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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72화 (72/78)

< 72. 먼저 대화를 >

72. 먼저 대화를

“그나마 탑은 멀쩡하군.”

“예. 그렇지만 옥광산은······”

이한과 함께 온 당문의 장로들 중 하나인 당기는 말끝을 흐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광산은 엉망이었다.

모든 면에서 말이다.

멀리 보이는 광산 입구는 붕괴해서 절반쯤 막혀 있었고, 광산 주변의 임시 건물들 중 일부는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광산 주변의 땅도 멀쩡하지 않아서 곳곳에 생긴 큰 구덩이로 인해 위험하게만 보였다.

게다가 그중 몇 개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지진이 일어나서 광산이 붕괴했다고 하면 그나마 이런 피해를 설명할 수 있겠다.

광산이 붕괴한 여파로 지상의 건물도 무너졌고, 광산 주변에 크고 작은 구덩이와 구멍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이거 지진이라도 일어났던 걸까?”

이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진은 아닙니다. 광산 붕괴로 인해 주변 지형이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최근 사천 지역에서 지진이 관측된 적은 없었습니다. 광산 붕괴의 원인은 지진이 아니라 갱도 내부의 인위적인 또는 자연적 붕괴로 판단됩니다.]

나노는 이한의 지진원인설을 즉시 부정했다.

그러나 이한과 달리 나노로부터의 정보제공이 없는 당문 사람들은 지진 이야기가 나오자 더욱 표정이 안 좋아졌다.

광산 외부보다 광산 내부가 더 엉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진 때문에 무너진 광산을 폐쇄해야 할지도 몰랐다.

“글쎄요.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지 피해는 정말 클 것 같습니다.”

아무리 속세의 사정을 신경쓰지 않고 무공만 수련해 온 사람들이라고 해도 명색이 당문의 장로다.

가문에서 운영하는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예 모를 수는 없다.

옥광산에서 오랫동안 짭짤하게 이익을 뽑아먹기는 했는데, 이제 옥광산에서 나오던 이익은 사라졌고, 대신 복구를 위한 대규모 투자를 해야 할 판이다.

약간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당문이 입은 손해가 신경 쓰이는 것이 정상이다.

더구나 문서를 통해 숫자를 보는 사람들과 달리 이한의 일행은 광산에 직접 와서 주변의 상황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광산이 입은 물리적 피해 말고도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이러면 심리적 타격을 안 받을 수가 없다.

곳곳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얼마나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한 시체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일부는 글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팔은 이쪽에, 다리는 저쪽에 있는 식이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과연 원래의 모습으로 모아서 꿰맬 수는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박살 난 시체가 아닌 경우는 대부분 독에 중독되어 죽었음이 분명했다.

피부가 변색이 되어 있거나, 입이나 코, 심지어 눈으로도 검은색의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부상자도 없었다.

모두 죽은 자뿐이었다.

“과연 당문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독지신편(獨指神鞭)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놀랍군요. 이 정도로 날뛸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폐관수련을 했다고 하더니 단순히 행적을 숨기기 위한 변명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어사판관께서도 아시겠지만 아무리 작은 가문이라고 해도 가주가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당문 같은 거대한 가문이라면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시간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문파의 진정한 고수는 장로들 중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실력이라니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최근에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경지를 밟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한은 좀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독과 암기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실력이 더 좋아졌다니!

암기는 무기의 수준에 따라가는 경우가 많으니 제쳐두더라도, 독공은 어떨지 의문이었다.

혹시 나노가 해독을 하지 못할 정도로 독한 독을 연성했을지 궁금했다.

사실 절정을 넘어 초절정에 도달한 무림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험하다.

독문무공이 무엇인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단순히 주먹으로 치거나 발로 차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찢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탑을 향해 가는 동안 이한의 눈에 들어온 시체들이 경고하는 바는 명확했다.

당문의 쫓겨난 가주는 독과 암기 이외에도 몸 쓰는 솜씨도 뛰어나니 대비하라는 경고 말이다.

다들 급소를 맞고 일격에 죽은 자들이었다.

시체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지만, 우르르 몰려서 한쪽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단 한 수도 막아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 색을 보니까 알겠군요. 이쪽은 대진국에서 온 도사들입니다. 아! 저자는 안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법 실력이 괜찮은 의원이었습니다. 그 옆에 쓰러져 있는 자 역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술과 장을 잘 만들었지요. 두 번 걸러 만든 술은 맛보기 힘든 진미였습니다. 이제 다시 만들 사람이 없으니 아쉬울 뿐입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당기는 탑 근처에서 죽어있는 시체들을 보면서 아쉬움을 내비쳤다.

지금까지 보았던 시체들은 대부분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탑 근처부터는 다른 색깔 머리를 하고 있는 시체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탑 주변에서 죽어 있는 자들은 모두 노랗고 빨간 머리카락들이었다.

7명이었다.

[탑의 벽면에 붙어있는 금속판에 음각되어 있는 문양이 저장된 이미지와 동일합니다. 오차가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측정됩니다. 같은 인쇄판에서 찍어냈다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수작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분명 아닙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좀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합니다. 탑의 내부도 관찰해 주십시요.]

하지만 나노는 죽은 자들보다 탑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탑이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이상 나노의 관심이 탑으로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발전시키는 것은 인공지능의 본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노는 자체적인 재귀학습을 통해 음각된 문양이 가진 의미를 몇 가지 추론한 상태였다.

비교할 수 있는 정보를 많이 구할 수록 완성된 지식에 더 가깝게 접근할 테니 보다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노의 요청대로 탑 내부를 관찰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한이 탑에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 나노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경고! 탑 내부에 인기척이 들립니다. 최소 2명이 확인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조용했던 탑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탁탁하는 소리와 함께 비릿한 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탑의 벽면에 음각된 문양에서 빛이 흐르고, 탑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흰색의 옥구슬에서 불꽃이 튀겼다.

이한은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경사에서 혼천감의 건물로 사용하던 12층 탑이 사라질 때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안에 누군가가 있다!”

“대진국 도사가 있나?”

반응은 빨랐다.

이한과 당기가 탑의 입구를 향해 뛰었다.

장로인 당윤과 당주인 당인걸은 즉시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누군가가 도망을 친다면 길목을 막을 생각인 것이다.

둘 다 어느새 암기통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이한과 당기가 탑의 입구로 뛰어들기도 전에, 불꽃이 사라졌다.

탁탁 튀면서 하늘을 향해 몇 가락 불꽃이 솟구치기는 했지만,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팍!

둔탁하면서도 조금 날카로운 소리였다.

불꽃이 몇 줄기 튀고 난 후 퓨즈가 나가는 것처럼 갑자기 불꽃이 사라졌을 때 난 소리였다.

동시에 탑의 꼭대기에 있던 백옥구슬이 굴러떨어졌다.

옥은 돌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깨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모래처럼 부서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일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백옥구슬은 모래 덩어리가 떨어진 것처럼 잘디잘게 부서졌다.

실제로 땅에 남은 흔적이라고는 흰색의 가루뿐이었다.

그나마도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옥구슬이 박살 난 순간, 탑의 중간층에서 벽면이 박살이 나면서 부서진 금속판과 목재가 아래로 쏟아졌다.

그와 함께 두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를 본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당도백?”

당도군과 너무도 흡사하게 생긴 남자였다.

차이가 있다면 좀 더 기백이 있다고 할까 아니면 위엄이 있다고 할 만한 태도였다.

그에게는 지배하는 자의 태도가 배어 있었다.

“그래. 내가 독지신편 당도백이다. 감히 당문의 가주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젊은 사람의 패기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군. 자네는 가서 예절 교육부터 받아야겠다. 어른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야. 그런데 당가타에 있어야 할 장로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요?”

당도백의 손에는 정신을 잃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잡혀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을 보면 광부처럼 보였지만, 머리카락 색이 붉은 것을 보면 가짜 도사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독지신편. 폐관수련을 하겠다면서 반대를 무릅쓰고 골방에 들어갔던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설마 청옥광산을 무너뜨린 것도 당신이오?”

당기는 엄중한 어조로 당도백을 다그쳤다.

마치 손아랫사람을 꾸짖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함을 못 느낄 당도백이 아니었다.

그는 잡고 있던 가짜 도사를 옆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한, 장로인 당윤, 당주인 당인걸.

마지막으로 당기를 노려 보았다.

“당기야. 육촌 동생아. 무슨 짓을 한 거냐? 설마 이들과 함께 나를 제거하겠다고 온 것은 아니겠지?”

“이미 다들 합의한 거요. 장로들은 모두 동의했소. 나야 들은 말도 있고, 제의받은 것도 있어서 형이 조용히 떠난다면 다 잊을 생각이지만.”

당기의 말은 당도백이 저항없이 당문을 떠난다면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당도백은 당기의 말에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너희들 제정신이냐? 내가 너희를 섭섭하게 대한 적이 있었나? 물론 몇몇 겁쟁이들에게는 심한 말을 한 적이 있지. 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들에게 깨달으라고 내리치는 죽비였지 모욕을 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를 제거하겠다고?”

“그게 문제요. 당신은 언제나 확신이 너무 강해. 나를 포함해서 장로들 모두는 당문이 사천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확장하자는 당신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기로 했소. 당연하겠지만 독립은 안건으로 올라오지도 못했소. 위험해도 너무 위험한 소리니까. 어쨌든 이제 당신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으니 당문을 떠날 것인지 말 것인지만 결정하시오.”

“당문의 가주가 내는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면 누가 내는 의견이 중요하다는 것인가?”

당도백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당기를 때려죽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당기가 하는 말을 듣자 폭발하고 말았다.

“당문의 가주? 누가 당문의 가주란 말이오? 당신은 더 이상 당문의 가주가 아니오. 우리는 당신을 더 이상 가주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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