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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58화 (58/78)

< (여기부터 유료) 58. 이한이 빚을 갚음 >

58. 이한이 빚을 갚음

방주민.

백사도에 있던 작은 마을의 촌장이었던 방일의 손녀.

어린 소녀는 모산파의 여도사들 사이에 있었다.

검은색 관을 쓰고, 베로 된 조끼 모양의 배자를 입고, 짧은 검까지 패용한 모습이었다.

제국에서 복장은 신분과 직업을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하다.

방주민이 함께 있는 모산파의 여도사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모산파의 일원임을 의미했다.

이한은 방주민이 어떤 인연으로 모산파에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운명처럼 다가온 인연이 아니라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모산파와 같이 명망이 있는 문파는 입문하기가 까다롭다.

작은 무관을 들어가려고 해도 기부금을 요구하는 것이 작금의 세태다.

정기적인 상납을 요구하는 문파도 간혹 있을 정도다.

하물며 모산파와 같은 거대 문파라면 기부금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연줄에 평판조회까지 거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세상에 홀로 남은 어린 여자아이가 모산파에 들어갔다니!

이한은 모산파에 감사함을 느낄 정도였다.

사실 이한은 자신이 백사도에 표착한 것 자체가 백사도에 재앙을 몰고 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촌장인 방일이야 수적이었던 자신의 업보를 돌려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손녀인 방주민까지 조부의 업보에 휩쓸리는 것은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이한의 단전은 방주민의 유전자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경맥처럼 내공과 관련된 다른 신체 기관 역시 방주민의 유전자를 참조로 해서 보강하고 변형했다.

따지고 보면 나노가 이한을 위해 만들어준 내공 시스템은 방주민의 것을 그대로 베껴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다가 한 가지 더.

방주민의 유전자가 매우매우 뛰어났다.

이레귤러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처음에는 나노도 미처 몰랐지만, 계속 다른 유전자들 수집하는 과정에서 내공 시스템과 관련된 방주민의 유전자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한은 그 수혜를 입은 것이다.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언제가 되었든 갚아야 할 이한의 빚이었다.

그래서 은밀전주의 호출을 받아 경사로 가는 급박한 와중에도 짬을 내서 방주민을 추적했던 것이다.

금문상방의 상행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공격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고, 방주민 역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는 불편함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나중을 기약하고 뒤로 밀어놓은 빚을 받을 채권자가 제법 괜찮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한으로서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불편함이 단숨에 쓸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종대보는 이한을 데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있던 곳으로 갔다.

모닥불 곁에 모여 있던 모산파의 여도사들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새로운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소개해드리지요. 관 장로. 이쪽은 어사대의 이한이라고 합니다. 역적을 쫓아 경사에서 이곳까지 함께 왔지요.”

종대보의 소개에 선하게 생긴 얼굴을 한 중년의 여도사가 이한에게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대협. 모산파의 관여림이라고 합니다. 14방의 거수를 맡고 있지요.”

이한은 상대방의 신분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고 살짝 놀랐다.

모산파는 제국을 지역에 따라 36개의 방으로 나누고 거수를 두어서 통솔한다.

그러니 14방의 거수라면 해당 지역의 최고 책임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우하는 의미에서 붙여주는 장로 같은 명예직이 아니라 모산파의 실세라는 이야기였다.

이한은 이곳에서 만난 자들을 떠올렸다.

팽가의 장로인 팽호도, 모산파의 거수이자 장로인 관여림, 개방에서도 분타주급이 왔다.

언가의 소녀도 단순한 구경꾼은 아니었고, 천영문도 따지고 보면 모용세가의 방계 중에서는 제법 비중이 있는 문파였다.

어쩌다 하나둘 정도라면 모를까 이렇게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확실히 과한 사람들이었다.

다들 이한처럼 가짜 도사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한이 물에 잠긴 지하에서 가장 늦게 나온 사람이니 이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을 것이 뻔했다.

당장 팽호도부터가 저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바로 옆에서 모닥불을 뒤적이는 낯선 거지는 덤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삼결이라니.

천영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 말고도 분타주급이 하나 더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어사대 소속이었고, 황제로부터 나온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힘으로 윽박질러서 입을 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이한은 자신의 신분을 주변에 다시 한번 알렸다.

“어사대에서 어사대부로 있는 이한이라고 합니다.”

이한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살짝 한숨을 내쉰 사람도 있었다.

기대에 어그러졌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무리 무림 문파나 거대 세가들이 지방의 실세로 행세한다고 해도 황제의 명령을 직접 받는 어사대 소속의 관리까지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숨이나 쉬고 말 수밖에.

대신 날카로운 질문이 이한을 찔러왔다.

“이 대협. 어떻게 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안에 있다가 나온 겁니까? 호수에서 쏟아져 들어간 물 때문에 완전히 잠겼을 텐데? 그리고 지금 그곳의 내부 상황은 어떻습니까?”

개방의 삼결개였다.

그는 주변의 기대를 업고 상당히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안에 있다가 나온 것이 의심스러우니 알아서 설명을 하라는 요구였다.

그래서 이한은 삼결개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설명하듯 자세히 말을 해 주었다.

물론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동굴 같은 곳에 폭우가 쏟아져서 물이 갑자기 들어차면 공기 주머니라는 것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굴 안에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천장 쪽에 뭉쳐있는 것이지요. 작은 것은 한 말 짜리 자루 정도의 크기에 지나지 않지만, 큰 것은 세칸짜리 모옥보다 더 크기도 합니다. 가짜 도사들이 진법을 설치해 놓은 지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호숫물 때문에 공기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곳곳에 공기 주머니가 만들어졌습니다. 다행하게도 저는 수공에 제법 능숙한 터라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호숫물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공기 주머니에서 공기 주머니로 건너뛰다보니 의도치 않게 내부를 돌아다닌 것이 되기는 했지만, 결국 탈출에도 성공할 수 있었지요.”

이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공기 주머니라는 것부터가 사람들에게는 낯선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었고, 알아듣지 못한 자들까지 이해시킬 의무 같은 것도 없었다.

이한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저는 수공을 좀 할 수 있을 뿐이지 물속에서도 코로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공기 주머니가 있는 곳을 따라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본 것이 전부이기는 합니다만 여러분이 원하시니 제가 본 것을 말씀드리지요.”

이어서 이한이 말한 것은 실제로 이한이 밖으로 나오면서 목격한 것들이었다.

물속을 떠다니는 무림인들의 시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강시들.

곳곳이 무너지고 일부는 막힌 내부 공간.

먼저 나온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다들 약간은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숫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통로보다 더 안쪽, 더 깊은 지하에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미라화된 채 죽어있는 사람들.

체접흡정흡기신공에 의해 죽어간 가짜 도사들.

어딘가 미친 것처럼 보였던 가짜 도사들의 우두머리.

그리고 사막이 보이는 곳으로 공간이동을 이용하여 도망친 것까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귀찮은 일만 생길 것이 뻔했다.

가짜 도사들을 찾는 것에 경쟁자가 늘어나는 것도 사양이었다.

이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지하의 물을 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논의하는 것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호수에 어딘가에 있을 흡수구를 막고, 지하의 물을 퍼내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동원해야 가능할지 어림잡으며 예산을 두고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이한처럼 공기 주머니를 이용해 지하를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수공에 능한 자를 섭외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수적의 별호가 도마 위에 오르고 그들의 능력이 난도질당했다.

아무래도 다들 그냥 물러설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한은 그들의 논의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무공에 대해서 잘 알고, 세상의 일에 대해 경험이 많은 무림인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지하에서 물을 퍼내는 일에 대해서도 잘 아느냐 하면, 그것은 전혀 아니었다.

지하에서 물을 퍼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하겠다고 만든 것이 증기기관일 정도로 말이다.

대신 이한의 관심은 방주민에게 향했다.

방주민 역시 이한을 알아보았는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

모산파의 여도사들은 몰려든 사람들을 피해  근처의 다른 모닥불로 이동한 후였다.

이한은 열렬하게 토의하는 사람들을 뒤고 하고 모산파의 여도사들에게 다가갔다.

관여림과 종대보도 함께였다.

가까이 다가온 이한에게 방주민은 울먹이며 말했다.

“살아계셨군요. 다행이에요! 그리고 관직에 계셨다니! 아저씨는 역시 귀하신 분이셨군요.”

“그때는 그렇게까지 귀한 사람이 아니었단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주민아.”

방주민은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한 역시 수적들에게 죽은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한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고, 수적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와중에 납치당했으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직 많이 살아남아서 근처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는 이한의 말을 듣자 한참을 울었다.

슬픔과 기쁨, 안타까움과 안도.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인 울음이었다.

아마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조부의 죽임일 것이다.

이한은 가슴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금박으로 둘러싼 후 다시 밀랍으로 여러 겹 밀봉하고, 거기에 기름종이로 둘러싼 작은 단약이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그 단약은 이한이 가지고 있었던 화산파의 두 개의 조화신단 중 복용하고 남은 하나였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이한은 남은 조화신단을 관여림에게 넘겼다.

관여림은 모산파의 장로답게 주머니에 든 것이 보통 귀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 설명도 듣지 않고 그냥 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한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방주민이 저를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할아버지에게 진 신세도 적지 않지요. 이것은 그 보답입니다.”

“은원을 알고 갚기 위해 행하는 것은 무림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행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지요. 이 대협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관여림은 자신의 제자에게 든든한 인연이 생긴 듯 해서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확인을 해봐야 겠지만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보통이 아닌 단약이었다.

제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좋았던 기분은 다음에 들리는 단어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관 장로께서는 체접흡정흡기신공이라는 무공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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