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사천에서 가장 간담이 큰 자들 >
64. 사천에서 가장 간이 큰 자들.
하지만 이한은 금방 사천으로 떠날 수 없었다.
금의위에서 이한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금의위에서는 하늘로부터의 침투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가짜 도사들이 하늘을 날아가는 것을 본 것도, 하늘을 날 수 있게 해 주는 옷을 어떻게 입고 있었는지 아는 것도 이한뿐이었다.
금의위는 이한의 조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한은 북양으로부터 포로와 여러 종류의 증거물이 도착할 때까지 사천으로 떠나지 못하고 경사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공중으로부터의 침투 가능성 때문에 마음이 급했던 금의위에서는 증거물이 도착하자마자 곧장 경사 외곽에 있는 산으로 달려갔다.
북양에서처럼 백 장이 넘는 높이의 절벽이 있고,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곳이었다.
하지만 북양에서와 달리 그 아래에 호수 같은 것은 없었다.
떨어진다면 즉사를 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장소였다.
이한은 이런 장소에서 실험하다가는 자칫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금의위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경공에 일가견이 있다는 위사를 실험에 투입한 것이 그나마 만약을 대비한 준비였다.
실험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윙슈트를 닮은 옷을 입고 절벽에서 뛰어내린 위사는 경공이 뛰어난 사람답게 어떻게든 균형을 잡고 하늘을 나는 것에 성공하기는 했다.
잠시이기는 했지만 마치 새처럼 하늘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윙슈트를 닮은 옷은 가짜 도사들조차 중간에 균형을 잃고 떨어질 정도로 불안정한 물건이었다.
금의위의 위사 역시 중간에 균형을 잃고 추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나무에 충돌한 후 비탈길로 떨어져서 죽지는 않았지만 큰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금의위 사람들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백 명의 무림 고수들이 한꺼번에 하늘로 침투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던 그들은 하늘을 나는 옷이 예상보다 훨씬 불안정하다는 사실에 안심을 한 것이다.
금의위에서는 황궁에서 경비를 설 때, 만약을 대비해서 하늘도 감시해야 하기는 하겠지만, 경비를 서는 위사들을 크게 늘릴 필요까지는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한이 금의위와 함께 돌아다니며 실험을 하는 동안 판어사시중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판어사시중은 일을 시킬 때 그냥 말로 때우고 마는 사람이 아니었다.
관리가 해야 할 일상적인 일에는 정해진 봉록만으로 충분하지만, 위험하거나 중요한 일에는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이한을 위해 한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이한의 품계를 두 단계 더 올려서 어사판관을 제수한 것이다.
최근에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외부에서 들어와 어사대부에 임명된 것만으로도 특별 취급이었는데, 어사대부가 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어사판관이라니!
정치적인 이유로 임명되는 판어사시중을 비롯한 어사대의 고위직 몇 명을 제외한다면 어사대에서 가장 높은 직위였다.
어사대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황제의 측근들 중에서도 반대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어린 황제는 판어사시중의 판단을 믿어주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부터 자네는 어사판관일세. 자네 위로는 나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면 돼. 어사대에서 자네보다 직책이 높은 사람이 몇 명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고할 것도 없고 허락 맡을 것도 없네.”
그래도 이한은 곤란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출세가 아니었다.
어차피 떠나야 할 세상인데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곤란했다.
“아무래도 지나칩니다. 저는 원래 어사대에서 큰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상궤를 벗어난 승차를 하게 되면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사천 당문이면 사천 지방의 왕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지. 기껏해야 어사대부 따위가 가서 뭘 하겠나? 어사판관 정도는 되어야 그자들도 긴장할 걸세.”
아무리 어사대가 황제 직속의 감찰 기관으로 감찰권과 재판권을 동시에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해도, 어사대의 모두가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막강한 권한이라서 판어사시중을 비롯한 어사대의 핵심 몇 명이 그런 권한을 가진 사람의 전부다.
어사판관은 그들 중에서도 실무에 가장 가까운 직위였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파견되어 있는 어사대 사람들의 비협조를 걱정하는 것이지요.”
“걱정하지 말게. 그런 짓을 할 만큼 멍청한 자는 보내지도 않았어. 만약 쓸데없이 기싸움을 하겠다고 나서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반역자와 한패니까 바로 목을 잘라 버리게. 책임은 내가 지지.”
이러면 할 말이 없다.
물론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자가 있어도 목까지 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황제의 허락도 없이 관리의 목을 함부로 자르다니!
감찰권과 재판권을 함께 가졌으니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뒷감당이 쉽지 않다.
기싸움을 걸어서 죽였다고 할 수는 없으니 반역자로 만들어야 하는데 진짜로 반역자가 아닌 바에야 그게 쉬울 리가.
게다가 그런 식으로 일하면 주변의 협조를 받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자칫하면 고립되어서 귀머거리가 되는 수가 있다.
이한은 판어사시중이 강력하게 자신을 밀어주겠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이들과 별로 얽매이고 싶지 않았지만, 주겠다는 것을 지나치게 거부하는 것도 안 좋았다.
“그리고 이거 받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이한에게 판어사시중이 건넨 것은 한 통의 문서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여러 첩보를 정리한 것으로 황제 주변의 측근들만이 본다는 문서가 분명했다.
아직 어사판관에 불과한 이한에게는 이러한 문서를 볼 만한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이한은 문서의 중간부터 나와 있는 첩보 내용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사천 지방에 얼마 전에 완성된 탑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탑 꼭대기에 사람 머리통보다 더 큰 옥구슬이 올라가 있다라···..”
“자네가 북양에서 보낸 보고서를 읽고 급하게 조사를 명령했지.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사천 지방은 이미 주목하고 있던 곳이라서 금방 보고서가 올라왔다네. 바로 오늘 아침에 올라온 걸세.”
“예상은 했지만, 가짜 도사들이 사천에 있는 모양이군요.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미 예상하던 일이기는 하지. 고독이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사천 당문에서 관련성을 부정한다고 해서 누가 납득을 해 줄까? 가서 조사하고 판결 후 죽이게.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자네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네.”
하지만 이한의 관심은 사천 당문이 아니라 탑으로 향하고 있었다.
*
사천 지방은 풍요로운 땅이다.
제국의 다른 지역과 교류하기에는 교통이 불편해서 촌사람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의 부까지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무림의 문파들 중에서도 사천 지방의 부를 바탕으로 세력을 일으킨 곳이 여럿이었다.
우선 청성파나 아미파 같은 곳이 있다.
둘 다 정도의 문파로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왔다.
역사뿐 아니라 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무림의 문파들 중 강력한 곳을 꼽을 때면 반드시 포함된다.
9파1방이니 7대 문파니 할 때면, 언제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운남 지역에 있는 점창파와 함께 제국 남부의 대표적인 문파로 자리매김을 해 온 것이다.
하지만 사천의 무림 문파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따로 있다.
사천 당문.
사천에 자리잡고 있는 당씨 성을 가진 자들로 구성된 문파이자 거대 세가였다.
청성파나 아미파가 9파1방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처럼 사천 당문도 제국의 가장 강력한 세가를 꼽을 때면 반드시 포함된다.
5대 세가의 일원이자 정도의 거대 문파.
그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천 당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천 당문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도의 문파라고 하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은혜는 10배로 갚고 원한은 100배로 갚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편집적인 면이 강한 곳이다.
심지어 주로 사용하는 무공도 암기술과 독공일 정도로 어딘지 모르게 사이한 면도 있다.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트집을 잡을 수 있고,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는 여지가 적지 않은 가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 같은 벽지에 콕 하니 틀어박혀서 자기들끼리 살아가고 있으니 지금까지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가끔 당씨 성을 가진 사람이 무림에서 활동하는 경우에도 손속이 지나친 면은 있지만, 그래도 말은 어느 정도 통하고 돈은 정말 많은 촌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기에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커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사천 지방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당문 특유의 편집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은 사천 지방의 흑도 문파에게는 재앙에 가까웠다.
청성파나 아미파는 자리잡은 곳도 산속이고, 종교적 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곳이라서 이권을 두고 외부와 다툴 일이 거의 없다.
혹시 이권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면 속가의 제자들이 나서서 해결을 하곤 했다.
점잖게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속세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기본 방침인 것이다.
이러면 당문은 물론이고 흑도 문파와도 크게 부딪칠 일이 없다.
하지만 당문은 달랐다.
거대한 규모의 토지를 점유하고 소작을 주었고, 사천 지방의 중요한 사업체마다 당문의 지분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니 흑도 문파가 사천에서 덩치를 키우면 반드시 당문과 부딪칠 수밖에.
그런데 일단 충돌이 생기면 당문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10배로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100배로 원한을 갚는다는 말은 절대로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지금까지 당문과 충돌한 흑도 문파 중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말살당한 것이다.
이럴 때마다 흑도의 문파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사천 지방의 민심은 당문에게 환호하고, 사천 당문이야말로 진정한 명문 정파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속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흑도 문파의 규모가 적당히 커지면 일부러 충돌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명분을 만들고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멸문시켜 버리고 재산을 강탈한다.
이러면 가축을 키우다가 잡아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대놓고 불만을 말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정도에 속한 문파들이야 흑도에 속한 문파들이 멸문을 당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흑도에 속한 문파들 역시 일단은 경쟁자가 줄어드는 것이니 나쁠 것은 없다.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남은 찌꺼기를 두고 다투면 다투었지 당문에게 뭐라고 하는 자는 없었다.
그럴만한 간담을 가진 자는 이미 죽었고, 남은 자들은 그럴 만한 간담이 없는 자들뿐이었다.
사천 당문의 사람들은 그렇게 수백 년을 살아왔다.
사천 당문을 견제하는 자들 없이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천 지방에서 가장 간담이 큰 자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