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가짜 도사는 하나가 아니다. >
61. 가짜 도사는 하나가 아니다.
절벽의 높이는 백 장이 넘었다.
미터로 치면 300미터가 넘는다는 소리다.
이 정도의 높이라면 무림인이라고 해도 떨어지면 죽는다.
하지만 이한은 믿는 바가 있었다.
절벽 아래에 있는 호수.
그곳으로 떨어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무리 물 위로 떨어진다고 해도 높이가 높이인 만큼 충격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한은 사람이 물에 떨어져서 몸이 박살이 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호수 위로 떨어지기만 한다면 죽을 일은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호수까지의 거리였다.
십여 장에 달하는 거리를 건너뛰어야 한다.
그 거리를 건너뛰지 못한다면 울퉁불퉁 크고 작은 바위가 깔려있는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건 좀 곤란했다.
무림인이 멀리뛰기를 하면 얼마나 멀리 뛸 수 있을까?
10장을 건너뛸 수 있을까?
일반인이라고 해도 2장 정도의 거리를 건너 뛰는 사람은 흔하다.
3장 가까이 뛰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근육의 힘만을 이용하는데도 그 정도 거리를 건너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공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무림인은 얼마가 되었든 일반인보다는 멀리 뛰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한은 자신이 얼마나 멀리 뛸 수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주먹으로 바위를 부수고, 칼로 나무를 베어 넘기면서 자신의 얼마나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지 실험해 본 적은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신체 능력에 대한 한계를 재어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한계가 얼마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될 참이었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이한은 공중에서 곡예를 하는 것처럼 연달아 몸을 비틀며 내공의 힘을 빌려 허공을 박찼다.
스프링이 허공에서 튕기면서 앞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경공의 고수들이나 구사한다는 궁신탄영(弓身彈影)과 비슷했다.
물론 진짜 궁신탄영은 아니었다.
나노의 분석에 의해 만들어진 몇 가지 무공의 기법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천상제나 능공허도처럼 공중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이는 보법은 아직 능력에 닿지 않으니 나노가 가능해 보이는 것부터 시작한 결과 만들어낸 기법이었다.
이한은 달리던 속도에 몸의 반탄력을 이용한 충격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경력을 뿜어내며 쳐내는 힘까지 함께 더해졌다.
공중에서도 계속 힘이 더해지자 앞으로 날아가는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덕분에 절벽에서 뛰어내린 이한은 완만한 포물선을 계속 유지하며 천천히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
풍덩!
바위투성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호수에, 그것도 아주 가장자리가 아니라, 물이 어느 정도 있는 곳에 떨어질 수 있었다.
예상대로 충격이 약간 있기는 했지만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근육이 조금 상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호수의 바닥까지 닿았던 이한은 호수 바닥을 박차고 곧장 호수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
[근육 파열! 치료를 시작합니다. 완료까지 2분! 이한님이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방금 바위에 떨어져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널 믿었지!”
호수 위로 떠오른 이한은 물을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을 믿었고.
적어도 뼈가 부러질 일은 없었다.
[사고를 칠 때는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미리 대비가 가능하면 성공확률을 최대한 높일 수 있습니다.]
“이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서 뛴 거야. 적어도 땅바닥에 떨어질 일은 없었어.”
백 장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8초가 조금 안 된다.
그 시간 동안 허공에서 어디에도 디디지 않고 10장을 넘게 앞으로 가야 땅바닥이 아니라 호수에 떨어진다는 의미다.
무공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무공을 가진 사람이 그 정도를 못 할 리가.
관건은 그것에 대한 확신과 확신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용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 장의 높이에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8초가 조금 안 된다는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그런 지식이 없다면 온전히 감에 기대여 움직여야 하는데, 목숨이 걸린 일을 애매하기만 한 감에 의존해서 실행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결단이다.
지금도 절벽 위에는 이한 못지않은 실력을 갖춘 자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절벽을 뛰어내린 사람은 결국 이한 한 사람뿐이었다.
호수 위로 떠오른 이한은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일단 목표는 근처에 떠 있는 작은 어선이었다.
어선을 확보한 후 중간에 호수로 떨어져서 낙오한 두 명의 가짜 도사를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호수를 가로질러 도망친 자들을 쫓기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낙오한 자들을 확보하는 것이 먼저였다.
잠시 후 이한이 작은 어선에 올라서자 나룻배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들은 곧장 호수로 뛰어들어서 도망을 쳤다.
두려움이 그들을 도망치게 만든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려서 호수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좀 떨어져 있는 호숫가에는 무기를 들고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무림인들 간의 다툼에 휘말리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근처에 있다가는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저렇게 무턱대고 도망치는 것이다.
결국 어선에 혼자 남은 이한은 스스로 노를 저어야 했다.
노를 젓는 경험은 충분히 있었다.
이한은 빠르게 낙오한 자들을 향해 나아갔다.
중간에 호수로 떨어져서 낙오한 가짜 도사는 두 명이었다.
하나는 호수에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던지 이미 익사한 후였다.
이한은 아쉬움을 느끼며 일단 어선으로 그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나노가 그자의 머릿속을 스캔하는 동안 다른 하나를 향해 나아갔다.
둘 중 하나는 죽었지만 다른 하나는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헤엄을 치며 도망치던 그자는 이한의 어선이 가까이 접근하자 오히려 어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한이 던져준 밧줄을 잡고 순순히 올라오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는 매우 협조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일단 어선으로 올라오자마자 그자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원을 계속 그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konfidu vian volon al mi ripozu ripozu.”
이한을 바라보는 가짜 도사의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이한은 가짜 도사가 옮조리는 주문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한가지 감정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뜬금없게도 가짜 도사의 말을 따르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았다.
그의 말대로 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 누워서 잠이라도 자고 싶어졌다.
그의 말대로?
이한은 자신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에게 의지를 맡기고 쉬라는 명령이었다.
물론 충동이 일었다고 해서 곧장 그 충동에 따를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단지, 지금까지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신기해서 잠시 그대로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노는 이한의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즉시 경보를 발하며 행동에 나섰다.
[경고! 약한 최면 상태에 빠졌습니다. 즉시 깨어나십시오! 즉시 깨어나십시오. 충격을 가합니다. 하나! 둘! 셋!]
짜릿한 기분이었다.
숫자를 셀 때마다 전기로 두뇌를 지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절로 신음이 날 정도로 강렬한 편두통이 이한을 가격했다.
“으윽. 나 멀쩡하다. 전기로 지지지 않아도 돼.”
[정신에 대한 공격은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한님이 내공을 익힌 후로 정신적 육체적 저항력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만약을 생각해야 합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정신 공격에 너무 무방비하게 있는 것은 금물입니다.]
“저 외계어를 알아들을 수 있어서 신기했을 뿐이야. 너도 내 기억에서 읽어보라고.”
이한은 나노의 잔소리에 투덜거리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여전히 중얼거리며 눈빛을 빛내고 있는 가짜 도사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짜 도사는 이한의 손에 호락호락하게 잡혀주지 않았다.
계속 원을 그리며 이한의 눈을 어지럽히던 손에서 갑자기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손목 아니면 팔에 암기를 발사할 수 있는 기관을 매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한은 다급하게 물러서며 팔을 휘둘러서 암기를 막았다.
그러나 한두 개도 아니고 바로 눈앞에서 쏟아지는 수십 개의 바늘같은 암기를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일부는 아예 피해버렸고 일부는 쓸어냈지만 그래도 팔에 박히는 몇 개는 어쩔 수 없었다.
이한의 팔에 박힌 몇 개의 암기를 본 가짜 도사는 다시 한번 암기를 쏟아냈다.
이번에는 반대쪽 팔에 차고 있는 암기통에서였다.
이한은 이번에도 방금처럼 일부는 피하고 일부는 맞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 모습을 본 가짜 도사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것은 폭우침(暴雨針)이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해독제를 먹지 않는다면 너는 오늘이 가기 전에 죽을 것이다. 무릎을 꿇고 내게 해독제를 간청해라.”
어떻해서든지 이한의 마음을 꺾어서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보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이한은 지금까지 자신이 부딪친 가짜 도사들이 한 부류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황궁에서 충돌이 있었던 자들은 실력의 고하가 있기는 했지만 육체를 수단으로 사용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무공을 사용하고, 육체를 변화시키며 싸웠다.
고독을 수단으로 사람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그래서 싸울 때는 무림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본 자들은 달랐다.
이들은 진법을 설치하고, 강시를 부렸다.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심지어 자기들끼리도 그랬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 같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한의 눈앞에서 떠들고 있는 자는 지금까지 이한이 부닺혔던 가짜 도사들과는 또 달랐다.
최면과 암시로 상대방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했다.
고독을 사용하던 자들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이자는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준비된 사이비 종교인 같은 느낌을 주었다.
지금 독으로 중독을 시키는 데에 성공해서 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텐데도,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하기보다는 지배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이한과는 상성이 안 맞는다고 해야 할까?
이한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만나본 가짜 도사들 중 상대하기가 가장 쉬웠다.
[마비독의 해독을 완료했습니다. 샘플을 저장합니다.]
이한은 다시 손을 뻗어 의기양양하게 떠들던 가짜 도사의 목을 움켜 쥐었다.
너무 놀란 가짜 도사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폭우침이라면 사천 당문의 암기로군. 그거 문외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8대 암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함부로 밖에 내돌릴 물건은 아닐 텐데? 그런데 두 개씩이나 나와 있다고?”
이한의 말에 가짜 도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한이 가짜 도사와 당문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여럿이었다.
이한의 손이 가짜 도사의 머리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