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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62화 (62/78)

< 62. 경사로 복귀. >

62. 경사로 복귀.

가짜 도사의 머리를 움켜쥔 이한은 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자의 눈을 노려보면서,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을러대면서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제대로 답변을 들은 것은 셋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사로잡힌 도사가 이한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내뱉을 정도로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머리를 굴리며 말을 아끼려고 했고, 가끔은 명백한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대진국 출신임을 계속 주장했고, 자신은 사부를 따라 이곳에 처음으로 방문을 했을 뿐, 아는 것이 없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위협과 폭력으로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치고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상관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가짜 도사가 질문에 반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

입을 열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답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노가 읽어낼 수 있는 정보가 확 늘어난다.

사실 인간의 두뇌에 들어있는 생각이나 기억을 읽어내는 기술은 의외로 간단하다.

두뇌에서 발산되는 전기적 신호를 잡아낼 수 있다면, 첫걸음은 뗀 것이나 다름없다.

나머지는 전기적 신호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잡음으로 가득 찬 전기적 신호를 가공해서 제대로 된 정보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 말이다.

그러나 해석한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기억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게 얼마나 주관적이냐 하면 가짜 기억과 진짜 기억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명백한 거짓이라고 해도, 기억하는 사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한은 나노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누군데?”

[이자가 기억하고 있는 이한님의 모습입니다.]

이한은 고통과 두려움으로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가짜 도사를 한번 흘낏 본 후 다시 시선을 돌려 나노가 망막에 띄워준 이미지를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비처럼 쏟아부은 암기를 모조리 튕겨내는 강철 피부를 가진 거인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1.5 배는 되는 덩치에 험상궂은 얼굴을 거인은 가짜 도사를 일격에 쓰러뜨린 후 잔인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거인과 이한이 가진 공통점이라는 것은 눈매와 얼굴의 형태 정도뿐이었다.

나머지는, 심지어 옷조차 공통점이 없었다.

“두뇌를 스캔해서 얻어내는 기억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데이터를 보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군.”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주관적인 감정이 포함된 경우 자체적인 보정을 거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두뇌에 남은 기억은 보정을 거친 후의 자료일 뿐입니다. 실제와 다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상대의 외모에 변화가 없더라도 사랑에 빠지기 전후의 모습을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 그러한 예입니다. 기억은 정보로의 가치가 많이 떨어집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과장되고 왜곡된 정보라도 필요해. 어떻게 할까? 나노는 지하에서도 단편적으로 기억을 수습했었지? 한꺼번에 내게 넘기는 것이 낫겠나? 아니면 네가 계속 가지고 있을래?”

나노가 죽은 자들의 두뇌를 스캔해서 기록해 놓은 정보들은 아직 나노의 저장장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한은 나노가 전해주는 말과 이미지로 정보를 파악할 뿐 자신의 기억처럼 활용할 수는 없었다.

지식을 두뇌로 업로드 하는 것은 별문제가 없지만, 기억을 업로드 하는 것에는 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기억을 함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금물이었다.

자칫하면 다중 인격이 생길 수 있다.

인격이 붕괴해서 미쳐 버리는 경우도 드물게 발생했다.

그래서 기억의 업로드 과정에서는 정신과 전문의의 관찰과 상담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정신과 전문의가 있을 리가 없으니 그 역할을 나노가 맡아야 했다.

[이한님이 직접 기억을 경험하고 판단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을 업로드하시려면 적어도 48시간이 필요합니다. 안전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할 때 업로드 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고 업로드 후에는 반드시 제게 상담을 받으셔야 합니다.]

“좋아. 경사로 가면 그곳에서 업로드를 하도록 하지.”

이한은 어선을 몰고 호숫가로 향했다.

호숫가에는 이한과 함께 산중턱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이 이미 내려와 있었다.

절벽 위에서 이한이 가짜 도사들을 사로잡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몰려온 것이다.

이한은 종대보에게 사로잡은 가짜 도사를 넘겼다.

그가 가지고 있던 암기통도 함께였다.

“아니, 이것은 당문의 암기통 아닌가? 폭우정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못이 아니라 독이 발린 침을 쏘아내는 것을 보니 폭우이화침의 변형인듯 하군요. 아마 폭우침이라고 부르는 것일 겁니다.”

다들 강호의 경험이 적지 않아서 그런지, 암기통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금방이었다.

사천 당가는 직접 대장간을 운영하고, 장인들을 관리하기 때문에 당가에서 생산한 암기통은 다른 곳과 구분하기가 쉽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특히, 품질이나 만듦새에서 당가 특유의 집요함이 느껴져서 착각할 수 없다고들 했다.

“그런데 왜 당문의 암기를 이놈들이 가지고 있는 거지? 당문의 암기는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야. 어쩌다 선물로 나가는 경우는 있지만, 그나마도 명문대파끼리의 오고감이지 이런 자들의 손에 들어갈 물건은 아닌데?”

특히, 팽호도는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오대 세가니 십대 세가니 하면서 함께 묶여서 거론되는 지방의 거대 세가 중 하나가 관련된 일이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기는 할 것이다.

암기통이 하나라면 할 말이 있겠지만, 죽은 자가 가지고 있던 것까지 포함해서 4개가 한꺼번에 나온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어쩌다가 구했나보지 하고 그냥 넘어갈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속으로 냉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사천 당가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팽호도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아예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한은 서명에서 예친왕부와 관련이 있던 폐성을 조사할 때 독심흑수 당도군과 충돌했었다.

당도군은 당가주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했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당문에서 이러한 조건은 그가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이 혈교와 손을 잡고 나타나서 예친왕과 한패거리처럼 굴었던 것이다.

다행히 당시에 그를 제압할 수 있어서 무당의 도사들에게 넘기기는 했지만, 당문의 행보는 여러모로 수상했다.

혈교라니!

예친왕부에서 주선한 것 같았지만 당도군은 혈교의 사람과 함께 거리낌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혈교의 흔적이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혈교의 인물이 등장한 정도가 아니라 중요한 무공을 익힌 자가 나타날 정도였다.

이한의 눈에는 예친왕, 혈교, 가짜 도사, 사천 당문까지 모조리 한패거리로 보였다.

적어도 서로 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갑자기 의문이 떠올랐다.

모두가 한 패거리라면 사천에도 가짜 도사들의 은신처가 있을까?

이곳에서 도망친 도사들이 향한 곳이 혹시 사천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또 너무 먼 곳인데······

무엇보다 도망친 방향이 맞지 않는다.

제국의 북쪽, 사막이 있는 곳이라야 방향이 맞았다.

그래도 사천 역시 반역자들이 숨기에 그럴듯한 장소이기는 하다.

사천은 전통적으로 경사와 멀리 떨어져서 따로 놀던 지방이었다.

어떤 때는 별개의 나라처럼 굴기도 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지형 때문이었다.

들어가는 길도, 나오는 길도 한줄기 산길에 불과해서 제대로 된 왕래조차 힘들었다.

그런 곳에서 자리잡고 세력을 키워온 사천 당문이었다.

주변에 있는 자들이 모두 자신보다 못한 자들뿐이니 간이 커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준비하던 일이 한두 개 어그러진다고 해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일을 벌일 정도로 말이다.

이한은 사천 당문을 기억해 두었다.

이한이 낙오한 자들을 잡은 후로는 지루한 추적의 연속이었다.

호수 너머로 도망친 가짜 도사들을 쫓아 며칠을 허비하며 주변을 수색했다.

하지만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호수를 날아서 건넌 그들은 생각보다 멀리 가버린 듯했다.

추종술에 제법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도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고, 동원된 사냥개들도 전혀 냄새를 맡지 못했다.

게다가 이곳 자체가 황폐한 곳이라서 탐문도 힘들었다.

결국 추적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사이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곳은 물에 잠긴 지하 시설이었다.

초청받은 수적은 물론이고, 수공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 벌써부터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다.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한 종대보 역시 그곳에 계속 남아서 지하를 살펴보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한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지하에서 얻어낼 만한 정보는 이미 얻어냈고, 도망치던 가짜 도사를 잡는 공도 세웠으니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이한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먼저 경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간에 따로 조사할 것도 없어서 그냥 경사로 내달렸다.

갈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이한은 보름 만에 경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한이 경사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간 곳은 명월루였다.

명월루는 그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번성한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좀 더 밝고 활기찼다.

여전히 손님은 끊이지 않았고, 명월루를 지키던 무림인들 역시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

설향이 할 일을 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황궁 지역에서 사건이 터지고 관리들이 죽어 나가도 경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심지어 북면방어사에서도 일이 터졌을텐데 그렇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신분에 따라 사는 세상이 아예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언로는 막혔고, 신분 사이의 압력도 쌓이고 있으니 나중에 일이 벌어지면 정말 크게 벌어질지도 모른다.

여문기는 여전히 명월루에 머무르고 있었다.

부상때문에 무공을 잃은 그는 이제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한에게 은밀전이 완전히 문을 닫았음을 알려주었다 .

황실과 여문기의 관계도 끝이었다.

“은밀전은 이제 완전히 문을 닫았네. 은밀전의 재산 중 황실에서 나온 것은 황실로 되돌렸고, 나머지는 은밀전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갈라주었네. 상방을 만든다고 하더군. 그곳에는 자네 몫도 있으니 나중에 확인하게.”

“낙향하실 생각입니까?”

“낙향? 내 고향은 경사나 다름없네. 인제 와서 내가 가기는 어디를 가겠나.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당분간은 다른 곳에 파견나갈 일이 없을 텐데.”

“어사대에서 한 가지 일을 알아본 후 결정할 예정입니다.”

이왕 관직에 있으니 이용할 것은 이용해야 했다.

잠시 후 이한은 어사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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