 것이다.
남아있는 팔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옥구슬도 쪼개졌다.
미세한 실금이 거미줄처럼 나 있던 옥구슬은 몇 개의 조각으로 쪼개져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한이 조각난 옥구슬을 만지자 모래처럼 부스러지는 것이 원래의 성질을 완전히 잃은 것이 분명했다.
이한은 혼천감의 탑이 사라지던 장면을 떠올렸다.
12층 탑은 꼭대기에 있던 옥구슬에서 번개가 하늘로 치솟아 오른 후 위쪽의 절반이 사라졌었다.
혼란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탑이 통째로 공간이동을 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가짜 도사를 고문해서 얻어낸 정보 역시 공간이동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이한과 종대보가 이곳까지 온 것이기도 하다.
공간이동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탑과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모습을 감춘 것이 아니라, 공간이 찢어져서 포탈이 만들어졌다.
이한이 차원이동을 할 때 보았던 포탈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 모양새였다.
“나노. 그놈들 진짜 차원이동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포탈은 공간이동용으로 판단됩니다. 차원이동용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저자들에게 공간이동 기술이 있고, 이곳에서도 구현을 해 냈다는 것은 확실하지. 게다가 생긴 모습이 정말 비슷하지 않았냐? 사고로 터져버린 기관의 차원이동용 포탈이랑 저놈들이 만들어낸 포탈이랑 정말 비슷하게 생겼어.”
[그것은 그렇습니다. 도망친 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면 최선이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추격해야지. 포탈 너머에 있던 것은 사막 지대에 있는 탑이었다. 그리고 꼭대기에 그렇게 큰 옥구슬을 올려놓은 양식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지.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국의 규모는 대륙급입니다. 그리고 문명 수준이 이렇게 낮은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수소문을 하실지 의문입니다.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정보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노의 반문에 이한은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복안이 있었다.
“나노. 내가 가진 관직이 뭐지?”
[어사대의 어사대부입니다.]
“어사대가 하는 일은?”
[황제의 명령에 의한 전반적인 감찰입니다. 대상은 가리지 않습니다.]
“원칙만 따지자면 도찰원은 관리를 감찰하고, 금의위는 주로 경사에 국한된 일만 관여하지, 육선문 역시 무림의 일이 아니면 경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어사대는 달라. 어사대는 황제의 명령만 있다면 어디에 가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지방관들에게 특히, 사막을 끼고 있는 지역의 지방관들에게 꼭대기에 커다란 옥구슬을 이고 있는 탑에 대한 정보를 올리라고 하면 되겠군요!]
“맞아!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 관직을 가지고 있으니 제대로 이용해 먹어야지. 그리고 쟤들 반역자야. 어사대라면 제국 끝까지 추격해서 체포해야 한다고. 명분도 충분하다 못해 넘쳐.”
이한은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나노는 이한의 감정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를 느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물론 앞으로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일단 이곳의 뒷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정보 수집을 위해 주변을 수색하셔야 합니다.]
나노의 충고가 끝나기가 무섭게 물이 들이닥쳤다.
옥구슬이 완전히 힘을 잃자 물을 막고 있던 장벽도 사라진 모양이었다.
한꺼번에 밀려 들어오는 물로 인해 지하공간이 완전히 침수됐다.
다시 피부호흡으로 바꿔서 물속에서 활동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곳곳에 쓰러져 있던 미라화된 시체들은 물살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다가 박살이 나 버렸다.
[완전히 미라화 되었다고 해도 약간의 뇌스캔은 가능해야 하는데, 거의 뽑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습니다. 전기로 뇌를 한번 지지고 지나간 것처럼 노이즈가 심합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정보는 곧 힘이야. 최대한 수집해야 해.’
[알겠습니다. 이한님.]
이한이 내부를 조사하고 밖으로 나간 것은 거의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이미 밖은 해가 져서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낮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오히려 숫자가 더 불어난 것 같았다.
종대보는 이한을 보자 반색을 하고 달려왔다.
“이 대협. 자네 무사했군!”
“수공이라면 나름 일가견이 있습니다. 물이 다 들어차고 난 후에 물살이 약해져서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 중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아서 난리가 났지. 심지어 모산파의 도사도 죽었다네. 그래서 뒤늦게 모산파에서도 사람이 더 왔어.”
종대보가 있던 장소에서 모산파 도사와 비슷한 복장의 여자 도사가 여럿 보였다.
그중의 하나는 이한도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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