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은밀전주 이한? >
59. 은밀전주 이한?
체접흡정흡기신공이라니!
혈교와 관련된 심법이지 않은가!
관여림은 체접흡정흡기신공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주변의 제자들부터 물려서 오가는 말을 듣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제자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관여림은 사교와 관련되어 몇 차례의 사건을 겪은 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굳건한지,
그리고 또 얼마나 연약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제자들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다.
관여림 자신 역시 마찬가지이고.
다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관여림은 유혹에 빠진 사람과 빠지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그리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경험이 얼마나 있는지,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공과 수명의 유혹에서 굳건하게 자신의 정심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불만을 가지지 않은 자가 얼마나 있을까?
혈교에 대한 정보는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만한 것이 아니었다.
혈교의 심법이나 그들이 가진 사상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제자들부터 뒤로 물린 것이다.
“어사대부께서는 그런 흉측한 것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남은 사람은 이한과 종대보 그리고 관여림뿐이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작은 불꽃을 피워올리는 모닥불을 옆에 두고 세 명의 무림인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격렬하게 토론하는 사람들의 소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곳은 얼마나 조용한지 불길에 휩싸여 터지는 나뭇가지의 소음조차 크게 들릴 정도였다.
“무공의 이름에 담긴 의미가 너무 위험한 것 같아서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는 말을 아꼈는데, 관 장로의 반응을 보니 내가 지레짐작으로 호들갑을 떤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 흉측한 심법은 혈교의 무공입니다. 사람의 정기와 혈기를 흡수하여 자신의 기운으로 삼는 흡기공의 일종입니다. 혈교에서도 지위가 매우 높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을 듣지도 못했을 정도지요.”
“무림인들이 싫어할 만한 무공이군요.”
“그렇습니다. 이 대협.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어디서 그런 것을 들으셨습니까?”
약간은 추궁하는 것 같은 관여림의 말투에도 이한은 별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이곳은 정보의 값이 비싼 곳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공간 이동에 대한 소문이 퍼진 후라서 사람들의 관심이 지나치게 몰리는 감이 있었다.
체접흡정흡기신공에 대해 알아보려다가 이곳저곳에 이상한 말이 퍼지고 온갖 벌레가 꼬이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공간 이동과 흡기공이 관련이 있다는 헛소문만 퍼져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한에게는 귀찮기만 한 일이었다.
그보다는 새롭게 인연이 생기고 호감도 보이는 관여림 같은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여기서 오간 말을 다른 곳으로 옮길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한은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살짝 너스레를 떨었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려 온갖 것이 떠내려 왔는데 그중에는 정혈을 모두 잃고 말라버린 시체도 몇 구 있었습니다. 잘 말린 나무토막 같은 시체였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그 시체들이 떠내려온 방향으로 이동하며 살폈더니 감옥 같은 곳이 있었고 그곳에 그런 시체가 더 있더군요. 다행히 그곳에도 공기 주머니가 형성되어서 잠시 머무를 수 있었는데 심법의 이름은 그곳의 벽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돌로 긁어놓은 정도라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물에 휩쓸리지 않아서 남아있었습니다. 아마 그곳에 있던 누군가 써놓은 것이겠지요. 그래서 알았습니다.”
대부분 만든 말이었지만, 그래도 필요한 정보는 모두 전달한 셈이었다.
덕분에 관여림은 이한의 말에 혈교가 이곳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생강시와 실혼인까지 발견한 터라 사교가 관여되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문제는 사교 중 어떤 곳에서 이곳에 관여했는지였는데 이한에 의해 그 정체가 밝혀진 것이다.
혈교라니!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들이었다.
“이 대협이 발견한 곳의 상황도 그렇고, 무공의 이름까지 나왔으니 정체는 확실하군요. 혈교가 이곳에 관여했음이 분명합니다. 사악한 자들이지요.”
“사악한 자들인 것 같기는 하더군요. 그곳에서 마른 장작처럼 변해서 죽어있는 자들을 보니 체접흡정흡기신공이라는 무공 자체가 사용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사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셨으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당연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흡기공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도교의 여러 문파에는 비슷한 무공이 있습니다. 심지어 밀교의 일파에서는 남녀의 일을 편법으로 사용하여 도를 깨닫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체접흡정흡기신공과 차이가 있다면 일방적으로 상대의 기운을 갈취하는가의 여부입니다. 흡기공이 추구하는 원래의 목표는 상대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내 기운을 넘겨주면서 서로의 기운을 북돋는 것입니다. 아니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균형을 맞추어 발전을 꾀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체접흡정흡기신공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정혈을 흡수하여 자신의 내공과 수명을 늘리는 것에 사용하니까요. 상대는 일방적으로 정혈을 잃을 뿐입니다. 며칠에 걸친 대법에 의해 정혈을 잃은 자는 간혹 죽기까지 하지요. 그곳에서 죽은 자들 역시 오랫동안 고통받았을 겁니다. 그 심법은 신공이 아니라 마공이라고 불러야 할 겁니다.”
관여림은 대놓고 체접흡정흡기신공이 가진 비밀에 대해 이한에게 말해 주었다.
내공과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비밀 말이다.
무림인에게 내공을 늘릴 수 있다는 유혹은 정말 참아내기 어렵다.
거기다 수명까지 늘릴 수 있다면 인간인 이상 혹하는 것이 정상이다.
숨어있는 함정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뻔히 파멸로 가는 길임에도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
관여림은 이한의 표정을 살폈다.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고 복수하는 사람은 흔하지만, 과거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과연 눈앞의 사람이 가진 진정한 모습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한은 체접흡정흡기신공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태연했다.
내공이니 수명이니 하는 것도 대충 예상하던 바였다.
내공이나 수명에 대해 욕심이 나기는 했지만 간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공에 대해서는 나노가 이미 대안을 만드는 중이었고, 수명은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몸을 통째로 갈아치우지 않는 한, 순수한 인간의 경우 180년 정도가 수명의 한계다.
드물게 200년이 넘는 사람도 있다지만, 어쨌든 평균은 그렇다.
이한은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유혹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한은 관여림이 말한 것 중에서 자신이 목격한 것과 차이가 나는 부분에 집중했다.
상대의 정혈을 흡수하는 시간.
관여림의 말과 달리 가짜 도사는 그야말로 순식간이라고 해야 할 정도 빠른 속도로 사람의 정혈을 흡수했다.
사람이 말라서 미이라가 되어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폭식의 권능을 가졌다고 했던가?
아마 가짜 도사들이 가진 원래의 능력이나 지식을 무공에 적용해서 만들어낸 변화일 것이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변화시킨 것이 또 있을지 몰랐다.
혈교의 무공이나 그들의 지식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혈교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군요. 가짜 도사들이 혈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 그들의 행방을 혈교에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중요한 무공을 넘겼을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닐 테니 분명 알고 있는 자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종대보는 이한의 말에 부정적이었다.
“혈교는 원래 반란세력으로 탄압받고 있던 자들일세. 감히 경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면 당장에 찢겨 죽임을 당할 정도지. 찾기가 어려울 거야. 하물며 그중에서도 높은 자라니! 어렵네. 어려워.”
“하지만 가짜 도사들을 찾기 위해서는 작은 단서라도 추적해야 할 판입니다. 우리가 북양까지 오는 동안 북면방어사나 예친왕과 관련된 쪽은 이미 조사할만 큼 조사했을 겁니다.”
“아마 그렇겠지. 그래도 일단은 돌아가서 조사한 자료를 놓고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네. 혹시 아나? 조용해지면 가짜 도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 그자들도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이 난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관여림은 내공과 수명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별다른 동요없이 가짜 도사들의 추적에 열을 올리는 이한을 보고 살짝 놀랐다.
그러나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기도 전에 팽호도가 다가와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체접흡정흡기신공에 대해 다른 자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한과 종대보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저쪽에서 열렬하게 벌어지던 토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이한이 있는 곳으로 온 팽호도는 얼굴이 붉어진 채 땀까지 흘리는 것이 토의 중에 어지간히 열을 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들 마음이 급하기만 해. 욕심 때문이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팽 대협.”
관여림의 질문에 팽호도는 화가 난 기세를 숨기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수로채에서 수공에 능한 자들을 초청하겠다고 난리네.”
팽호도의 말에 관여림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수적을 말입니까? 어떻게 믿고요?”
“내 말이! 그런데 다들 어서 안에 들어가서 뭐든 가져나와야 한다고 난리일세. 언가의 노파는 강시가 필요하다고 지랄이고, 개방놈들은 내부를 보고 싶어서 안달이야. 다른 자들이 더 모여들기 전에 안에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지.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지금 들어가 봐야 별것 없을 겁니다. 아까 제가 말한 것이 전부입니다.”
이한의 말에 팽호도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자네의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아. 우리가 아무리 경사에서 먼 곳에 있다고 해도 듣는 귀가 없는 것은 아닐세. 왜 우리가 이런 위험한 곳에 들어갔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자네는 왜 이런 곳까지 왔을까?”
팽호도는 이한의 옆에 있던 종대보에게 잠깐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다시 이한을 향했다.
“쌍수쾌검이 금의위에 있다고 하지만, 금의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지. 천영문에서 키운 사람 아닌가? 황실에서 보낸 진짜는 바로 자네겠지. 은밀전주 이한, 자네 말일세.”
무엇인가 잘못된 정보가 퍼진 모양이었다.
은밀전은 이미 문을 닫았고, 남은 자들은 상방으로 전환 중이었다.
이한이 어사대부의 관직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한은 자신이 받은 오해를 풀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 있는 거대 무림 세가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공간을 이동하는 술법에 대해서는 우리도 들은 바가 있네. 황실에서 그 술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진국에서 온 도사들을 우대했다는 것이 내 판단이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 그러면 설명해 보게. 무엇이 오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